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세상에서 제일 옷 잘 입는 남자와의 인터뷰

2015.10.13박나나

남성복에 ‘로맨스’와 ‘드라마’ 그리고 집착과 중독을 새겨 넣은 패션 디자이너. 세상에서 가장 옷 잘 입는 남자. 스테파노 필라티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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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 필라티와의 인터뷰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저녁에 있을 에르메네질도 제냐 캡슐 컬렉션 행사 준비 때문에 도쿄 아만 호텔은 약간 분주했다. 에디터는 아침 대신 블랙 커피를 마시며 긴자 스토어로 가는 차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비구니처럼 보이는 유니폼을 입은 호텔 직원들은 눈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연신 허리를 굽히며 작은 소란에도 깊이 사과했다. 아침 식당에서 우연히 스테파노 필라티와 마주쳤다는 에르메네질도 제냐 담당자는 “오늘도 예쁘게 입었더라고요”라는 말로 에디터를 긴장시켰다. 그를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에디터가 갖고 있는 필라티의 여자 옷 얘기, 에디터가 좋아하는 필라티의 남자 옷 얘기, 그리고 필라티만큼이나 유명한 필라티의 친구들 얘기를 밤새 할 수 있었겠지만, 오늘은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와인을 마시며 그런 소소한 얘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이미 12시가 가까워졌지만 차는 오지 않았다. 앞의 인터뷰들이 길어진다는 이탈리아 브랜드 담당자는 “as usual”이라 말하며 양손가락 두 개를 토끼 귀처럼 꺾었다 펼 뿐이었다. 정오가 조금 지나 도쿄 긴자 글로벌 스토어에 도착했다. 이번엔 생수를 마시며 기다려야 할 차례였다. 누군가 헤어밴드에나 얹으면 어울릴 만한 일본식 디저트를 권했지만, 생수만 한 잔 더 주문했다. 인터뷰가 막 끝났는지 필라티가 다리와 바닥 사이에 정삼각형을 만들며 큰 보폭으로 지나갔다. 바지 밑단을 툭툭 만 회색 수트, 목과 몸에 딱 맞는 화이트 니트, 목에는 물에 한 번 적신 것 같은 실크 스카프를 재킷 단추만 한 크기의 매듭으로 꼭 묶었고, 블랙 하이퍼덩크를 신었다. 검정 양말에 나이키 로고가 거꾸로 된 걸 보니, 완벽주의자로 소문난 필라티도 정신이 없긴 한가 보다. 몇 번의 호쾌한 웃음소리와 특유의 이탈리어식 영어가 문틈으로 들리던 앞 인터뷰가 끝나고, 마침내 차례가 됐다.

당신을 아시아에서 이렇게 자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중국 20주년 기념 스페셜 컬렉션과 한국 영화감독과 함께한 <A Rose, Reborn> 프로젝트, 그리고 이번 일본 캡슐 컬렉션까지. 아시아에 관심이 많나요? 제냐의 비즈니스를 위해 관심이 많아요. 솔직히 내 회사는 아니지만, 제냐의 전략이 흥미로워요. 중국 스페셜 컬렉션은 내가 오기 전부터 진행된 프로젝트였어요. 로즈리본은 내가 제냐에 온 후 뭔가 활력이 필요하단 생각에 기획한 거고요. 이번 프로젝트도 비슷해요. 원래는 2월 긴자 스토어 오프닝 때 같이 진행해야 했죠. 하지만 1월은 가장 바쁜 시기잖아요. 어쩔 수 없었죠.

또 다른 계획이 있나 보죠? 5, 6년 전인가, 밀라노에서 에르메네질도 제냐 100주년 이벤트가 있었어요. 그게 이벤트의 시작이었죠. 호주에서도 비슷한 행사가 있었고요. 내년에, 글쎄요. 어떤 도시가 될지 몰라요. 그건 제냐가 결정하겠죠.

그럼 당신은 뭘 하고요? 그 도시의 문화와 제냐를 연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려요.

이번 다큐멘터리 사진 시리즈도 당신 생각인가요? 사진이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머진 잘 몰랐어요.

그럼 이 많은 일본인은 어디서 데려왔죠? 사진전 전체 큐레이팅을 맡은 오랜 친구이자 <퍼플 매거진>의 올리비에 잠이 도쿄를 아주 잘 알아요. 그가 제안했죠. 긴 리스트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는 사람들을 선택했어요. 배우, 음악가, 요리사, 건축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양하죠?

주변에 유명한 사진가 친구도 참 많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사진이 있나요? 마음이 간다…. 난 전시를 하나로 봐요. 낱장의 사진이 아니라요. 광고 캠페인 때도 그래요. 결국 좋은 사진을 만드는 게 아니라, 한 가지 프로젝트를 위한 좋은 낱장의 사진을 모으는 거죠. 이번 사진엔 풍경도 있고, 옷도 있어요.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옷이 있는 사진일 거예요. 내 옷이잖아요. 남자들에게 잘 어울리지 않나요? 나무 사진도 환상적이긴 하지만, 나한테는 그냥 나무일 뿐이죠.

여긴 아시아에서도 고급 브랜드의 상점이 가장 많은 거리예요. 이미 상해에도 가봤고요. 당신에게 아시아는 어떤가요? 어렵네요. 아이디어나 답이 없어서는 아녜요. 안타깝게도 아시아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어요. 내 마음대로 아시아를 말하기엔 섣부른 것 같네요.

그래도 캡슐 컬렉션을 위해 함께 작업한 일본의 장인에 대해선 말해줄 수 있잖아요. 장인은 이탈리아에도 넘치지 않나요? 장인 정신은 나라와는 관계없어요. 프랑스의 ‘아티장’도 같은 개념이죠. 생각해보니 당신 질문이 아시아에 집중된 것 같아요. 그냥 내 방식대로 얘기해도 될까요?

그럼요, 난 당신의 생각이 가장 궁금해요. 제냐는 테일러링 브랜드예요. 캡슐 컬렉션은 제냐의 테일러링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어요. 긴자 글로벌 스토어 오프닝을 위한 이벤트로 뭘 할까 고민하다, 이탈리아 테일러링을 떠올렸어요. 일본 테일러링도 상당한 수준이니까요. 누가 더 나은지가 아니라 너와 나 모두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강조했죠. 더 이상 제냐는 Made in Italy를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비틀스가 영국 밴드고 엘비스 프레슬리가 미국 가수라는 걸 누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번엔 Made in Japan에 집중했어요.

그러니까 일종의 협업인 거죠? 새로운 기술을 더해서 제냐의 다른 색을 만드는 방식이죠. 제냐가 현대적인 브랜드임을 강조하려는 거예요. 그렇다고 이슈를 만들어 엔터테인먼트 브랜드를 만들려는 건 아녜요. 그러려면 내가 레이디 가가와 콘서트를 해야겠죠. 하지만 캡슐 컬렉션이 제냐에게 펑크이긴 해요. 전례가 없는 시도니까요. 다행히 모두가 겸손했어요. 아까 말한 누가 너 낫다는 걸 내세우지 않았죠. 게다가 옷의 수준도 상당히 높아요.

제냐의 펑크에는 당신도 한몫하죠. 당신이 제냐에 온 이후로 전보다 훨씬 다양한 이메일을 제냐로부터 받아요. 제냐가 달라진 건가요, 당신이 변한 건가요, 아니면 세상이 바뀐 걸까요? 티가 나나요? 그거 좋은 신호네요. 우리의 계획이 잘 진행된다는 증거잖아요. 제냐는 철옹성 같았죠. 단단하고 진지하고 심각했어요. 그런 제냐가 저에게 손짓했을 땐 ‘패션’에 관심을 두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옷을 제외하면 제냐의 어떤 것에 관심이 있죠? 광고나 필름을 만드는 거요. 어떤 브랜드든 보여주는 작업은 늘 필요해요. 소셜 미디어 때문에 더 그렇게 됐죠. 소통이 가장 큰 목적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마케팅 전략이 되기도 해요. 사진전도 그래서 여는 거예요. 당신은 오늘 날 만나서 반가웠고, 나도 당신을 만난 게 좋지만 뭔가 부족하지 않나요? 잘 만든 옷을 보여주는 것과 이런 식의 대화도 좋지만 뭔가 더 필요해요.

아까 말한 그 이메일들 말이에요. 그걸 계속 읽다 보면 세 개의 단어가 반복돼요. 새로운 리더, 브로큰 수트, 유니폼. 우선 새로운 리더부터 얘기해보죠. 당신은 새로운 리더인가요? 리더 맞아요. 긴 시간 패션 디자이너로서 많은 사람을 이끌었으니 리더 맞죠.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내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50세에 ‘새로운’이라는 단어가 붙는 게 무엇보다 좋네요.

당신은 어떤 리더죠? 난 늘 달라요. 5년 후 난 또 어떻게 바뀔지 몰라요. 환경운동에 빠져 차를 안 탈지도 모르고, 건축이나 사진에 더 관심이 생겨 직업을 바꿀지도 모르죠. 실제로 여성복에서 남성복으로, 프랑스 패션 하우스에서 이탈리아 브랜드로 옮겼잖아요. 도전이나 변화가 두렵지 않아요. 패션을 엔터테인먼트라고 생각하지 않는 점에서도 새로운 리더라고 할 수 있겠네요. 길에서 마주치는 현란한 광고가 패션의 전부는 아니죠. 마케팅이나 홍보로 사람들을 현혹시킬 순 없다는 거예요. 소비자의 성격이나 기능에 접근하는 게 먼저죠. 그게 제냐의 새로운 리더가 할 일이에요. 예를 들어 의사가 남색 수트에 버건디 타이를 갖출 필요는 없어요. 그의 고객은 그의 옷이 아니라 의술을 믿는 거니까요. 물론 나도 사람을 볼 때 유별나게 따지는 편이에요. 패션에 관심이 많으니까 그럴 수밖에요. 만약 의사가 나처럼 입었으면 ‘의사가 초콜릿을 줄이라고 했는데, 그놈의 요상한 신발을 보니 더 먹어도 되겠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럼 당신 주변엔 멋진 친구들만 있겠네요? 구글 사진 속 친구들 말고 변호사, 의사, 연구원 친구도 있어요. 그들은 딱히 패셔너블하지는 않죠. 그렇지만 우린 친구예요. 하는 일과 취향이 전혀 달라도 하루 종일 대화할 수 있는 사이. 그러고 보니 나와 내 친구들 모두 리더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오픈 마인드’를 가졌잖아요.

박찬욱 감독은 브로큰 수트를 보고 “어두운 옷장에서 수트 두 벌의 위아래를 잘못 꺼내 입은 것 같다”고 했어요. 브로큰 수트는 어떻게 입어야 할까요? 브로큰 수트가 어렵다고요? 왜요? 뭐가요?

일반 남자들은 수트와 타이와 셔츠의 조합만으로도 옷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요. 재킷과 팬츠의 조합까지 생각해야 한다면 수면 시간을 줄여야 할 거예요. 당신처럼 물미역과 다시마도 완벽하게 조합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런가요? 시간이 많다면 당신과 그들을 초대해서 직접 가르쳐줄 수도 있는데, 아쉽네요. 그럼 쉽게 예를 보여줄게요. 이건 그냥 회색 수트라고 생각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미묘하게 달라요. 그렇죠? 이 수트에 분홍 혹은 줄무늬가 필요하다 생각하면 그냥 그렇게 입으면 돼요. 이 팬츠와 저 재킷을 입으면 그게 브로큰 수트죠. 모든 남자는 전통적인 수트를 좋아해요. 아침마다 이 양말, 저 타이를 시도하는 나랑은 다르죠. 브로큰 수트는 여기서 시작했어요. 유니폼 같은 수트는 차고 넘치는 리더가 수트를 즐길 수 있게 하는 거요. 제냐를 입는 리더라면 돈이 많을 거예요. 이미 가진 수트도 많겠죠. 솔직히 마케팅 전략으로 보면 브로큰 수트를 입으려고 두 벌의 수트를 구입하게 하는 거죠.

유니폼은 어때요? 필라티가 생각하는 필라티의 유니폼은 뭔가요?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돼요. 난 다 입어요. 입고 싶으면 무조건 입거든요. 실제로 더 나이가 들면 유니폼처럼 한 가지를 정해서 입겠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침에 옷장 앞에서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여행갈 때 뭘 가져갈지 걱정 안 해도 되겠다 했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난 매일 바뀌어요. 회색이 좋은데, 레드도 좋아요. 운동화, 클래식, 체크 스커트, 찢어진 티셔츠, 퍼. 다 좋아요. 난 정해진 툴이 없어요. 당신이 보기에 내게 유니폼이 있나요?

몽크 스트랩, 회색, 스카프, 수염과 타투. 내가 생각하는 당신의 유니폼이에요. 지금도 이 가운데 몽크 스트랩만 빠졌잖아요. 정말 그렇네요. 근데 유니폼이라기보단 내 스타일 중 일부 아닐까요. 어쩌면 당신이 맞을지도 몰라요. 나를 표현하는 것들이죠. 그럼 이런 요소가 나를 패션 디자이너로 표현한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나요?

물론 당신이죠. 사람들은 당신이 만든 옷만큼이나 당신이 피날레에서 뭘 입었는지, 오간자 팬츠에 신은 운동화가 뭔지, 심지어 얼굴은 왜 늘 빨간 건지 궁금해한다고요. 그래요? 일단 몸에 딱 붙는 옷은 별로요. 수트에 운동화를 신은 지는 오래됐죠. 내가 유행시켰다고 할 순 없지만, 내가 언제나 패션에 노출돼 있었던 건 맞아요. 프라다, 보그, 아르마니…. 모두 패션의 왕국이니까요. 그래서 내 옷이 눈에 띄기 쉬웠을 거고, 공유되고 영향을 미쳤겠죠. 수염도 좋아해요. 26세 때부터 만들었으니까 24년 됐네요. 타투도 싫었으면 안 했을 거고요. 20대 초반부터는 작은 스카프나 반다나를 항상 했어요. 특히 지금 이 스카프를 좋아해요.

수염과 스카프를 어떻게 동시에 할 수 있죠? 당신이 시도하기 전엔 엄두도 못 냈던 일이에요.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이긴 한데….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사실이긴 하죠. 수염도 그래요. 부모님도 안 좋아하셨어요. 그건 왜 기르냐고 맨날 물으셨죠. 지금은 ‘모두가’ 수염을 기르지만 난 ‘누구도’ 수염을 기르지 않았을 때부터 수염을 길렀어요. 스카프도 마찬가지죠. 내 스카프를 좋아했던 누군가가 집에서 몰래 해봤겠죠. 이런 식으로 유행이 된 거 아닐까요.

스카프는 어떻게 그렇게 얄밉게 매죠? 어떨 땐 너무 예뻐서 당신 매듭을 크게 확대해 따라 해본 적도 있어요. 내가 스카프를 매면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해보게 됐죠. 하지만 단 한 번도 ‘오늘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스카프 매는 방법을 보여주겠어’라는 생각으로 뭘 한 적은 없어요.

전 오늘 저녁 행사를 위해 당신이 7년 전에 만든 화이트 실크 수트를 입을 거예요. 사실 당신의 여성복이 그립거든요.(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용히 앉아만 있던 브랜드 담당자가 질문을 막았다. 오늘은 제냐와 관련된 얘기만 해달라는 의미였다. 당황한 에디터를 위해 필라티가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당신이 뭘 궁금해하는지 너무 잘 알아요. 하지만 오늘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남자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게 좋겠네요.

 

    에디터
    박나나
    이미지
    Ermenegildo Zeg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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