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투수놀음인가?

1982년 프로 원년부터 지금까지, 한국프로야구에서 투수의 가치는 고평가되고 있다.

Sports판형

지난 2010년 여름, 한 매체에서 조범현 당시 KIA 감독에게 “류현진과 이대호 중 하나만 영입할 수 있다면 누굴 택하겠느냐?”고 물었다. 그 해 류현진은 23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는 대활약을 했고, 이대호는 9경기 연속 홈런을 때려내며 치열한 MVP 경쟁을 펼치는 중이었다. 조 감독의 선택은 류현진이었다. “마운드가 두꺼워야 한다”는 게 선택의 이유였다. 선동열 당시 삼성 감독의 선택도 마찬가지. 선 감독은 “나라면 클린업트리오를 다 준다고 해도 류현진”이라며 류현진의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해 이대호의 대체선수 대비 기여 승수(WAR)는 8.2승, 류현진은 6.7승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WAR은 선수의 활약을 팀 승리와 연관시켜 보여주는 지표다. 지표상으로는 이대호의 타격이 류현진의 투구보다 1.5승 정도를 팀에 추가로 가져다준 셈이다. 하지만 현장 감독들의 선택은 대부분 이대호가 아닌 류현진이었다. 성적을 내려면 야수인 이대호보다는 투수 류현진이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2010년, 이대호는 류현진을 누르고 MVP를 차지했다. 투표인단이 야구를 보는 시각이 감독과는 다른 것일까? 꼭 그렇지도 않다. 2004년 MVP는 17승 2패 평균자책 2.61을 기록한 삼성의 투수 배영수였다. 하지만 배영수의 WAR은 4.8승으로 SK 박경완(8.1승), 현대 브룸바(8.0승) 등 야수들은 물론 투수인 두산 박명환(6.4승), KIA 리오스(5.2승)보다도 떨어졌다.

이런 현상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2005년에는 데이비스(5.8승)와 서튼(5.7승)을 제치고 롯데 손민한(4.6승)이 MVP로 뽑혔다. 2007년에는 김동주(7.2승)와 이대호(6.7승)가 아닌 두산 리오스(6.2승)가 MVP를 수상했다. 2008년에도 김현수(6.5승)와 김태균(6.0승) 대신 SK 김광현(4.1승)이 시상대에 올랐다. 2011년에는 삼성을 우승으로 이끈 최형우(7.1승)와 롯데 이대호(6.6승)가 KIA 윤석민(5.6승)에 밀려 수상에 실패했다. 즉, 사실상 2010년 이대호의 MVP 수상은 타격 7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성과에 상대적으로 월등한 팀 성적(롯데 4위, 한화 8위)이 만들어낸 예외에 가깝다.

MVP는 말 그대로 가장 가치 있는 선수에게 주는 상이다. 가치 평가는 객관적 지표에 투표인단의 주관적 판단을 더해 산출한다. 그런데 그간 야수와 투수가 MVP를 두고 경합할 때 승리는 거의 언제나 투수 쪽에 돌아갔다. 한국 야구 전반에 투수의 가치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라는 이야기다. 오늘도 어김없이 중계방송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역시 야구는 투수놀음입니다.” 그러면 해설자가 맞장구를 치며 말한다. “맞습니다. 방망이는 믿을 게 못 되거든요.”

과연 이 말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유효할까? 네이버 팟캐스트 <MLBNATION>을 진행하는 박성용은 “수비가 챔피언십에서 승리한다는 식의 표현은 있지만, 투수의 가치를 야수보다 우위에 놓는 식의 개념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MVP는 대개 야수에게 돌아갔다. 1982년부터 2014년까지 33년 동안 66명의 MVP 중 투수는 총 5명에 불과했다.같은 기간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12명의 투수가 MVP를 받았다. 단지 미국에는 투수를 위한 사이영상이 있고, 한국에는 그런 상이 없기 때문일까? <ESPN>이 운영하는 블로그 ‘그랜트랜드’가 2014년 발표한 ‘트레이드 가치 랭킹 50위’에서 야수는 37명, 투수는 13명이 선정됐다. 상위 10명 중에도 8명이 야수. 물론 미국 야구에서도 투수는 중요하다. 하지만 야구 자체가 투수놀음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미국 야구는 공격 지향적이다. 미국에서 야구가 처음 생겼을 때, 투수의 역할은 타자가 치기 좋게 공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야구는 투수와 타자의 맞대결이 아닌 양 팀 타자들끼리 벌이는 득점 대결에 가까웠다. 이후 유료 관중을 받으면서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해 스트라이크와 볼을 만들고 스트라이크존이 생기며 투수가 지금 같은 비중을 갖게 된 것이다. 관중 증가와 함께 야구는 산업이자 엔터테인먼트로 진화했다. 많은 팬을 사로잡으려면 경기가 재미있어야 한다. 자연히 구단은 적극적으로 점수를 내는 공격적 태도를 선호한다. 야구장을 찾는 팬들도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를 보고 사인을 받기를 원한다. 투수는 4~5일에 한 번 등장하지만 야수는 매일 경기에 모습을 드러낸다.

반면 한국 프로야구는 출발지점이 다르다. 정부의 기획 아래 기업의 사회 공헌 혹은 홍보를 목적으로 팀이 탄생했다. 구단 운영비는 관중 수입이 아닌 모기업의 지원에서 나온다. 극단적으로 가정하면 일 년 내내 관중이 한 명도 들지 않아도 구단이 망하진 않는다. 대신 팀이 참패하거나 하위권으로 추락하면 기업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된다. 승패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감독들은 불확실한 요소를 최소화하는 보수적 경기 운영을 선호한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강공 대신 희생 번트로 확실한 1점을 얻는 쪽을 택하는 식이다. 그러니 점수를 내는 것보다 상대에게 점수를 덜 주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히 타자보다 투수를 중심에 놓고 시즌을 구상하게 된다.

또한 미국 야구는 장거리 마라톤이다. 처음부터 긴 페넌트레이스를 중심으로 리그를 발전시켜왔다. 포스트시즌은 나중에 상업적 필요에 의해 추가한 제도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전력질주하는 식으로는 162경기를 무사히 치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100년 넘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금 같은 투수 분업화를 이뤘다. 한국 야구는 정반대다. 프로야구는 토너먼트와 소규모 리그전이 전부인 실업과 아마추어 야구를 모태로 시작됐다. 토너먼트에선 1패가 곧 탈락을 의미한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는 시즌 경기 수도 80경기에 불과했다. 결국 아마추어 시절의 방식이 그대로 동원됐다. 어제 나온 투수가 오늘 또 던지고, 더블헤더 1차전 선발투수가 2차전에 나와서 다시 던졌다. 일반적으로는 야수의 기여승수(WAR)가 투수보다 높다. 야수는 거의 매일 경기에 출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수가 적은 단기전에서는 투수의 기여승수가 야수보다 높은 경우가 많다. 투수가 경기에 연달아 등판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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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초기 프로야구에서는 리그 에이스들의 WAR이 강타자들의 WAR을 상회하곤 했다. 1982년 전체 1위는 4할 타율의 백인천(5.3승)이 아닌 삼성의 투수 황규봉(6.0승)이었다. 백인천은 80경기 중 72경기, 황규봉은 47경기에 나섰다. 1984년에도 WAR 1위는 타격 3관왕 이만수(6.9승)가 아닌 최동원(7.1승)의 차지였다. 이만수는 시즌 100경기 중 89경기, 최동원은 51경기에 출전했다. 명백한 혹사였지만, 당시에는 그걸 당연한 일로 여겼다. 프로 초창기 박철순, 장명부, 최동원, 선동열 등 압도적인 에이스들이 거의 매일 등판해 팀 승리를 책임지던 모습은 야구 관계자들과 팬들의 기억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고정관념이 한국 야구에 깊이 뿌리를 내린 배경이다.

그런데 프로 초창기와 달리 선발 로테이션과 불펜 분업화가 자리 잡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한국 야구에서 투수의 가치는 상종가다. 타자들의 기량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데, 쓸 만한 투수가 드물다는 이유다. 마무리투수는 물론 중간계투 요원도 어렵지 않게 억대 연봉을 받는다. 메이저리그가 투수와는 어지간해서 거액의 장기 계약을 맺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2010년, 류현진과 이대호를 비교했을 때 한국 프로야구 감독들은 압도적으로 투수 류현진의 손을 들었다. 그러나 지난해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해외 진출을 선언한 국내 최고 투수들 대신 최고 타자(강정호)를 선택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한국 프로야구의 패러다임 역시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9월 15일 현재 리그 1~4위는 희생 번트가 가장 적은 4개팀이 모두 차지하고 있다. 경기 수가 144경기로 늘면서 투수를 단기전 방식으로 운용하던 옛날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후반기 김성근식 야구의 몰락은 상징적인 현상이다. 신생팀 kt 위즈는 투수 유망주 박세웅을 내주고 공격형 포수 장성우를, 외국인 투수 어윈 대신 거포 외인타자 블랙을 영입한 뒤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있다. 신생팀은 투수력이 우선이라는 관념을 뒤집고 공격력을 강화했다. kt의 사령탑은 불과 5년 전만 해도 “이대호보다는 류현진”이라며 투수력을 강조했던 조범현 감독이다. ‘투수놀음’은 더 이상 한국 야구를 정의하는 데 딱 들어맞는 키워드가 아니다. 야구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만큼, 야구의 색깔도 변화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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