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Q AWARDS 올해의 연기 ‘유아인’

다 망했다는 말이 흉흉하게 떠돌았다. 그럼에도 특별히 배제하거나 더하지는 않았다. 진짜와 가짜, 기대와 실망, 성공과 실패를 한 상에 차렸다. 2015년을 돌아보면서 <GQ>는 가장 넓은 의미의 상賞을 상다리 부러지게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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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연기 유아인 <베테랑>과 <사도>. 올해 극장에서 유아인의 얼굴을 본 경험은 어쩐지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남은 듯하다. 실제로 그런 장면이 있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의 존재감이라는 게 모두를 압도하는 종류였다는 점만이 그야말로 압도적일 뿐이다. 열혈남아로 종횡무진이었던 그는 마지막 한 방처럼 선택한 <육룡이 나르샤>를 통해 ‘유아인의 연기’가 무엇인지 독하게 일깨우는 중. 그의 연기는 오늘 만개한 꽃이 내일도 만개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올해의 창작 <솔로 강아지> 소설 창작 수업을 들은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빈번하게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소설에서 절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작가 지망생의 작품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한다. 작가가 지질하고 복잡한 인간사를 회피하고 초월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면서, 인간이 책임질 수 없는 것 중에서도 가장 아득한 영역이기에 그들의 선생님이 충고하는 것일 테다. 말하자면 누군가를 죽이는 건 아주 초보적인 표현이다. 그래도 죽음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면 조금 나은 편이다. <솔로 강아지>라는 시집 제목보다 ‘잔혹 동시’라는 이름으로, 영리한 몇 편의 시보다 어머니를 죽이는 과정을 묘사한 ‘학원 가기 싫은 날’이라는 시로 한 어린이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사탄의 영이 지배하는 책”이라는, 시적 허용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평가까지 들었다. 시달림을 견디다 못한 출판사가 책을 전권 회수하고 폐기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지적대로 “한 아이의 글쓰기와 그 출간에 따른 사회적 책임뿐만 아니라 예술적 글쓰기의 윤리를 비롯해 예술적 재능의 성격과 그에 대한 교육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였다. 다만 아주 초보적인 표현보다 조금 나은 수준도 포용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현재는 확인했다. 이 창작 행위에 적절한 조언을 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사회에서 창작은 늘 못 자라 있을 것이다.

올해의 창작과 비평 신경숙 표절을 둘러싼 일들 2015년 6월 16일, 소설가 이응준은 <허핑톤 포스트>를 통해 신경숙의 소설 <전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누가 봐도 유사한 문장이었다. SNS를 중심으로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한국 문학은 ‘그들만의 리그’가 된 지 오래였다. 곧 지나갈 바람처럼 보였다. 오히려 폭풍은 창작과 비평의 해명으로부터 시작됐다. “작품 전체를 좌우할 독창적인 묘사도” 아니고, “굳이 따진다면 오히려 신경숙 작가의 음악과 결부된 묘사가 더 비교 우위”에 있으며, “해당 장면의 몇몇 문장에서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를 근거로 표절 운운하는 것은 문제”라는 게 창비가 최초로 내놓은 입장이었다. 문학에서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따로 있다고 배웠던가? 그렇게 가르치는 교과서가 문제라고 주장하지 않았나? 게다가 비교 우위에 있으면 표절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고, 표절은 중요한 문장만 베껴야 성립되던가? 그제야 창비를 옹호하는 측에서 말하는 여론재판이 시작됐다. 곧바로 창비와 신경숙은 기존의 입장을 뒤집었다. 아주 소극적으로 표절을 인정했다. 하지만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번 사태로 불거진 문단 권력 논란에 책임을 느낀 문학동네 편집위원이 전원 사퇴한 것과 대조적으로 소설가 신경숙의 남편이자 표절 저격수로 명성을 떨친 문학평론가 남진우는 “표절은 문학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주장을 담은 글을 문예지에 기고했고, 창비는 <창작과 비평> 2015년 가을호에서 ‘여론재판, 여론선동에 의해 호도되었을 뿐 문학에서의 표절은 분명하지 않다”는 옹호의 글 ‘문학의 법정과 비판의 윤리(윤지관)’를 실었다. 결국 아직도 그들은 사람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한국에서 형성되는 여론에는 병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 사안의 경우, 괜히 한마디씩 보태서 여론을 만드는 언론과 SNS도, 문학에 무지한 우매한 대중의 책임도 상대적으로 가볍다. 애초에 문학을 거룩한 성지로 만든 건 그들 자신이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윤리 의식조차 배반하는 작품 외적인 윤리가 도저히 먹혀들 수 없는 이유다. 창작도 비평도, 창작과 비평도 모두 실패했다.

올해의 아쉬움 <육룡이 나르샤> 성공적인 시리즈의 프리퀄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기꺼이 애정으로 보는 팬과 함께 시작하는 셈이니까. 한국의 공중파 드라마가 경쟁적으로 하향평준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뿌리깊은나무>의 프리퀄이자 원작자인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후속작 <육룡이 나르샤>에 대한 기대는 컸다. 현재 시청률 11퍼센트에서 14퍼센트 수준으로 동시간대 최고이나 ‘기꺼이 애정으로 보는 팬’과 등장 배우들의 팬, 그 시간대에 볼 만한 다른 프로그램이 없어서 보는 시청자가 만들어낸 수치로 예상한다. <뿌리깊은나무>에서 보여준 통찰력은 여전한데, 사건도 대사도 완급이 없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담대했던 연출 대신 완성도 낮은 신변잡기에 치중하는 연출만 보이고, 몇 번의 충격이 있었던 연기 말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무난한 연기만 가득하다. 먼저 방영된 <정도전>을 의식한 결과일까? 조선 건국이라는 장대한 서사를 펼치기엔 역부족이었던 걸까?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대체로 믿지만, 다음 작품을 기다리기엔 <육룡이 나르샤>가 아직 반 이상 남았다. ‘기꺼이 애정으로 보는 팬’이기에 텔레비전 앞을 지키긴 하겠지만…. ‘호구’가 아닐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물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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