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소년을 착각 해줘 – 시인 황인찬

2015.10.30장우철

황인찬 시인이 두 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를 내놓았다. 파고 파서 깊어지려는 대신 얼른 도망갈 궁리나 하는 88년생. 첫 시집을 내기도 전에 김수영문학상을 탄 ‘젊은 시인’이라는 레테르. 십 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애로 스스로를 테두리 짓는 맹랑한 끼. 읽으면 이내 읽히는 시. 어떤 현대성. 이상한 멋부림. 여러 종류의 착각. 황인찬은 인터뷰 내내 혼자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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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마시면서 할까요? 설중매도 있고. 네, 편맥처럼.

편맥? 그게 뭐예요? 편맥 모르세요? 편의점 맥주요.

난 또 뭐라고. 그 말이 그렇게 좋으면 시집에도 쓰지 그랬어요? 하하, 그건….

질문을 이렇게 해볼까 봐요. 황인찬 시인은 시어와 시어가 아닌 것을 어찌 구분하나요? 기준은 없는데 너무 컨템포러리한 말은 안 돼요. ‘템포러리’잖아요. 일시적인 거잖아요. 조금 지나면 흉해져요.

그걸 판단하는 건 어떤 감인가요? 감이죠.

어떤 시집을 펼쳤는데 “의미 없는 시간이 흐르고” 이런 말이 있었어요. 즉각 시어가 아니라고 느꼈는데, 배치 문제도 아니라고 봤어요. 요즘 경향이라면 경향일 수는 있겠죠. 견주어 말하자면, 그 지점에서 가장 영민하게 쓰는 게 황인찬 같아요. 읽다 보면 그래서, 얄밉죠. 하하하, 너무 웃기다.

읽으면서, 알고 쓰는 건지, 모르고 쓰는 건지 혼선이 오는데, 전략이라면 훌륭하죠. 상대가 의중을 모르게 만드니까요. 이게 뭐야? 할 사람이 늘 거라 생각했어요. 이번 시집은 언어의 결을 의식적으로 다르게 했어요. 요만큼씩 옆으로 밀어내는 식으로.

요만큼이 얼마만큼인지 안다는 거잖아요. 얄밉게. (웃음) 요만큼씩 가야지, 하면 잘 모르지만, (팔을 벌리며) 이만큼 가진 말아야지 하면, 요만큼씩 갈 수 있어요. 어차피 숫자를 딱딱 맞추는 게임이 아니잖아요. 공통적인 감각이 있잖아요. 저는 항상 공통적인 감각을 의식하는 거거든요.

공통이라면, 황인찬의 시집을 읽는 이들이, 나도 시를 쓰고 싶다, 생각하는 공통도 있지요. 그런 상황까지 짐작하나요? 얄밉게? (웃음) 이 시집이 밉상일까? 그런 생각은 했어요. 까부나 약간? 사실은 짜증이 많이 섞여 있죠. 노골적인 말도 많고요. 뭔가 액션도 늘었어요. 시 자체가 하는 액션요. 그러다 보니 이게 얄밉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그래서 좋은 것 같기도 해요.

두 번째 시집이죠. 제목은 <희지의 세계>고요. 읽으며 질문을 만드는데 하필 이 시집과 안 어울리는 일이구나 했어요. 이를테면 인찬 씨는 질문을 받고 싶나요? 질문이 들어오면 기꺼이 답을 하긴 하는데, 어쨌든 답을 해버리면 대답이 한 종류가 되잖아요. 항상 그게 좀 켕겨요. 내가 이걸 말하는 순간,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어지는구나. 한편으론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했어요. 왜냐면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명확해지면 도망가기 좋으니까요.

얄미움 지수를 한층 높이는 발언이네요. (웃음) 첫 시집 내자마자 빨리 이걸 벗어나야지, 했어요. 더 만들고, 더 다듬을 수 있을 텐데, 그러면 고정될 것 같은 거예요. 끝날 거 같은 거예요. 끝이 아닌데도요. 미리 생각하고 미리 겁내고 미리 그만둔 게 되게 많거든요. 내가 저 길로 가면 어떤 식으로 되겠지? 시뮬레이션이 되죠. 항상 뭘 하든 그래요. 근데 생각은 그렇게 해도, 막상 다르잖아요. 다르다는 걸 아는 제가 건방진 거고 교만한 건데, 근데 또 어리니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별거 없는데? 하고 그냥 휙 지나가 버리는 거. 파면 팔수록 뭐가 나온다는 걸 깨달으면 그때부터 장인이 되잖아요. 성향상 저는 장인은 안 맞는 거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계속 미꾸라지가 되려는 게 아닌가. 지금도 어떻게 벗어나지? 이런 생각하고 있어요. 문제는 첫 번째 시집은 테두리가 비교적 명확했는데 두 번째는 스스로도 명확하지가 않다는 거예요.

읽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듣고 싶겠네요. 네. 저는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야 결정을 할 수가 있거든요. 시집 내고 나서 강의를 많이 하게 됐어요. 당대의 기준, 당대의 좋음이 무엇인지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해요. 이게 좋은 시야, 하는 모종의 기준, 어떤 합의. 물론 그 합은 엄청 많지만 범주화하는 건 나잖아요. 그럼 나를 다시 분지를 수가 있어요. 벗어나기가 용이해지죠.

대학원생이잖아요. 강의라면 누구에게 한다는 거죠? 시 습작하는 친구들요. 8주짜리 강의를 1년에 한두 번 하거든요. ‘안팎으로 시 쓰기’라는 강의를 어떻게 했냐면, 문학작품과 아예 문학이 아닌 거, 이를테면 영화나 미술이나 아니면 제 오타쿠 얘기 같은 것들을 나란히 놓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문학은 어떤 자리지? 시는? 그런 비교에서 시적인 것이 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거죠.

그 얘길 들으니 구분이 되네요. 말하자면 예전엔 시 아닌 것들을 어떻게 시로 끌어들일까를 놓고 복잡했잖아요. 안 멋있고, 안 예쁘면서. 네. 김경주 시인은 어디에나 시적인 게 있다고, 그것에 관심이 있다고 했잖아요. 시적인 것들을 다른 데서 끌어오는 거라고. 그분은 연극도 하고, 뭐도 하고, 그렇게 시적인 것들을 중심으로 추구하는데, 저는 그게 시랑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그건 시를 닮은 거지 시는 아니에요. 뭐든지 시가 될 수 있지만, 시를 닮은 건 시가 못 되죠. 그건 시가 아니라는 말이니까.

하필 ‘젊은 시’라는 말에는 시가 아닌 것들을 얼마나 발랄하게, 파격적으로 끌어들이는가 하는 지점이 꼭 들어 있었지요. 그 지점을 가벼이 맑게 넘겨버린 느낌이 황인찬에게 있고요. 제가 아까 컨템포리리한 언어를 쓰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바로 그거거든요. 지금 가장 동시대적인 것을 그냥 가져와 버리면 시간이 지나는 순간 바로 헌것, 촌스러운 것이 되죠. 최신 것을 다 끌어들이면 당연히 최신 무엇이 된다는 생각은 되게 순진하죠.

그럼 무엇을 선택한다는 걸까요? 한편으로는 시라는 게 갱신이 잘 안 돼요. 시의 보수성이기도 한데, 제가 짜증이 나는 이유도 항상 그런 거였거든요. 시가 너무 시라서. 시가 시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어서. 50년대 현대 미술 작품이랑 지금이랑 생각하면 하늘과 땅 차이잖아요. 근데 반세기 전 시와 지금의 시가 차이가 확확 나느냐, 변화가 있느냐, 없어요. 아무래도 언어가 가변성이 적은 매체인 거예요. 편맥이니 뭐니 하는 말은 조금 지나면 못 쓰는 말이에요. 가변성이 적으니 답답한 거구나. 그러면서 점점 시, 시적인 것, 좋은 시, 고전…. 여전히 아름답다 여기는 김종삼이나 김춘수나 혹은 그 이전의 것들을 계속 의식하게 돼요. 이번 시집 해설에 ‘대결’이라고 써 있는데, 사실 그건 대결로 끌어 올려준 거거든요.

시집 해설에 쓰인 ‘대결’이라면 황인찬이라는 시인과 한국문학사와의 대결 말이지요? 네. 뭐냐면 제가 계속 그것을(한국문학사를) 의식하면서도 막 떠받들진 않잖아요. 덩그러니 보여주면서 폭로한다, 그러므로 대결이다, 그런 관점인데, 저는 그게 대결 구도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왜냐면 얍! 하고 싸우면 적이 되는 거예요. 적이 되면 상대가 강한 게 돼요. 그래서 저는 적으로 삼고 싶진 않아요. 의식하는 정도로 내버려두고 싶죠. 어차피 자주 생각하는 것을 쓰게 되잖아요. 그건 첫 시집이나 두 번째 시집이나 똑같은 거 같아요. 생각하는 것들을 붙잡아서 쓰다 보니 점점 내 자신을 더 의식하게 되면서 밀려가는 게 아닌가, 스스로를 약간 밀어보내고 밀려나는 게 아닌가. 강의를 하는 게 도움이 돼요. 어차피 선생이 무슨 말을 해도 귀에 안 들어온다는 걸 알아요. 귓등에도 안 들어와요. 이 작품은 이렇게 어딜 고쳐야 된다는 말을 해도 그냥 어, 어, 하고 흘렸어요.

불량 학생에 국한된 얘기 같은데요? 아무리 의식해봤자 그대로 못하거든요. 듣는다고 고쳐지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어떤 기준을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좋은 시는 계속 바뀌는 거니까 당대의 기준만 제시해주면 되는 거예요

확신이 필요하겠네요. 저도 제 테두리가 언제나 확실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가끔 왔다 갔다 하는 작품을 볼 때가 있어요. 작가도 습작하는 친구도 아리송한 순간들이 와요. 근데 그런 순간이 왔다면 확장된 거예요. 그 테두리나 확신이라는 게 엄연하게 지켜야 되는 기준은 아닌 거죠. 저도 항상 어떤 평균치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래야 내가 튀어나갈 수 있잖아요. 특별해 보일 수 있고.

두 번째 시집은 전보다 어떻게든 튀어나간 걸까요? 근데 막상 섞어서 읽으면 크게 안 달라 보여요.(웃음) 시를 편편 발표하는 동안 절망했거든요. 동료들한테 “좀 바뀐 것 같아?” 그러면 “어, 잘 모르겠는데” 그러는 거예요.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다가 어느 정도 모이고 나니까, 편차가 되게 심해 보였어요.

‘휴가’라는 시가 있는 페이지를 넘길 때가 생각나네요.(웃음) 하하, 근데 저는 ‘휴가’를 아주 떨어진다고 생각하진 않고, 몇몇 구절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넣었거든요. 착각이었다는 말을 너무 쓰고 싶은 거예요. 그냥 느낌이었다. 착각인지 느낌인지 헷갈리는데 하여간 똑같은 맥락이었으니까. 그 말을 부러 노골적으로 너무 넣고 싶어서 넣은.

떨어진다기보다 노골적이라는 말이 맞겠죠. 그런 말이 이 시집에 있어요. 어떤 역할을 하냐면 읽히게 혹은 팔리게 만들죠. 제가 홍상수 영화에서 느낀 게 그거거든요. 왜 이렇게 따옴표를 잘 치지? 그는 모든 것에 다 따옴표를 치는 사람인 거예요. 따옴표를 치는 순간, 사실은 진심인데 내가 스스로 따옴표를 치고 있다는 티를 내면 어떤 의미에선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걸 나도 알아, 라는 효과를 내거든요. 홍상수 영화에서 진짜 구린 말을 할 때, 특히 삶에 대한, 예술에 대한 태도를 말할 때,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순간 어떤 민망함이 발생하는지, 그걸 따옴표 쳐버리면서 진심은 진심대로, 민망함은 민망함대로 그냥 다 커버치고 가는구나, 느꼈죠. 사실은 아예 영화를, 구조를 만드는 방식조차도 따옴표나 괄호 같은 걸 치면서 가잖아요. 따옴표라는 게 말하자면 저런 효과가 있구나, 새삼 생각했어요, 보면서.

이번 영화 봤어요? 그의 따옴표는 점점 사람을 웃게 만들고 있죠. 특히 여자들을. 그게 또 대단한 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번엔 아예 모두에게 복되게(웃음). 주변에 많은 끼순이들이 김민희 보면서, 저게 난데, 이러면서요. 그런데 어떤 걸 유보하는 태도가 너무 기막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확정 안 짓는 거. 근데 유보나 확장은 입을 닫거나 애매하게 만드는 건데, 지 할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거 다 저지른 다음에 유보해요. 그게 진짜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따옴표라는 게, 스스로 의식하면서 치는 순간 확실히 다른 개념을 갖는구나, 저런 노골성이 어떤 함정을 일시적으로 벗어나게 할 수도 있구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는 거구나 순간적으로는.

시로도 그렇게 가려고 했군요. 네. 노골적으로 안 가면, 지금까지 저의 성향상, 스타일상 관조하게 되는 거예요. 근데 관조하는 거는 그만둬야지 생각했어요. 왜냐면 너무 한심해서.

첫 시집 제목 <구관조 씻기기>에는 ‘관조’라는 말이 들어 있지요. 네. 첫 시집의 관조는 여러 의미에서 이제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차근차근 얘길 하면, 첫 번째로는 관조하는 걸로는 아무것도 안 바뀐다는 걸 깨달았어요. 두 번째로는 이게 제일 핵심인데, 사실 예전엔 아무것도 안 함으로써 뭔가를 얻어내는 게 시의 마술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뭐가 폭력인지 뭐가 폭력이 아닌지 딱 잘라 말하기가 너무너무 어려워요.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은 한참 전부터 나왔고요. 그런 의미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정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구나. 굳이 관조를 그만두고 싶은 건, 아무리 애를 써봤자 아무것도 안 한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어떤 무력감을 계속 느끼고, 그러니까 짜증이 나고, 시는 시대로 짜증을 내고, 짜증투성이가 되면서 아, 관조는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어요.

하필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관조가 황인찬의 시에서 유난히 돋보였던 건데요. 첫 시집을 평단이 좋아한 이유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을 거예요.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라는 거 아시잖아요. 그거 “I would prefer not to” 였나? 말하자면 적극적인 무위, 일종의 저항이고, 그런 맥락으로 제 시를 딱 누가 얘기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저도 써놓고 보니 그 맥락을 타는 거구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뭔가를 하기로 한 거군요. 대결 맞네요.(웃음).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는 게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거라고 하는데, 아닌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닌 것 같아요. 아무 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모두가 함께 아무것도 안 해야죠. 근데 그렇게는 안 되잖아요. 그럼 뭘 해야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지금 제가 갖고 있는 윤리적인 것에 대한 생각인 거예요.

시는 시잖아요. 네. 시가 뭘 할 수 있지? 어떻게 할 수 있지? 시가 시인 이상 절대로 불가능한 게 있죠. 눈 앞에 닥친 것에 대해 시는 항상 무력하거든요. 거기에 종속되거나 아니면 망가뜨리는 수밖에 없는데 어느 쪽도 별로 안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떤 것들을 창출해내려면 시는 언제나 거리를 갖춰야 되는 거예요. 그게 지금까지 시가 만들어온 아름다움의 기준인 거예요. 어느 순간 지면에서 발이 떨어지는 듯한 순간들, 이게 뭐야? 라고 하게 되는 그 순간이 시만의 어떤 고유한 순간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거리감을 확보해야 돼요. 시가 시인 이상은, 시는 시라서 짜증나죠. 답답하죠. 근데 시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거의 모든 예술 나부랭이들이 당장 닥친 일에 뭘 한다 하는 순간 완전히 구린 게 나오잖아요 사실.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눈 앞에 닥치면 약간 무력해져요. 맘 놓고 대상화한다거나 격차를 만들기 힘드니까.

그래서 <희지의 세계>는 이만큼 떨어져서도 솔직할 만큼 되었나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기만은 안 떨었으면 좋겠다, 그 정도가 이 두 번째 시집이 갖고 있는 비교적 솔직한 태도 중 하나인 것 같아요. (그때 스튜디오에 있던 검정색 닥스훈트 강아지가 그의 셔츠를 자꾸 물어뜯었다.) 너 진짜 너무 귀엽다. 야, 너 진짜 개 같아. 하하, 근데 옷을 물진 말아줄래? 나 옷이 몇 벌 없거든.

여전히 제목을 재미있게 보게 돼요. 이자혜의 만화 <미지의 세계>에서 온 책 제목부터 그렇죠. 진짜로 착각을 했어요. 제가 이자혜를 레진 코믹스에서 시작하기 전부터 좋아했는데, 너무 좋으니까 한번 갖다 써야지 이런 생각을 했는데, 메모를 잘못했는지 하여간 진짜로 착각을 해버린 거예요. 진짜 착각을 해서 <희지의 세계>라고 썼는데, 써놓고 보니까 내가 왜 착각했는지 알겠다 싶은 거예요. 책이 나오고 반응이 다 이랬어요. “희지가 누구야?” 그리고 “무슨 한자야?” 무슨 한자인지를 계속 물어봐요. “저도 몰라요” 이렇게 말하고 마는데, 저기에 무슨 한자가 들어가도 다 좋은 거예요. 첫 시집 때도 그랬어요. ‘입장’이나 ‘유독’이나 이런 시에서, 말이 가능한 다른 뜻을 다 끌어들이면서 썼거든요. 근데 희지는 끌어들일 폭이 되게 넓어요. 제 나름대로 어떤 방향성이 있긴 있지만 그걸 굳이 밝힐 마음은 없고, 아무튼 그냥 길 가다가 돌 하나 놓았을 뿐인데 그 돌 때문에 오히려 더 자유가 생기는 거예요. 사실 이자혜가 너무 유명하고 잘나가니까, 이렇게 하면 약간 마이너스가 될 것도 같았는데, 이미 1년 전에 정해놓은 제목이고, 다른 대안이 없어서 이자혜 씨한테 메일 보내서 허락받고, 착각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까지 썼죠. 편승해서 가져온 건 아니었어요. 제가 착각했다는 말까지 전략인 줄 아는 사람도 있지만요. (닥스훈트가 또 왔다.) 야, 나 무릎 약하거든. 개가 엉기는 건 처음인데. 무시해야지.

대개 제목을 먼저 짓지요? 제목이 제일 먼저죠. 문장이 먼저 올 때도 있는데 어쨌든 제목이 먼저 오는 경우가 많죠. 쓰다가 제목하고 각이 안 나오면 제목을 바꾸기도 하고요. 어쨌든 제목이 정해져서 기준이 잡혀야 그 다음이 나오더라고요.

황인찬 시집을 읽다 보면 페이지마다 같은 동작을 하게 되죠. 쓱 다 읽고, 다시 제목을 확인하는. 제목엔 두 음절짜리 한자어가 많고요. 이를테면 ‘풍속’이라는 시가 있어요. 그게 왜 ‘풍속’이냐면, <풍문으로 들었소>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풍문으로 들었소>가 너무 재미있어서 이걸 가지고 어떻게 하고 싶은데 ‘풍문’으로는 시가 도저히 안 돼요. 풍문이라는 제목이 붙은 시는 너무 낭만적일 수밖에 없고 제가 쓸 수 있는 종류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풍’자 들어가는 것 중에 느낌이 오는 걸로 바꾼 게 ‘풍속’이에요. 그렇게 ‘풍속’이라고 정한 다음에는 시가 아예 다른 식으로, 상관없이 시작돼버리거든요. 항상 그런 식으로 우연히 마음에 들어오는 거, 눈에 들어오는 걸 막 끌어당기고, 그 다음부터 기준에 따라 재편하는 거죠. 맨날 써먹는 두 글자 제목은 그냥 제가 한자를 좋아하나 봐요.

묘해요. 두 음절 한자어라면 개념이든 느낌이든 어쨌거나 뭔가 정확히 파야 할 것 같거든요? 근데 딱 스톱을 걸죠, 황인찬은. 그걸 파면 장인이 되니까? 항상 그 감각은 있는 거 같아요. 이만큼 더 가면 너무 멀리 가는 거야. 그러니 여기까진 가지 않고 그 안에서 계속 맞춰보는 거예요. 근데 또 스톱하고, 스톱하다 보면 기준이 변해요. 계속 멀어지기도 하고 당겨지기도 하고. 하여간 그때그때의 기준에서 움직이게 되죠. 근데 항상 뭐가 안 되는 쪽으로 움직여요. 뭘 안 하려고 시작하고, 안 되는 기준에 맞춰보고, 제가 생각하는 자유는 그런 거거든요. 새장이 없으면 자유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자유를 이용하는 것 같아요..

감이 좋은 건 그렇다 치고, 그럼 노력이라면요? 좋은 모양이 나올 때까지 궁둥이 붙이고 앉아 있는 거요.

광명 철산 톰앤톰스에서요? 네. 맨날 밤새면서. 쪽팔려 죽겠어요.

정말 밤을 꼴딱 새요? 날마다? 첫차 타고 들어가요. 다음 날 일정이 있을 땐 할증 풀린 택시 타고요. 4천원 내냐, 5천원 내냐 그 차이로. 근데 이것도 관성이 붙어서, 집보다 거기 더 오래 있거든요. 그니까 너무 편해서 집중이 잘 안 돼요.(웃음).

그런데 황인찬의 시에 가장 많이 나오는 공간이라면 커피집이 아니라 교실이죠. 제가 아직 십 대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근데 이십 대 애들이 많이 그러더라고요. 십 대 시절을 잘 못 벗어나더라고요. 그때의 어떤 감상이나 감각이나 기억 같은 것들을. 스스로도 좀 미성숙한 상태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나도 어른이야,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인 것 같아요. 네. 어른이 안 되고 싶다는 생각이 모두한테 있는 거 같아요.

또래들이 <희지의 세계>를 좋아하죠? 평단에서도 좋아하고. 일단 평단이 좋아하는 이유는 읽기 쉬워서인 것 같아요. 읽기 쉬우면 뭔가 말을 붙이기가 좋거든요. 독자들이 좋아하는 이유도 읽기 쉬워서인 거 같아요. 읽기 쉽고, 들키지는 말고, 이게 제 기본 태도라서. 근데 어쨌든 읽기 쉽다는 것만으로도 좀 지지를 받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읽기 좋아, 읽기 쉬워, 이런 말을 항상 듣죠. 그 읽기 쉬움 중 하나는 신파적인 거예요. 신파가 늘었어요.

관조를 벗어났더니? 네. 제가 계속 못 벗어나는 말이 있는데, 이준규 시인이 트위턴가 블로그에 한 말인데, 좋은 시는 항상 슬프다, 이렇게 썼어요. 아니다, 슬픈 시면 좋은 시다, 이런 식으로 썼어요. 오류가 있는 말이잖아요. 좋은 시는 대체로 슬픈 정서를 일으킨다, 이게 맞는 말인데, 그렇게 하면 부정하고 말 것도 없죠. 근데 슬픈 시가 좋은 시라고 말해버리면 층위가 다르잖아요. 근데 반박이 안 되는 거예요. 반박이 안 돼요. 한편으로는 마감에 쫓기다 보니 시를 쓰다가 막힐 때, 신파를 당겨오면 정리가 되는 거예요. 활용하는 거죠.

해설을 쓴 장이지 시인은 ‘폐쇄 회로’라는 말을 했지요. 사실 저한테는 그 폐쇄적인 회로 자체가 시적인 범주인 거예요. 말하자면 그 범주에 따옴표를 일부러 치고 싶었던 거죠. 제 의도를 누가 100퍼센트 알아줄 린 없지만, 제가 장이지 시인에게 해설을 부탁한 이유는 그래도 제가 의식하고 있는 지점을 콕콕 짚어줄 것 같아서였어요. 진짜로 다 짚어줬어요. 근데 한편 이렇게까지 나와버리면 또.

빨리 도망가야겠다? 네. 발생할 담론의 폭을 너무 줄여버릴 수 있으니까요. 저 정도까지 까발리면 나는 뭘로 더 아는 체하고 잘난 체하지? .

재미있네요. 시는 아름다운 무엇이지요. 황인찬의 시도 아름다운 무엇이고요. 그런데 황인찬은 뭔가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태도가 없죠. 저는 애초에 문학을 좋아했던 이유가, 아니 좋아할 때까지는 그런 감성에 와 닿는 걸 좋아했는데, 제가 문학을 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배수아 때문이에요. 배수아가 너무 이상해서. 이게 뭐야 싶어서. 이렇게 이상한 게 문학이면 나도 문학할래. 그게 제가 문창과에 들어가는 불행이 시작된 이유거든요.(웃음) 시작이 그렇다 보니, 그런 욕심은 덜한 것 같아요. 못 참는 것도 있죠. 아, 그냥 이 말은 넣자, 그게 있긴 있어요. 그러면서 느끼는 거죠. 내가 이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구나. 그니까 내 기분, 내 생각, 내 감정이 착각이잖아요. 일시적인 거고. 누구를 죽이고 싶고, 누가 진짜 너무 좋아도, 조금 지나면 언제 그랬나 싶잖아요. 그런 걸 뺀, 제 생각에 올바른 형태를 찾아가는 시가 좀 더 오래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하자면 저한테 그게 더 맞는 일인 거죠. 그래서 휙휙 넘겨버릴 수 있어요. 제가 강의할 때 꼭 하는 말 중 하나가,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머릿속이 다 똥이니까 똥인 거를 인정해라,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건 다 거기서 거기다, 당신의 감정도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너무 인간이라서 감정을 다 빼고 생각을 다 빼도 당신이 거기 이미 들어 있다. 너무 심하게 들어 있어서 빼고 빼고 빼도 티 나게 남아 있으니까 그냥 다 빼라. 근데 진짜로 그래요. 빼고 빼고 빼도 그 인간이 드러나잖아요. 심지어는 그 뺀다는 행위 속에서 인간이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니까 빼도 돼요. 안 중요해요.

이상한 멋이에요. 미니멀리스트라는 얘기도 아니지요. 그렇게 개념적이지 않죠. 상식이나 구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진심은 별로 안 믿고, 심지어는 메시지도 안 믿어요. 그러다 보니 이 시집이 약간 어중된 거예요. 어중간하게 보고 어중간하게 가려다 말고. (웃음) 근데 그 어중간한 지점을 벗어나는 게 불안해요. 훨씬 불안해요. 지금은 말하자면 모르겠다, 모르겠다, 갈팡질팡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순간에는 너무 머리를 쓴 거 같고, 어떤 순간에는 너무 노골적으로 던지는 거 같고, 어떤 순간에는 이게 뭐야 싶고. 말하자면 제 의미에서의 진정성이고 진심인 건데, 그게 나은 것 같아요. 가장 다른 점이 뭐냐면 이번엔 시집을 내고 시집을 펼쳐봤어요. 첫 시집은 안 펼쳐봤어요.

펼쳐보니? 제가 여기서는 덜 기만을 부렸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덜 기만을 부렸다는 말이, 더 많이 도망쳤다는 뜻인 것도 같고요. 첫 시집에서는 맨 마지막에 쓴 ‘무화과 숲’을 맨 끝에 실었어요. 말하면서 갑자기 생각났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맨 처음 쓴 시가 끝 시가 됐어요.

‘인덱스’라는 시를 제일 먼저 썼다는 거죠? 네. 그니까 그 ‘인덱스’라는 시를, 이제부터 죄책감을 더 견딜 거라고, 맨 처음 썼어요. 맨 마지막에 쓴 게 ‘이것이 시라고 생각된다면’이에요. 근데, 이 시집이 잘 팔리는 건 좀 이상한 거 같아요.

나오자마자 많이 팔렸죠? 첫 시집이 전체 7천 부였어요. 7천 부도 진짜 많이 팔린 건데, 우수문학도서 선정 1천 권이 있었으니까 사실 6천 권 팔린 건데. 그때도 아, 내가 이 시집으로 팔 수 있는 최대치를 팔았구나 싶었는데, 지금 벌써 그만큼 육박해오고 있어요. 첫 시집으로부터의 기대, 그리고 인터넷에서 아이돌 팬덤이나 2차 창작하는 애들 사이에 몇몇 구절을 통해 이름이 확 알려졌어요. 그래서 시집을 안 산 사람들도 황인찬 이름을 종종 얘기해요. 그 사람들이 살까 말까 하는 타이밍에, 제목 특이하고 색깔 예쁜 책이 나왔으니 이참에 사볼까? 그렇게 된 거 같아요.

거기서 스트레스는 없어요? 없어요. 스트레스를 느끼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게 내가 싫어지죠. 사실은 ‘무화과 숲’ 좋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백자의 시인’ 이라 말하는 게 더 불편해요. 어른들이 첫 시집 되게 좋아하셨는데, 두 번째 시집도 받아들이시는 거예요. 노인들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에요. 뭔가 저 사람들이랑 내가 코드가 맞는 게 있긴 있구나. 그게 꼭 나쁜 게 아닌데, 뭔가 어떤 지지를 받는 것에 대한 쓸데없는 두려움과 거부감이 있긴 있어요.

시가 너무 시이듯이 백자는 너무 백자죠. 그걸 ‘백자’라고 말하는 건 매우 조심스러운 건데, 덜컥 ‘백자의 시인’ 이라 부른다면…. 그러니까요. 백자의 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이런 말도 했어요. “어떻게 젊은 사람이 이렇게 깊어요?” 안 깊거든요?(웃음) 저는 그냥 어떤 깊은 시들을 좋아해온 거고, 그러면서 그 방법론을 제 방식으로 소화하려고 노력했던 거고, 어떤 면에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다시 소환했던 거죠. 깊지 않거든요. 깊다는 말이 싫어요. 깊은 게 아니고 레이어가 많은 거예요. 다르잖아요. 전 그냥 레이어가 많고 복잡하고 싶어요. 그게 이 시대에는 맞는 거 같아요.

어쩌면 그걸 ‘깊이’라고 말하는 것도 내내 같은 뜻 아닐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왜냐하면 이 시집에는 오해할 만한, 착각할 만한 지점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스스로를 설득하죠. 오해할 게 없구나, 착각할 게 없구나, 그냥 아름답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젊은 시인’이라는 말은 여태 있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시’는 바쁘게 불려다녔죠. 지금이라면 황인찬이라는 시인이, 황인찬의 시가 어쩌면 유일하게 그 자리에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바라는 건, 제가 잘되는 거거든요. 제가 유명하고 특별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TV에 나와서 뭘 파는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에 중요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거죠. 근데 제가 이 시집을 내고 딱 느낀 게 있어요. 나 혼자 궁리해서는 아무것도 아니고 사라지는구나, 그래서 동료가 필요하구나. 처음으로 그 생각을 했어요. 나 혼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그냥 특징으로 지나가버리는구나. 내심 바라는 건 딴 애들이 같은 고민을 해줬으면 좋겠다…. (웃음) 빨리 김승일이 시집을 냈으면 좋겠어요. 걔는 시를 정말 못 써요. 근데 걔는 시를 안 쓰기 때문에 그래요. 걔의 좋은 점은 그거거든요. 사실은 제가 다른 시인은 흉내 낼 자신이 있어요. 그 사람만큼 될 순 없어도 방법론을 가지고 쓰면 돼요. 근데 김승일은 안 돼요. 특이한 점이에요. 걔가 막 폭넓은 독자를 가질 일은 절대 없어요. 똘아이라서 포기만 안 하고 계속하면 진짜 특별한 사람이 될 거는 아주 확실해요.

질문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하다 보니 길어졌네요. 제목을 한번 지어볼까요? 설중매 맛있다. 설중매를 마시며.(웃음)

인터뷰 다음날 그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자고 일어나서 목이 너무 뭉치고 아파서 아 모지 잠을 잘못잤나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어제 촬영할 때 막 스튜디오 바닥에 드러누워서 머리로 몸 지탱하구 막 양말을 신었다 벗었다 하구 안 쓰던 근육을 다 써서 이 난리가 난 것이었음.”

    에디터
    장우철
    포토그래퍼
    안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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