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Q AWARDS 올해의 대결 ‘조훈현 vs. 조치훈’

4올해의 대결 조훈현 vs. 조치훈 조훈현은 부채를 들고 모시 바지저고리를 입었다. 조치훈은 양복 차림이었다. 조훈현의 짧은 머리는 새하얗게 세어 있었다. 조치훈의 귀를 덮는 머리는 꼭 바둑 만화의 젊은 주인공 같았다. ‘제비’란 별명의 조훈현과 지독하게 신중한 조치훈. 기풍 또한 그렇게 다른 둘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은 건 꼭 12년 만이었다. 한국 현대 바둑 70주년 기념 대국. 엎치락뒤치락 치열하던 승패는 의외의 변수로 갈렸다. 조치훈 9단의 시간패. 초읽기 중 계시원이 “여덟, 아홉, 열!”을 외치는 동시에 조치훈 9단의 흑돌이 바둑판에 떨어졌지만, 결국 조치훈 9단은 패배를 깨끗이 승복했다. 154수의 치열한 승부. 과연 최후의 순간까지 갔더라면 어떤 승부가 났을까? 유창혁 9단은 “워낙 난전이라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고, 최명훈 9단은 “흑이 좀 유리했을 것”이라 말했다. 승패는 결정 났지만, 끝이 나진 않았기에 더욱 궁금한 승부. “괜찮다. 그것도 운명이다.” 조치훈은 대국 후 이렇게 말했다. 과연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는 그 남자의 언어임이 분명하다.

올해의 소문난 잔치 파퀴아오 vs. 메이웨더 평상시 복싱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이 경기만큼은 기다렸다. 아니,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최근 몇 년 동안 누가 복싱 스타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괜히 아는 척을 했다. 격투기를 안 좋아하던 사람들도 복싱은 신사의 스포츠라고 떠들었다. 하지만 경기가 싱겁게 끝나자 모두가 복싱이 죽었다고 말했다. 최후의 승자는 UFC라고 너도 나도 말했다. 이 경기가 졸전으로 끝난 건 누구 때문일까? 피하기만 한 메이웨더? 아니면 부상을 숨긴 파퀴아오? 이미 은퇴를 결심한 두 복서에게 필요한 건 넉다운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을까? 잃을 게 많은 사람들의 대결은 언제나 시시하기 마련이다. 경기에서 완벽하게 진 건, 전 라운드를 다 본 시청자다.

올해의 선수 권혁 9승 13패 17세이브, 평균자책점 4.98. 투구 이닝 112. 이것이 과연 선발투수의 성적일까, 구원투수의 성적일까? 투수 분업화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80~90년대였다면 ‘전천후’란 이름으로 그저 좋은 쪽으로 포장되었겠지만…. 올해 권혁은 78경기에 등판했다. 팀당 144경기를 치르는 시즌 중 권혁이 안 나온 날보다 권혁이 나온 날이 많았다. 어느 날은 5회에, 어느 날은 7회에, 어느 날은 9회에 나왔다. 시즌 막바지로 갈수록 구속이 떨어지고, 평균자책점이 치솟았지만 여전히 권혁은 절체절명의 승패의 갈림길마다 마운드에 올랐다. 역대 구원투수 최다 패 신기록. 불명예라기엔 “원 없이 던지고 싶다”던 시즌 전 한화 이적 당시의 바람이 영광의 상처로 남은 건 아닐까. 어제 홈런을 맞아도 오늘 다시 씩씩하게 직구부터 꽂아 넣던 그 역투엔, 박수와 함성을 보내는 것 말고는 과연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올해의 목소리 주현미 서울 택시 기사의 팔 할은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듣기에 언제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주현미의 러브레터>를 듣는 순간만큼은 몸과 마음이 개운해질 수 있었다. 물었더니 대답해주는 것 같은 주현미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그녀가 노래도 말하듯이 했다는 생각에 닿기도 했다. “순정을 다 바쳐서 믿었던 그 사람, 사랑의 낙서만 남기고 떠나갔네.” 이를테면 이런 가사를 노래할 때, 주현미는 혼자서 읊조리는 게 아니라 누구에겐지 말을 붙이듯이 했다. 그 말이 듣기에 좋은 것은 역시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라디오는 점점 누가누가 시끄럽나 대회장처럼 되어간다. 취향이나 정서가 드러나는 ‘선곡’도 점점 사라진다. 그런데 <주현미의 러브레터>에는 선곡이 보인다. 예를 들어 이은하의 ‘겨울장미’로 시작해, 이선희의 ‘잃어버린 약속’으로 끝나는 11월 8일의 선곡표를 보건대, 단정하고 사려 깊은 외숙모의 취향이 가지런하지 않나? 대세니 대박이니 온통 뭉뚱그려 시끄러운 세상에, 주현미의 목소리는 지금 막 시작하는 빗소리처럼 고요하고 반가웠다.

올해의 힘 테임즈 에릭 테임즈는 창원 연고의 야구단 ‘NC 다이노스’의 외국인 타자다. 그는 올해 KBO 리그를 집어삼킬 듯했다. 한 경기에서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을 모두 치는 ‘사이클링 히트’를 두 번이나 기록했고(이는 한국은 물론 일본 리그를 통틀어도 없는 기록이다), 홈런 40개와 도루 40개를 동시에 기록해 40-40 클럽에 가입했다.(이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단 4명 밖에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다.) 시즌 내내 그는 어마어마한 두께의 팔뚝으로(테임즈를 검색하면 팔뚝이 연관 검색어로 뜬다.) 야구공을 후려쳤고 각종 기록에서 상위권을 쟁취했다. 하지만 테임즈가 그저 강하고 거칠어서 올해의 ‘힘’으로 선정한 것은 아니다. 힘의 이면엔 한없이 보드라운 취향도 갖추고 있었다. 가방엔 카카오톡 캐릭터 프로도 인형을 달고 다니고, 연습이 끝나면 와플과 아이스크림을 먹고, 쉬는 날엔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레고를 즐긴다. 수염을 위해서 수염받이를 챙기고, 마스크 팩도 하며, 각종 오일로 틈틈히 관리한다. 쉴 새 없이 고향에 두고 온 강아지를 그리워하고, 미니언즈와 스펀지밥 아이폰 케이스를 좋아한다. 진짜 힘은 유연함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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