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너 경험 있니?

2015.12.24정우영

책의 위기에 대해 ‘사용자 경험 디자인’이라는 관점을 적용해봤다.

 

Book판형

 

애펙티브 디자인의 트레버 반 고프는 사용자 경험UX을 빙산에 비유했다. 수면 위로 5미터 가량 드러나 있다면 물속에 약 40~50미터가 가라앉아 있는 게 빙산이다. 비주얼 디자인이 바다 위로 보이는 모습이라면, 그 아래쪽으로 UI 디자인과 정보 디자인, 더 아래쪽으로 인터랙션, 바닥 가까이에 기능과 내용, 마지막으로 전략이 위치한다고 그는 설명한다. 사용자 경험의 자리는 따로 없는 이유가 있다. 사용자 경험은 빙산 전체를 가리킨다.

UX 디자이너를 UI 디자이너와 겹쳐놓거나 포괄적인 의미의 단어인 ‘디자이너’를 포토샵을 다루는 기술자로서의 디자이너로 한정시키기 일쑤긴 하지만 UX 디자이너의 역량은 갈수록 대접받고 있다. 다만 그들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그 역할을 착각하는 데서 기인하기도 한다. 아이폰의 등장과 함께 부상한 개념이기에, 사용자 경험을 IT 영역에 속하는 일로 여긴다. 잘못된 인식은 아니지만, 이때 꺼낼 수 있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다.

벌써 약 20년 전에 제기된 사용자 경험에 관한 주장이 지금에 와서야 힘을 얻게 된 데는 아이폰으로 촉발된 패러다임의 변화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 때 정말 좋은 기능을 갖춘 제품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많이 구매할 거라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그 제품을 많이 구매하던 시대 (<사용자 경험 이야기> 이상용)”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폰이 열어젖힌 시대는 달랐다. 아이폰은 자기완결적인 플랫폼이었으며, 인간의 직관과 놀랍도록 가까웠다. 이것은 어떤 제품도 아이폰이라는 플랫폼 안에서 생각하게 되었다는 뜻이고, 아이폰을 기점으로 기술 발전의 기울기가 몹시 완만해졌다는 뜻이다. 새로운 기술의 무게감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었다. 생산자 중심의 발상이 힘을 얻길 바란다면 아예 이 패러다임을 바꾸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용자 경험은 아이폰을 통해 얻은 교훈이자 아이폰이 바꿔놓은 패러다임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사용자 경험 디자인은 기존의 태스크 및 기능 중심이었던 제품 및 서비스를 사용자 중심 관점으로 바꾸어 디자인, 전략기획을 수립하는 하나의 디자인 전략(<사용자 경험 이야기> 이상용)”이다.

가장 보수적인 매체 중 하나인 도서 분야에도 ‘사용자 중심’의 바람이 불었다. 적어도 독자의 편에서 생각한 결과로 보였다. 누구나 저자가 되라고 권하는 수많은 글쓰기론 책들이 포문을 열었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는 컬러링북이 예술 서적 분야를 뒤덮었고, 이제는 필사 책이 다양한 서가에서 발견된다.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명시를 쓰다>, <내가 시가 된다는 것> 같은 문학 작 품 필사, <필사 손자병법>, <고전필사>, <라이크 카네기 다이어리 북>처럼 경영, 자기계발 서적의 태도로 접근하는 필사, 각각 <월드 클래식 라이팅북>, <나의 첫 필사노트>, <손으로 생각하기>라는 이름으로 이어나가는 전집을 닮은 필사 시리즈가 있다. <너의 시 나의 책>처럼 여타 필사 책과는 다른, 시어의 자리에 빈칸을 마련해두고 독자가 채워 넣을 것을 종용하는 방식도 시도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사용자 중심 디자인’을 평가하자면, 디자인을 맡겨놨더니 업종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되묻는 황당한 에이전시가 생각난다. 책은, 여백에 삐뚤빼뚤 글을 적는 건 허락해도 빈 종이를 내밀지는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보수적인 관점일까? 책이라는 지혜의 거처가 훼손되지 않길 바라는? 수많은 책 중에 글 좀 써넣는 책 있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용자 경험의 시대는 사용자가 그곳에서 놀 수 있는 방법을 만들라고 하고, 한국에서 그 시도는 시작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문학성이라는 환상, 실용적인 것과 천박한 것 사이의 등가, 세계인의 진보적인 생각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한가한 소리들, 어디서 본 듯한 도발은 있는데 자신의 이야기는 없는 충고가 한국의 책 시장을 잠식한 지 오래다.

책은 읽는 것이라는, 물러설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교보문고의 변화는 그것을 역설한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지난 2015년 10월부터 12월 10일까지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교보문고 측이 밝힌 리모델 링의 목표는 “오고 싶고 머무르고 싶은 서점”이었다. 이미 매체를 통해 여러 차례 거론된 5만 년 된 뉴질랜드산 카우리 소나무로 만든 대형 테이블이 그 상징이었다. 가로 11.5미터, 세로 1.5~1.8미터, 무게 1.6톤의 테이블 2개가 서가 사이를 가로질렀다. 최대 100명까지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테이블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서가를 등지고 혹은 서가와 서가 사이에 의자가 놓였다. 다 합치면 총 300여 개에 달했다. 서점으로서 좋은 책을 만들 수는 없을지언정 좋은 책을 보다 친근하게 접하는 환경, 그래서 독서가 근사해지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도서관 혹은 복합 문화 공간을 지향하는 서점의 완성형으로는 일본의 대형서점 T-SITE가 있다. 동경의 다이칸야마 점을 예로 들면, 스타벅스, 편의점, 갤러리, 레스토랑, 음반 매장, 가전 매장이 2층짜리 3개의 건물로 연결된 이곳에 모여 있다. 물론 곳곳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리모델링된 교보문고에서는 다소 아쉬웠던, 독립 출판물이나 예술 서적, 사진집, 잡지, 중고서적을 여타 서적과 동등하게 다루면서 전통적인 책의 외연이 좀 더 넓어진 풍경을 볼 수 있다. T-SITE를 운영하는 CCC의 창업자이자 CEO인 마스다 무네아키는 말했다. “일반적으로 ‘브랜드를 다루는 가게’ 는 라이프스타일을 물건이나 머천다이징으로 제안하죠. 하지만 우리는 물건이 아니라 ‘이미지’를 제공합니다.(<매거진 B – 츠타야 편> 마스다 무네 아키 인터뷰, 최태혁)”

지금, 책의 물성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책이 무거워서라기보다 책의 고리타분한 이미지가 무게를 가중시킨다. 무게를 감수할 만한 매력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무겁고 불편하고 낯선 바이닐 레코드가 지금의 위상을 가질 줄 누가 예상했나. 인간은 효율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지금의 출판 시장은 책이 아닌 것의 매력으로 책을 극복하고자 한다. 하지만 사용자 경험 디자인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필사 책은 UI 디자인과 정보 디자인 아래 빙산이 몽땅 녹아버린 상태다. 사용자 경험 디자인 에이전시의 비유를 한 번 더 써서, 의뢰가 들어와도 일을 진행하려야 할 수가 없다.

책은 정보와 지혜를 전하는 매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진심으로 쓰면 통한다”는 말에 담긴 신화와는 또 다르다. 책의 경우, 이것이야말로 사용자 경험 시대 이전 ‘기능주의 시대’의 발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역설적이게도 “진심으로 쓰면 통한다”라는 전제는 필요하다. 신화에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으며, 마케팅 용어가 아닌 진심일 때, 기꺼이 일단의 책에 관한 용도 전환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다. 눈앞의 사탕을 참을 수 있다.

얼마 전 한국 20~30대의 복권 구매 비율이 훌쩍 늘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젊은이들이 복권을 ‘헬조선의 탈출구’로 인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에도 일확천금을 노리는 세태는 지탄의 대상이 었다. 하지만 당시의 일확천금은 일을 하면서 누리는 환상이었다. 지금의 일확천금은 일을 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딱한 방법론이다. 세상엔 참치 캔처럼, 돌아가는 게 지름길인 일이 있지만, 어른은, 매체의 어른인 책은 그렇게 살아남았나? 사용자 경험 디자인은 무슨 비법이 아니다. 비록 느릴지언정 모든 길을 꼼꼼히 확인해보라는, 전체를 가늠해보라는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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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정우영
    일러스트
    문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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