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시간이 선생이다

2015.12.22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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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파리 천문대의 높은 천장 아래, 경도가 새겨진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 밀려 세계 시간의 기준이 되지 못한 장소에 애달픈 경의를 표할 때 질문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시간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이젠 개구리 뛰는 방향도 알 것 같고 도저히 모르겠던 그 사람 마음도 얼추 짚히는데 시간에 대해선 왜 이렇게 오리무중인 거냐고.

금요일이 되자마자 다음 주 금요일을 그리워한다. 다시는 금요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11월부터는 또 새해를 기다린다. 올해는 어차피 망했으나 내년에 모든 걸 다시 시작할 것처럼. 세월의 흐름을 묶기 위해 더 작은 숫자를 내세우며 분투하는 세상에 시간이 서둘러 가길 바라다니. 하지만 시간은 단일한 선을 그으며 순차적으로 흐르지 않지. 아시다시피 사건에 따라 빠르게도 느리게도 흐른다. 시간은 머릿속에서만 와글대는 추상. 전부 다 맹인처럼 다른 답에, 코끼리 더듬듯 허무한 정의뿐이다.

물리학자는 시간이 공간과 함께 우주를 이루는 두 축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시계 장인에겐 자기 손으로 만든 초침 소리가 시간의 실체일 것이다. 생물학자에게 시간은 동식물과 자연을 통합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장치일 것이다. 성불사 주지 스님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영원히 돌고 도는 수레바퀴의 회전이라고 말할 것이다. 예쁜 여자에게 시간은 모든 걸 파괴하는 폭풍의 자손이겠지만, 젊은 은행원에게 시간은 뭣도 아닌 돈일 것이다.

동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서쪽으로 가는 것보다 어쩐지 빠를 것 같았다. 동쪽은 지구의 회전 방향과 같으니까 서쪽보다 지극히 작게라도 시간을 줄일 것 같았다. 그런데 실제로 그랬다! 나는 왜 물리학자가 되지 않은 걸까…. 시계와 달력을 볼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수학적으로 측정된 세상에 살고 있는지 깜짝 놀라지만 그 또한 오류 일색이다. 지구의 회전은 하루라는 단위에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다. 조류와 기후, 극지의 얼음 모양과 달의 중력, 모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전반적인 산출 결과는 지구의 회전이 점점, 한 세기에 몇 나노세컨드씩 느려지고 있다고 밝힌다. 물리학은 10억 년 전 지구의 하루는 20시간이었을 거라고 추산한다. 앞으로 2억 년이 지나면 하루는 25시간이 될 거라고. 찰나 속에 사건을 더 많이 집어넣는 방식으로 시간을 늘리려는 인간들이 그때까지 질기게 살아남는다면 나바론 요새처럼 굳센 24시간 시스템에 한 시간을 더할 까, 아님 한 시간의 길이를 늘리는 방법을 택할까? 그렇게 하면 늘어난 시간만큼 오래 살까? 결국 인생 자체가 길어지게 될까? 근데 그게 좋을까?

우리가 시간이 아닌 시계의 노예가 된 건 세상의 기계를 다 합쳐도 시계 숫자보다 적기 때문인진 모르겠으나…, 시간을 측량하는 게 물체의 본질을 파헤치는 것보다 쉬워 보이긴 한다. 사람도 기실 피와 살로써가 아니라 시간이 축조된 하나의 층 아닌가. 물체는 분자들이 여기저기서 춤을 추는 객체. 시계를 보면 시간의 정체가 적어도 춤추는 분자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내년까지 다이얼을 들여다본들 시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시계는 지금 당장의 시간도 나타내지 못하고, 몇 순간 전에 지나간 시간만 알려주는데? 그 비싼 기계식 시계보다 정확한 디지털 시계도, 그래봤자 2시 18분부터 2시 45분까지 얼마나 떨어졌는지만 일러준다. ‘시계 반대 방향’이 어딘지는 자기도 모른다. 시계를 통해 얻는 가장 가치 있는 정보는 어떤 행동을 해야 적절한가를 전해준다는 사실이다. 매 시간은 행동으로 채워야 하는 항아리와 같은데, 시계만이 그걸 언제 채울지 가르쳐주니까. 무슨 일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고지해주는 시계가 없었다면 이렇게 공장이 많은 사회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나 역시 매달 마감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시간은 복잡하지만 정교하게 짜인 현대사회와, 시간의 기능성을 모호하게 인지한 고대사회를 구분하는 눈금인 셈이다.

시간의 눈금 사이엔 움직임이 있다. 운전과 운동의 막간, 다음 건반을 짚기 전 음표 사이의 틈, 시를 쓰다 말고 멈칫하는 순간, 시간의 간격에 스민 더 작은 시간의 너비. 인간은 시간을 발명하지 못한 대신 쪼개고 또 쪼갠다. 항해 중인 선장은 1백만 분의 1초까지 포착하는 신호에 기반한 위성으로 배의 위치와 항해 방향을 파악한다. 우주 탐사선은 1백만 분의 1초까지 관측하는 라디오 신호에 의지한다. 원자핵의 파동을 관찰하는 물리학자는 1초를 몇천 조 단위까지 나눈다. 결국 1초가 무한대라는 얘기인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시간은 지나가면 끝인 무엇일 뿐이다.

시간의 개념 중 하나인 과거는 상상 속에만 있다. 미래도 마찬가지. 기대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우리가 느끼는 현재는 대략 6초에서 12초 정도, 움직임을 동반한 심리적 기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는 다른 현재들과 분리되어선 안 된다. 그럼 언어나 음악을 하나의 경험으로 인지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시간이 와르르 지나갈 때 현재들을 유기적으로 이어 붙인다. 현재가 끝없이 지속되도록. 시간은 결국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자연의 방식인 것이다.

자주 시계를 뒤로 돌려본다. 어른의 지혜로 다시 되돌아가 그때의 미숙함을 덮고, 예수와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아버지와 결혼 못하게 엄마를 말리고 싶어서.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시간이 원을 그리면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되돌아올 수 있을까? 모든 게 엉망진창이 돼버린 지금의 인생 궤도에서 벗어나, 과거의 틀이 아무 상관없고 회상이라는 개념도 모르는 일리아드 서사시의 주인공처럼 살 수 있을까? 내가 아는 건, 시간이 최고의 선생이라는 것뿐이다. 스승인 시간보다 오래 사는 제자는 없겠지. 오늘도 아둔한 고개를 쳐들고 창공을 향해 이렇게 혼자 떠든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는데 어디로 가는지 내가 무슨 수로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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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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