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빌 로의 제이슨 바스마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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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브스 & 호크스와 제이슨 바스마지안 런던 리젠트 스트리트에서 올드 본드 스트리트를 향해 걷다 보면, 오른편으로 거리가 하나 나타난다. 화려한 길은 아니지만 유서 깊은 남성복 매장이 도열해 있는, 쇼윈도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는 그곳이 바로 세계 최고의 테일러들이 모인 새빌 로다. 그 초입엔 20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기브스 & 호크스의 고풍스런 하얀색 건물이 서있다. 기브스 & 호크스는 그들의 레이블 아래 ‘No.1 Savile Row, London’ 이라는 수식을 단다. 그들의 매장이 정확히 새빌 로 1번지에 있기도 하지만, 문자 그대로 런던 최고의 비스포크 테일러라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조지 3세와 윈스턴 처칠, 윈저 공을 비롯해 다이애나 황태자비, 마이클 잭슨, 데이비드 베컴, 콜린 퍼스에 이르기까지 세기의 멋쟁이들을 고객으로 두었고, 알렉산더 맥퀸이 옷의 패턴을 배우기 위해 견습생으로 일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현재 기브스 & 호크스를 이끄는 남자는 제이슨 바스마지안이다. 2013년부터 브랜드를 이끌어온 그는 브리오니를 현대적인 이탤리언 럭셔리 브랜드로 부상시킨 전설적인 인물이다. 제이슨은 미국 보스턴에서 나고 자랐다. 그곳에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으며 부전공으로 예술사를 공부했다. 그는 자신의 유년기가 패션 업계 사람치고는 평범하다고 말한다.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어렸을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고 얘기하잖아요? 저는 아니에요. 스무 살이 넘어 남성복 매장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서야 옷에 관심이 생겼죠”. 그렇다면 혹시 집안 분위기가 남다 르진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에요. 부모님 모두 패션과는 별로 관련이 없었어요. 저희 아버지는 정말 평범한 1950년대 미국 남자의 전형이셨어요. 좀 멋을 낸다 하는 날 브룩스 브라더스 블레이저에 카키색 바지를 입는 게 다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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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이 이해하는 브리티시 테일러링 그가 패션 업계에 뛰어든건 런던에서 일 년가량 조르지오 아르마니 인턴십을 하면서부터다. 1994년부터는 캘빈클라인과 도나 카란 뉴욕의 남성복 디렉터로 일했고, 이후 파리로 건너가 S.T. 듀퐁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다. 브리오니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있었을 때 얘기는 이미 너무 알려져 있다. 뉴욕과 파리, 밀라노와 런던에서 두루 일한 덕에 그는 전 세계 클래식 남성복의 스타일을 훤히 꿰고 있다. 그는 브리티시 테일러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은 이탤리언 수트가 브리티시 수트보다 더 유명하지만 원조는 사실 영국이에요. 이탈리아의 유명한 마스터 테일러들도 예전엔 새빌 로에 와서 기술을 배워 갔고, 그걸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고쳐 발전시킨 거죠. 우리끼리는 이탈리아 사람이 영국 것을 실제 영국 사람보다 더 잘한다고 농담을 하곤 해요. 재미있지 않나요?” 그는 웃으며 얘기했다. “분명 이탤리언 스타일은 섹시하고 유연한 멋이 있어요. 하지만 최근에는 다시 새빌 로 스타일이 주목받고 있죠. 브리티시 테일러링은 좀 더 엄격하고 남성적이에요. 구조도 견고하고, 컷도 딱딱하고, 어깨도 훨씬 더 강조되어 있어요. 그런 요소 때문에 좀 더 직선적이고 건축적인 느낌을 줘요. 그리고 요즘은 그런 스타일이 좀 더 모던해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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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의 코트 그의 컬렉션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수트일 테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건 그가 만든 코트다. 사실 그의 코트는 브리오니 시절부터 유명했다. 최고급 소재와 흠잡을 데 없는 마무리, 그리고 무엇보다 클래식한 요소를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세련된 멋이 있었다. 특히 올해 초 기브스 & 호크스 매장에서 마주한 석탄색 더블 브레스티드 코트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거기엔 몹시 정중하고 당당한 위엄이 있었다. 장엄한 자태에 압도되어 걸쳐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코트를 입으면 아빠 옷을 훔쳐 입고 프롬에 간 고등학생처럼 보일 것 같아 코트가 걸린 옷걸이만 허공에 이리저리 휘졌다 다시 행어에 걸어놓았다. ‘코트 하나에 그럴 일인가’ 싶겠지만 그 옷은 코트의 완성형이라고 부를 만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응축해놓은 듯한 옷 앞에서 거부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을 보고 나면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음 날도 종일 머릿속에 어른거려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다시 매장을 찾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입어보았다. 구조는 단단했지만 소재는 뺨을 비비고 싶을 정도로 보드라웠고, 무릎까지 내려온 코트 자락은 몸을 타고 흐르며 경이로운 실루엣을 드러냈다. 길이와 비율, 단단한 어깨 라인은 물론이고 라펠이 솟은 정도나 넓이, 더블 브레스트의 깊이, 안감과 단추 하나에 이르기까지 완벽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한 번만 입어보자’ 싶었던 마음이 ‘이걸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지’라는 마음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가격표를 보고 한숨을 쉬면서도 가질 수 없는 명분이 생겼다는 것에 희미하게 미 소지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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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포크 기브스 & 호크스의 정수는 비스포크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시대에 비스포크가 경쟁력이 있는가’ 하는 의구심은 쉽게 떨칠 수 없다. 아무리 <킹스맨>의 콜린 퍼스가 근사하고, 젊은이들이 그 가치를 인정해도 실제 새빌 로에서 옷을 맞추는 건 다른 문제니까. 이에 제이슨은 이렇게 답한다. “새빌 로의 문턱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높지 않아요. 매장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이 놀라면서 하는 얘기도 그거죠. 수트는 대부분 3천 파운드 선에서 시작하는데, 세 번 이상의 피팅을 거치고 네 달 이상 작업에 몰두하는 걸 생각해본다면 그리 터무니 없는 가격도 아니에요. 백화점에서 파는 어설픈 수트들의 가격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죠. 일단 입어보면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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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패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