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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룡이 말하는 좋은 코트의 조건

2015.12.11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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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김서룡과 코트 얘기를 하네요. 일부러 애들 퇴근시키고 혼자 작업실에 있었어요. 헐렁한 흰색 면 티셔츠에 색깔이 밝은 청바지, 가죽으로 만든 검정 실내화를 신었고요. 이 차림엔 어떤 코트든 걸치면 다 그럭저럭 어울려요. 코트 얘길 하다 보면 코트가 입고 싶어지겠죠. 술 얘기 나오면 한잔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이에요.

작가 존 치버는 글을 쓰기에 가장 좋은 환경은 ‘나무가 내다보이는 창이 있는 작업실’이라고 했죠. 디자이너가 코트를 만들기에 가장 좋은 환경은 어떤 걸까요? 제 경우엔 혼자 있는 작업실이에요. 스탭들과 있을 땐 나만 듣자고 구식 음악을 틀어놓진 않아요. 이렇게 혼자일 때 창을 활짝 열고 옛날 노래를 크게 틀어놓으면 음악이 기억을 되살려요. 코트 한 벌 만들쯤이면 새벽이 오고 옷 한 벌에 인생이 다 담기는 기분. 큰 머그잔에 담긴 식은 커피, 담배 한 갑, 집에서 읽다 가져온 책 한 권만 있으면 더 필요한 게 없어요.

첫 번째 코트는 어떤 거였죠? 구제 옷 가게에서 찾아낸 라펠이 커다란 군용 코트였어요. 오랫동안 아껴 입었고, 마침내 내 이름을 건 첫 번째 겨울 쇼에서 그 코트를 재현했죠.

잊을 수 없는 코트는요? 어느 겨울, 아버지의 앉은뱅이 책상 옆에 덩그러니 걸려 있던 검정색 헤링본 코트요. 낡긴 했어도 좋은 코트 였는데 그땐 그 코트가 그냥 속수무책으로 보였어요. 아버지는 다음 해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좋은 기억도 떠올려보세요. 어릴 때, 그땐 귤이 참 귀하던 시절이었는데 형제들이 옹기종기 한방에서 놀고 있으면 늦게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코트 품에서 봉투에 가득 담긴 반질반질한 귤을 우리가 덮고 있던 이불 위에 와르르 쏟아주셨어요. 아버지 체온이 느껴지는 귤을 참새들처럼 받아 먹던 풍경이 겨울만 되면 생각나요. 형제가 여덟이었으니 아버지 코트가 꽤 불룩했겠죠?

아버지 말고도 코트가 어울렸던 남자 얘길 더 해주세요. 대학 다닐 때 교수님. 늘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에 클럽 보타이를 매고 다니셨는데, 겨울엔 꼭 그 위에 검정 개버딘 코트를 입으셨어요.

좋은 코트를 고를 때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게 있을까요? 흔한 얘기지만 디자인은 기본적인 걸로, 소재는 좋은 걸로 골라야 해요. 코트는 오래 두고 입는 옷이니까요.

김서룡의 코트를 세 가지 키워드로 축약한다면 어떤 단어가 어울릴까요? 견고함, 우아함, 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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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컬렉션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코트로 2015년 가을 겨울 쇼의 겨자색 롱 코트를 고른 이유는요? 모두 검정색 코트를 더 자주 입지만 블랙은 어둡고 폐쇄적이고 권위적으로 보여요. 그게 매력일 수도 있지만, 이미 검정 코트를 한 벌 가지고 있다면 다음 순서로 권하고 싶은 코트를 골랐어요. 검정보다 훨씬 여유 있고 분위기도 그윽하잖아요.

그럼 코트의 가장 아름다운 면모는 그윽함일까요? 균형이겠죠. 소재와 컬러의 어울림, 라펠과 길이의 연관성 같은 것들요.

옷마다 어울리는 사람과 공간이 다 다르죠. 코트는 어떨까요? 조금 차가워 보이지만 눈빛은 따뜻한 사람. 눈 오는 밤거리의 가로등 밑. 술이 살짝 취했으면 더 좋겠고요.

코트를 만들 때 누군가를 상상하기도 하나요? 항상 내가 입고 싶은 코트를 만들어요. 코트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작업하면서 계속 입어보고 고치고 또 고치고 하는데, 그 과정이 정말로 행복해요. 그래서 코트를 디자인할 때 고민이 제일 적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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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만든 코트가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닐 테죠? 설마요. 디자인이 별로 없는 건 지금 봐도 좋지만, 디자인을 좀 했다 싶은 코트는 저게 다 뭐였나 싶어요. 특히 언밸런스 코트 같은 건 생각도 하기 싫죠. 내가 만들었지만.

어떤 일이든지 마무리를 제대로 못하면 전체가 단번에 무너지죠. 코트에서 가장 중요한 마무리는 뭘까요. 김서룡 코트는 다른 디테일이 없다 보니 유일한 장식이 단추예요. 단추를 잘못 쓰면 잘 만들어놓고도 갑자기 김이 확 새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욕심 부리지 않고, 가장 눈에 안 띄는 싸개 단추를 달아요. 코트와 같은 소재로 단추를 감싸 이질적인 존재감을 없애는 방식이에요.

코트를 입은 남자가 등장하는 단편소설을 한 편 쓴다면 제목을 뭘 로 하고 싶어요? <그> 혹은 <he>.

겨울날, 행복을 완성하기 위해서 코트와 함께 꼭 필요한 것 몇 가지만 골라주세요. 보드카, 담배, 늘 듣는 음악.

르 귄이란 작가는 “나이가 들면 언어는 신발과 주방 기구 같아진다. 더 이상 화려한 건 필요 없다. 그래서 쉽게 얘기하는 법을 터득한다” 라고 했어요. 김서룡의 옷에는 쉽게 입는 옷의 가치가 있어요. 싸거나 흔해서 쉬운 게 아니고 매일 입을 수 있고 그 계절에 그 옷 하나면 충분한 옷. 고마운 얘기예요. 옷은 결국엔 나를 위해 입는 건데 남의 시선에 맞추다 보면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옷을 입을 때 제일 중요한 건 내 기분이에요. 그나저나 저녁이 되니 꽤 쌀쌀해졌죠. 창을 닫는 대신 코트를 입어야겠어요. 마침 아주 두껍지 않은 울 코트를 한 벌 만들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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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강지영
    일러스트
    곽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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