CULTURE

내 옆에 없는 책

2015.10.12정우영

책과 먼 이더러 ‘무식하다’는 비난은 쉽다. 하지만 그 말에 분노하는 사람은 드물다. 책 없이도 괜찮다. 일단은.

Book판형

“책을 읽는 당신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누가 처음 썼는지 모르지만, 지금껏 대형서점과 출판사, 독서 모임 등에서 끊임없이 재활용되는 문구다. “작은 정성이 모여 큰 기적을 이룹니다”처럼, 의미를 활용하기보다 습관으로 튀어나온다. 책을 읽는 당신의 모습이 아름다울 확률과 별개로 저 문구를 쓸 때의 개별적인 판단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 한국에서 영화 감상하는 사람이나 음악 감상하는 사람을 ‘곱게’ 보진 않는다. 유독 책에 대한 고귀한 관념이 있다. 독서가 곧 출셋길이었던 5백 년 조선의 역사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학자들의 분석이 빈번하다. 높은 교육열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이 OECD 국가 중 독서량 최저라는 기사가 잊을 만하면 나오는 건 왜일까. 정말 입시와 취업 경쟁을 조장하는 “대한민국의 교육과 기업이 지금의 ‘무식을 권장하는 시대’를 초래(‘무식한 대한민국…“진지 빨지 말고 책 치워라”’ – <머니투데이>)”한 걸까? 분명한 영향력이 있겠지만, 책은 고귀하다는 전제에서만 유효한 분석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뭐든 읽고 있다. 양서라고 분류되는 책 이외의 글도 글이다.

철학가이자 역사가인 슈테판 볼만은 여성의 자아 확장과 독서의 관계를, 유수의 서양화를 통해 예증한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의 저자다. 그는 이 책에서 독서가 근대 여성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이라기보다 상상력이었다고 전한다. “쉽게 상상에 빠져든다고 널리 알려진 여자들이 해로운 중독적 독서로 인해 자신과 남편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부양자와 교육가는 유익하다고 간주하는 책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남자든 여자든 이 독자는, 독서와 관련한 일에서 다른 사람의 권고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중략) 오 려 시장이 제공하는 책을 읽었으며, 시장은 점점 더 많은 책을 내놓았다.”

17~19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여흥을 위한 도구로서의 책이 발견된 시기다. 상상력을 그 원천으로 하는 소설을 대여해주던, 조선의 세책방이 활발했던 것도 이때다. 글을 깨우친 사람들이 먼저 읽고 싶어 했던 것은 <논어>나 <맹자>가 아니라 연애담, 영웅담이었다. 책의 권력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지만, 사람들에게는 재미가 훨씬 가까웠다.

그때와 지금의 독서 지형도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교육자와 학자가 권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실제로 사람들이 소비하는 베스트셀러가 있다. 책보다 재미있는게 얼마든지 생기고, 독자가 단숨에 저자가 되는 사태가 벌어졌을 뿐이다. 책도 시대에 발맞춰 근근이 변화하고 있다. 누구든지 저자가 될 수 있다는 ‘글쓰기론’이, 책이라기보다 공책에 가까운 ‘컬러링북’이, 지식을 쉽고 단편적으로 습득하는 ‘요약형 인문학책’이, 어른을 대신해 때로는 호통하고 때로는 쓰다듬는 ‘자기계발서’가 득세한다.

대부분이 조악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사람은 늘 과거에는 조악했다. 차라리 조악한 책을 집는 사람이 향후에 고귀한 책을 택할 확률이, 책에 전혀 관심 없던 사람이 그럴 확률보다 높다. ‘무식을 권장하는 시대’라기보다 유식에 관한 너무 편협한 잣대를 가졌다. 근대에도 그랬지만, 가르침은 더욱 통하지 않는다.

현대의 독서는, 슈테판 볼만에 따르면 ‘무정부주의’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 인용된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의 묘사다. “이리저리 훑어보듯 쳐다보고, 문장 전체를 건너뛰고, 문장을 원래의 의미와 다르게 읽고, 그것을 오해하고 다시 만들어내고, 계속해서 엮어 나가고, 가능한 모든 연상 작용으로 저장하고, 그 책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결론을 끄집어 내고, 글에 대해서 화를 내고, 기뻐하고, 잊어버리고, 표절하고, 책을 어느 한쪽 구석으로 내던지는 것.” 현대의 독서는 훨씬 더 독자의 상상력이 강조되는 놀이다.

독서를 놀이로서 접근한 한국의 사례가 있다. 독서단체 ‘책읽는 지하철’에서 진행한 ‘지하철 책 읽기 플래시몹’이다.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각각의 회원이 가져온 책을 읽었다. 지하철 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읽는 생경한 풍경이 펼쳐졌다. 플래시몹이 끝나면 10명 남짓씩 나뉘어 벌이는 책모임으로 이어졌다. ‘책읽는 지하철’의 송화준 대표는 말했다. “독서문화가 점점 위축되는 건 계몽적이고 교조적으로 접근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재밌어 보이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해요. 다들 ‘책을 읽읍시다’라고 하는데 제 귀에는 ‘책은 재미없습니다’라고 들려요.” 적어도 책에 대한 고귀한 관념은 집어치 웠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하지만 “독서는 유쾌한 고립 행위”이며,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의 바르게 자신을 접근하기 힘든 존재로 만든다”고 슈테판 볼만은 말했다. 독서는 친목에 의해 정복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한편 인스타그램을 휩쓴 ‘Hot Dudes Reading’은 독서를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독서를 다룬다. 책을 읽는 섹시한 남자들의 사진을 올린다. 무슨 책을 읽는지는 적지 않고, 대개 그들의 외모를 예찬하는 글이 덧붙는다. <허핑 톤 포스트 US>는 “핫 듀드 리딩은 책보다 섹시한 것은 없다는 증명이다”라는 기사 제목을 달았다. 책이 섹시한 게 아니라 남자가 섹시한 것 이지만 책과 섹시한 남자가 동일선상에 놓이는 오류가 흥미롭다. 책이 고귀한 위치에서 내려왔다. 이 계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독서 문화의 아주 작은 부분을 호기롭게 확대했다는 것과 68만명의 팔로어다. 여기에선 “책을 읽는 당신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가 무의미한 예찬이 아닌 살아 있는 농담으로 들린다.

‘Hot Dudes Reading’의 살아 있는 농담은 그로부터 새로운 독서 문화를 파생시켰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hotdudesreading과 함께 책 읽는 모습을 올렸다. ‘Hot Dudes Reading’의 형식은 인스타그램 바깥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보그 US>는 ‘Hot Dudes Reading’을 인용해 남자 모델이 책 읽는 모습을 담은 화보를 진행하면서 올봄의 추천 도서를 더했다. 팔로어에게 ‘섹시한 남자가 책 읽는 사진’을 올리면서 #HotDudesReadingForACause를 달도록 해, 퍼스트 북 재단의 아이들을 위한 책 기부를 각각의 팔로워에게 권장하는 자체 캠페인도 벌였다. 독서문화가, 한사람이 나서서 가르치고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내 옆에 없는 책

유사한 시도가 한국에서도 있었다. 전철에서 누가 무슨 책을 보고 있는지 적거나 사진으로 남기면서 ‘전철에서 책 읽는 사람 찾기’라는 해시태그를 달았고, 트위터를 통해 순식간에 전파됐다. 1천2백 명이라는 유의미한 숫자가 만들어지자 페이스북 페이지도 개설했다. 하지만 초상권 침해라는 비난과 누군가 내가 뭘 읽는지 지켜보고 있다는 게 소름 끼친다는 트위터상 다수의 반응에 직면해 중단됐다.

‘Hot Dude Reading’ 역시 비록 소수였지만 초상권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논의의 속도보다 빠르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으며 그 목소리들은 무색해졌다. 또한 패션이라는, 자신의 외양에 부단히 신경을 쓰는 사람들의 분야, 사진이 찍히는 걸 얼마든지 환영하는 사람들의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철에서 책 읽는 사람 찾기’와 달랐다.

책이 패션만큼 가볍고 재미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패션 영역에서의 책은 또 다른 문 다. 실제로 주변에서 꾸준히 양서를 읽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지만,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과 잡지, 사진집에 달려드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본다. 한 분야를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탐구하는 사람에게, 책은 나중에 반드시 온다.

한국은 독서량뿐만 아니라 문해력도 OECD 최저다. 교육자와 인문학자가 ‘이 귀한 책’을 강조하는 사이, 아이들은 ‘저 고약한 책’ 에도 질린 현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책으로 세워놓은 질서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할 뿐 그 바깥을 포용하는 어른은 드물다. 문해력은,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하려는데서 출발하지, 싫어하는 걸 돌파하면서 길러지지 않는다. 이 이해의 경험은 나중에 자연스럽게 책과 만난다. 책만큼 고귀한 지혜가 담긴 매체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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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정우영
    일러스트
    문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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