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맞고 영화는 틀리다

영화 연기를 이야기할 때 쉽게 ‘메소드’ 연기를 떠올린다. 이 연기 기법을 처음 고안해낸 러시아의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는 몰라도, 메소드 연기가 자연스러움을 향한다는 건 알고 있다. 새삼 자연스러운 연기란 무엇인가? 지금 한국영화에 자연스러운 연기는 존재하나?


Film판형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봤다. 홍상수 감독이 방향을 조금 틀었을까? 그의 영화는 계절을 따른다. 크게는 여름과 겨울. 이번엔 겨울 영화인데, 대체로 여름에 비해 겨울 영화에서는 남자들이 덜 ‘귀엽다’. 뭐든 좀 더 원한다. 한데 이번 영화에서 (제대로 말을 하는) 유일한 남자, 함춘수(정재영)는 어쩐지 귀엽다. 지금까지 홍상수의 겨울 영화에 나온 남자 주인공 중에서 제일이다. 1부와 2부, 미묘하게 다른 윤희정(김민희)과의 호흡은 그 자체로 ‘사실’이 된다. 함춘수의 대사를 빌리자면 “말이 된다”.

(누군가에겐 빤한 이야기지만, 여전히 새롭기 때문에 이야기하자면) 홍상수의 영화는 일상을 도려내 적나라한 살점을 우리 앞에 놓아 둔다. 그 덩어리는 우리의 살색, 살결, 심지어는 모공과 비슷하다. 영화의 1부 끝에서 주영실이 함춘수에게 준 시집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의 삶의 표면에 숨겨진 것들의 발견만이 우리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이라는 생각에 저도 공감합니다.”(이 말이 홍상수 영화를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린 우리를 가까이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상을 미화한다. 발견은 두렵다. 홍상수가 만든 세계엔 미화가 없다. 미화되지 않은 발견, 그건 곧 지금(현재)이다. ‘지금이 맞기’ 위해선 솔직함이 필요하다.

영화의 솔직한 표현은 결국 배우로부터 시작된다. 홍상수 감독은 촬영하는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준다. 이선균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찍을 때 “아침마다 대사 외우기 바쁘다”고 했다. 홍상수 감독이 어떤 의도로 그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추측할 수는 있다. 배우가 시나리오를 생경하게 접할 때 배우는 영화 안에서 배우 자신으로만 살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캐릭터를 연기하니 의지할 곳은 결국 자신뿐 아닐까? 당연히 배우의 ‘연기 변신’이라는 말은 홍상수 영화에선 무색하다. 하필 떠오르는 말이 있다. “배우는 오직 그 자신에게서부터 넓혀 가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배우가 타인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홍상수는 배우라는 한 ‘개인’을 있는 그대로 수집해 충돌을 만든다. 그 마찰을 지켜보는 건 관객의 몫. 개인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서 뽀뽀하고, 자는 과정을 우리는 관찰한다. 영화를 보는 건 스크린에만 있는 세계를 목격하는 과정. 관객의 시공간과 영화의 시공간이 어두운 좌석과 밝은 스크린에 맞물려 영원해지는 체험.

그 경험이 홍상수의 영화처럼 일상적인 배경에서만 가능한 건 아니다. 어떤 주제라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SF. <그래비티>는 ‘사실’적인 경험을 추구했고, 기술의 발전과 알폰소 쿠아론의 뛰어난 연출로 관객은 우주 미아(때때론 가까운 관찰자)가 됐다. 이 영화를 만드는 전제 조건은 컴퓨터 그래픽의 기술력이겠지만 필요 충분 조건은 결국 배우의 연기다. 산드라 블록과 조지 클루니가 우주 공간이라는 배경을 믿지 않으면, 관객의 관찰은 영화가 아니라 배우의 얼굴에만 머물게 된다. (물론 배우의 얼굴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은다.) 배우가 스크린에서 연기가 아니라 진짜 삶을 살아갈 때 관객은 영화가 ‘영화’라는 사실조차 잊는다. 우리가 갑작스럽게 큰 사고를 당하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오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두한다. 누군가에게 지금 이 순간을 멋지게, 확실한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인생을 사는 진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스스로에 대한 방어 체계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지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더욱 사실적이고 호소력을 지니기 마련 입니다.” 몇 번을 인용해도 지겹지 않은 마이클 케인의 말. 그는 차라리 다큐멘터리를 모방하라고 배우에게 조언한다.

그렇다면 배우가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건 전부 배우의 몫일까?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 그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을까? 캐릭터를 처음 만드는 건 시나리오 작가, 감독이다. 캐릭터는 어떤 배경이나 설정을 바탕으로 한다. 현실을 반영하든, 허무맹랑한 일이든, 그건 상상력이란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아 마땅하다. 한편 그 속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가? 사람은 감정의 동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과정은 순식간의 결정이거나 이미 결정되어 있는 일이 아니다. 마이클 케인의 말처럼 슬퍼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사람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린 모두 순간순간 수많은 생각을 한다. 그 탓에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마저 (미치도록) 어렵다.

최근 한국영화의 캐릭터는, 캐릭터가 처한 갈등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아주 명쾌하다. <배테랑>의 서도철(황정민)은 정의롭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며 비리 형사를 제압할 때 쾌감이 치솟는다. 서도철의 아내(진경)가 “나 쪽팔리게 하지 말라고 했지?”라며 서도철을 찾아올 땐 또 어떤가? 끝내준다. 반대로 조태오(유아인)는 증오의 대상이다. 나쁜 짓을 할 때 가차없다. 그의 지나친 욕망은 복잡하지 않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다. 절대 다수는 그가 좇는 쾌락을 용납할 수 없고, 동의할 수도 없다. (심지어 하나같이 범법 행위다.) 유아인은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조태오를 잘 표현했다. 악랄하고, 지독하고, 고민하지 않는 눈빛. 연달아 폭발하는 악마를 유아인에게서 보았다. 그건 또 다른 쾌감. 조태오를 미워하는 감정이 쉽게 모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함께 그를 미워하고 서도철이 끝내 조태오를 잡았다는 환호가 스크린 앞을 채운다.

한데 영화는 계속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당연히 서도철 편이다. (말해 뭐 할까?) <암살>을 보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응당 하와이 피스톨(하정우)과 안옥윤(전지현)과 김구 선생 편이다. 말하자면 이 두 영화는 싫어할 수 없다. 영화를 싫어하는 건 웬일인지 정의를 저버리고, 친일 청산을 반대하는 것 같다. <배테랑>, <암살> 모두 촬영, 편집, 액션 전반의 만듦새가 뛰어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아주 간결한 메시지만 남는다.

배우는 맞고

하필 최동훈 감독과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3년 전, <도둑들>의 홍보가 막 시작될 때였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바로 전 작품, <전우치>를 다시 봤다. 너무 재미있어서 두 번 봤다. 신마다, 숏마다 고민이 느껴졌다. 굳이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새로움’. 특히 전우치(강동원)와 화담(김윤석)의 캐릭터가 신선하고 입체적이었다.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들처럼 캐릭터가 희생으로 향하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고 그에게 말했다. 최동훈 감독이 이렇게 답했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엔 스타(배우)에게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 하지 않는다. 할리우드가 코믹스를 소재로 사용하는 이유는 기존 히어로의 캐릭터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중략) 반면 한국영화는 아직도 캐릭터에 대한 고민을 한다.”

웬일인지 한국영화의 캐릭터는 어느새 코믹스만큼 평면적이다. 코믹스의 악은 대체로 힘과 권력을 내세운 전체주의자, 즉 나치를 연상하게 하지만, 한국영화는 실제로 존재하는 진짜 적을 상정하고 있다. 올해 압도적인 흥행을 한 세 편의 영화는 나쁜 재벌 2세(<배테랑>), 제국주의 일본과 친일(<암살>), 북한(<연평해전>)을 반대편에 두었다. 그래서 착한 편은 확실히 착했고, 나쁜 편은 의심 없이 나빴다. 배우들의 연기는 실제 한국으로 맞닿으며 폭발했다. 터진 배우의 감정들은 ‘진짜로’ 우리를 위로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2부. 함춘수는 1부와 달리 윤희정에게 솔직하다. 윤희정의 그림을 보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를 위로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는 거 같아요. 자기 연민 같은 느낌. 그게 나쁜 건 아니죠. 자기 마음을 먼저 추슬러야 할 때도 있으니까. 퀄리티는 있어요. 진짜로. 퀄리티는 있는데, 조금 상투적인 게 너무 많이 들어가 있는 거 같아요. 상투적인 게 편하잖아요. 위로는 상투적인 걸로 받아야 하니까.” 한국영화는 관객을 위로했다. 배우의 연기는 스크린을 넘어 관객을 보듬었다. 착한 편은 착한 편대로, 악한 편은 악한 편대로, 지지와 비난의 대상으로 ‘역할극’을 했다. 덕분에 배우는 영웅이 되었다. 한데 아주 사소하게 배우가 개인으로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연기는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그 발견이 스크린에 있을 때 관객은 ‘스크린에만’ 있는 세계를 목격할 수 있다. 관객의 시공간과 영화의 시공간이 맞물려 영원해지는 체험이 ‘영화 관람’이라고 믿 는 건, 추스르며 살기도 바쁜 세상에선 과연 필요 없는 걸까? 영화가 배우를 통해 묻는다. 너는 우리 편이냐? 정해진 답에 함춘수가 답한다. “예민하고 용감해져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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