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 코트 깃을 올리고 휘파람 부니

EL LOGO사진은 찰나를 응고시킵니다. 어쩌면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단 하나의 권능 같습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포트레이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갖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영원성이 어떤 통로 로 발현되는지를.

브레송이 찍은 자코메티의 어떤 사진은 너무 기묘하고 미묘해 서 자꾸 뒤돌아보게 됩니다. 직선의 살이 되어 꽂히는 빗속에서 대 동맥처럼 굵게 솟은 나무는, 카페에서 나오자마자 스탠드칼라 코트 를 머리에 뒤집어쓴 자코메티의 웅숭그린 고독을 침중하게 응시합 니다. 그때, 도무지 알아채기 힘든 재능, 정적인 역동성, 강렬한 비애 로 자욱한 예술가의 인생을 묵묵히 증언하는 것은 얼핏 초췌해 보 이는 코트입니다.

겨울엔 어느 계절보다 무리한 지출을 하게 마련입니다. 정말이 지 각오해야 합니다. 그 겨울, 코트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오랑캐 무 찌르듯 신용카드를 내밀던 나도 그랬습니다. 가마니만큼 두툼한 울 소재에 재단이 얌전한 그 코트는 거의 바닥에 끌리도록 길었습니 다. 나로선 굉장한 투자였으나, 그건 빚이 아니라 빛이었습니다. 그 코트와 같이 입을 아이템들 – 터틀넥 스웨터, 앵클부츠, 데님 셔츠, 천이 부슬부슬한 짧은 재킷 – 을 그려보는 머릿속은 극단적인 순수 로 발열했습니다. 근데, 밖에 나갈 날만 기다리던 코트는 겨울 내내 옷장 뒤편에서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날씨가 의뭉스럽도록 푸근하 고 잔인하도록 태연해서….

패션의 냉혹한 현실 중 하나는 디자이너들이 무대에서 보여주 고 싶어 하는 아이템이 저 밖에서도 성공하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디자이너에게 코트는 극적이고 낭만적이며 고급한 아이템이지만, 집이든 사무실이든 온도가 사철 쾌적하게 유지되고, 웬만해선 땅 한번 안 디디고 살 수 있는 마리 앙투와네트들의 세상에선 한 짐 이나 되는 옷을 몸에 걸치는 것 자체가 미쳐 죽을 노릇입니다. 어떤 때 코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비실용적이고 비현실적인 데 다 처치곤란인 식은 우정 같습니다. 그러나 아닌 척해도 남자들은 자기를 감싸주는 아이템을 좋아합니다. 한 꺼풀 들추면 물고 빨며 종일 달고 다니는 아이들의 담요 사랑과 참 비슷합니다.

실밥 하나 비어져 나온 데 없이 얼음처럼 잘린 형태, 섬세하고 정교한 깃, 부드럽고 품위 있는 천, 안감이 펼쳐 보이는 뜻밖의 드라 마, 테일러드 재킷처럼 조이지 않으면서 관대하게 남겨둔 품을 보면 추운 게 너무 싫은 간디라도 아, 이건 어쩔 수 없어, 사고 싶어 죽겠 어…, 한탄 같은 한숨을 쉬며 맥없이 물레를 돌릴 것입니다.

코트는 모든 시즌의 룩을 대표합니다. 헬무트 랭이 코트에 썼 던 패딩 팔꿈치가 스웨터에 다시 차용된 걸 보면 단박에 알 수 있 습니다. 확실히 요즘 코트 컬렉션은 전통이라는 퍼즐을 소중하고 신중하게 바꿔 끼우며 코트의 다른 세계를 창작합니다.

코트가 유일한 겨울 외투는 아닙니다. 엄마가 떠준 털실 머플 러, 캐시미어 니트, 말가죽 재킷, 엄청 가벼운 패딩, (있다고 해도 잘 안 하게 되는) 스카프나 판초조차 전통적인 코트의 이질적 대안이 됩니다. 뭐가 됐든 옛날엔 춥기만 하면 코트를 꺼냈습니다. 한 벌로 한 오백 년쯤 우습게 버텼습니다. 변덕스러워진 지금은, 낮엔 퍼널 넥 울 코트를, 밤엔 소가죽 코트를 입습니다. 엷은 낙타색은 누구나 좋아하지만, 검정색은 언제 입어도 문제없지만, 남색, 자주색, 초콜 릿색, 녹색 코트도 꽤나 좋아들 합니다. 난리법석의 시대에 태어나 세대와 상관없이 유행한 초월성, 역사가 기른 특별한 물성, 고상함 에 곁들여진 도전적 존재감, 불멸의 사조와 신세기의 혁신으로 무 장한 코트라 해도 넘치는 물자 앞에선 살짝 김이 샌 기분도 듭니다.

종류가 많아도 코트의 기능은 같습니다. 안에 입은 옷을 정돈하 고 전체적인 룩을 마무리 짓는 거죠. 그런 역할 말고도 코트엔 진정 패션의 영역을 벗어난 세계가 존재합니다. 이상하게 키가 커진 것 같고, 기미도 없었던 품위가 착시처럼 엿보이고, 싹이 노랬던 정중 함이 얼핏 비치는 건 그 때문입니다. 코트는 지금도, 100년 뒤에도, 운석이 떨어져 지구가 망한 뒤에도 퇴색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야만 합니다. 겨울이 다시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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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편집장] 2001년부터 GQ KOREA 편집장을 맡고 있음. 잡지를 통해 문화와 스타일을 다루어온 그 시간 동안, 정작 자신이 얼마나 세속적인지 허무하게 깨닫게 됨. 그래도 잡지 만드는 일을 너무 좋아해서 해보지 않은 ‘여타의 것’들에 대한 어떤 아쉬움도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