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영화감독은 어떻게 평가받는가?

2016.02.02GQ

영화 제작자, 영화감독, 소설가, 에디터가 지극히 개인적으로 말했다.

Film판형

명확성 제작자 입장에서는 어떻게 촬영하는지를 통해 감독을 판단하고 싶다. 감독은 장면을 만드는 사람이다. 자신이 찍고 싶은 명확한 그림을 가지고 현장에 오는 감독과 모호한 채로 장면을 만드는 감독이 있다. 이건 천지 차이다. 아니, 어떤 배우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과 땅 차이인 줄 알았는데, 하늘과 땅은 같은 세계라도 있지, 다른 우주에 있는 것 같다”고. 봉준호 감독과 <살인의 추억>을 만들 때 사건 현장을 찍기 위해 진흙 구덩이 위까지 모니터를 질질 끌고 올라갔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직접 그린 콘티를 모니터 옆에 두고 좋아하며 말했다. “똑같지 않나요?” <살인의 추억>은 6개월간 준비하고, 6개월간 촬영한 정말 유례가 없는 영화지만, 봉준호 감독 머릿속에 있던 그림은 콘티가 되고, 그 콘티는 거의 똑같이 영화가 되었다. 이제는 감독이 카리스마를 운운하며 현장을 통솔하는 시대가 아니다. 스태프들이 따르는 건 감독의 큰 목소리가 아니라 감독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그림의 여부다. 배우도 장면을 확실히 말하는 감독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장면만 확실하다면 현장은 알아서 통제가 된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활자로 만들어진 시나리오 위에 배경이 세워지고 그 속에 배우가 들어오고 배우의 말이 채워지는 과정이다. 미술, 동선, 연기 모두 감독의 판단이다. 그래서 간혹 몇몇 관객이 배우, 음악감독, 제작자의 이름으로 영화를 간직한다 해도 여전히 영화는 감독의 것이다. 글/김무령(<반짝반짝영화사> 대표)

숏과 언어 할리우드의 유명한 편집감독 월터 머치는 감독의 역할이 면역 체계라고 했다. 영화라는 생물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좋은 건 받아들이고 나쁜 건 튕겨내는 역할을 감독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 뭘 흡수하고 뭘 포기할 것인가? 영화의 가장 최소 단위에서부터 생각한다면 숏 Shot으로 찍는 감독과 푸티지Footage로 찍는 감독이 있다. 숏을 완벽하게 정해놓고 찍는 감독의 경우 보여줄 것과 보여주지 않을 것을 정해놓아 굳이 보여주지 않을 것을 찍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힘을 줄 숏에만 공을 들일 수 있다. 그와 반대로 한 번에 여러 앵글로 찍는 방식을 푸티지라고 한다. 이렇게 촬영하면 현장에선 아무래도 편하고 편집에서 사용할 장면을 고르면서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감독 자신만의 선택이 차곡차곡 쌓이기 어렵다. 영화감독인 나부터도 지난 영화에서 푸티지로 찍은 경우가 많았다. 숏으로 찍는 감독을 동경하고 배우고 싶을 뿐이다. 또한 결기를 가지고 단호하게 숏을 결정하는 감독의 작품에선 자연스럽게 자의식이 느껴진다. 시점도 마찬가지다. 등장인물 중에서 어떤 캐릭터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흘러 가게 할 것이냐 하는 결정은 영화의 에너지를 응집시킨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의 도입 부에 원래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가 직접 고문하는 장면이 있었다고 한다. 촬영을 맡은 로저 디킨스는 그 장면을 특히 좋아했지만 감독 드니 뵐뇌브는 그 신을 완전히 뺐다. 온전히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의 시점으로 영화의 에너지가 농축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뭔가를 보여주지 않을 때 영화는 감독의 자의식이 투영 되고, 모든 걸 보여주려고 애쓰는 영화들, 즉 평범한 영화와 궤를 달리한다. 만약 영화가 하나의 언어라면 관객에게 그 의미가 잘 전달되는 순간이 있다. 말 그대로 감독과 관객이 ‘말’이 통하면 관객의 마음은 움직인다. 최근 많은 한국영화가 그 ‘커뮤니케이션’에만 매달린다. 누구나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면, 알고 있는 말을 해주면 의사가 쉽게 통한다. 그 말이 아름답지 않아도, 간결하지 않아도, 새롭지 않아도, 말만 통해도 영화는 언어로 기능할 수 있다. 물론 좋은 영화는 소통을 하는 영화다. 누군가에게 영화가 지닌 언어를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걸로 끝이니까. 하지만 어떤 아름다운 말이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고, 언어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런 언어는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술로 남는다. 그리고 영원하다. 그런 영화 언어를 구사하는 감독을 기다리고 나또한 되고 싶다. 글/홍석재(영화감독)

비전 좋은 감독이 없는 좋은 영화는 존재할 수 있다. 음악에 원히트 원더가 있듯이. 그러나 한 편의 좋은 영화가 좋은 감독을 만들진 못한다. 좋은 감독은 비전에서 탄생한다. 이건 어쩌면 철 지난 <까이에 뒤 시네마> 식 작가론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좋은 예술가는 단 한 편의 좋은 작품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매 작품 속에서 이어지는 세계 안에 존재한다. 감독이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이어가고 변형하는가, 그 과정이 지적 자극이나 환희, 의외성과 통일성에 대한 사유를 전해주는가가 좋은 감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이는 다른 장르의 예술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부과하자면, 영화는 예술이다. 상업적이든 대중적이든 산업이든 간에 어쨌든 예술이며, 예술이란 단지 하나의 성공적인 작품이 아닌, 시간과 과정의 산물이다. 감독은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거나 자신이 몰랐던 자신의 비전을 깨닫기도 하며 자신의 비전을 부수기도 한다. 그런 과정과 그런 과정 속에 놓인 작품이 지닌 힘과 방향이 감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만일 영화가 다른 장르의 예술보다 흥미롭다면, 그건 산업적인 요소 때문에 다른 장르에 비해 비전을 지속하기 힘들고 그로 인해 감독의 분투와 정치가 가장 복잡하고 현란하게, 때론 영웅적으로 일어나기 때문 아닐까. 글/정지돈(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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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 영화가 대중 예술이라(는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그렇다)면, 그 ‘대중’ 이라는 말이 흥행으로 연결된다면, 기업의 논리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어떤 기업이 좋은 기업인가? 수익을 내는 기업이다. 한 기업의 수익은 고용 안정과 같은 공익도 가져올 수 있지만, 직접적인 이익은 회사의 오너와 주주들에게 향한다. 백번 양보해서, 영화의 흥행이 경제적인 선 기능을 할 수 있지만, 직접적인 이익은 그 영화의 투자자들 몫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영화가 흥행하든 못하든 관객과 상관없다. 한 가지 더. 좋은 기업이 아니라 뛰어난 기업, 적확하게 뛰어난 ‘기업가’는 누구인가? 말 그대로 ‘대중’들이 알만한, 본받고 싶은 기업가 중 과거를 답습한 사람이 있을까? 지겹게 이야기하는 스티브 잡스, 엘론 머스크, 제프리 베조스, 마크 주크버그를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기준 중 ‘혁신’은 절대적이다. 그러니까 뛰어난 기업가는 혁신을 이룬 사람이다. 오직 자본의 ‘논리’만 적용한 기업가를 평가할 때도 ‘대중’은 새롭게 사고하고, 그걸 밀어붙이고, 쟁취했을 때 영웅화하고 평가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단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작은 성공이라 할 지라도 새로운 도전에서 출발했을 때, 공유할 만한 대상이 된다. (다시 한 번) 영화가 정말 대중 예술이라면, 심지어 (미적 작품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창조 활동인) ‘예술’이 맞다면, 흥행은 뛰어난 영화를 가르는 기준이 아니다. 물론 생존 자체만으로도 힘든 시기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또한 새로움이야말로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철저히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라는 판타지 속에서 찾고 싶은 건 못 보던 세계, 그것을 만들어낸 조물주, 이에 도전하는 영화 감독이다. 싸움을 피하면 영웅이 될 수 있는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바탕으로 배우, 제작자, 투자자, 끝내 관객과 싸워 설득시키고 굴복시키는 영화감독을 비로소 뛰어난 영화 감독이라고 부르고 싶다. 만약 그런 도전을 장려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만연하다면, 단지 싸우려는 태도로 링 위에 서 있기만 해도 열렬히 응원하고 싶다. 관객도, 감독 자신도 보지 못한 장면을 만들어내겠다는 결의, 아무도 보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온전히 자신을 두는 용기를 스크린에서 발견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술이라도 사면서, 같은 야구팀을 응원해달라는 마음으로 ‘선교’하고 싶을 뿐이다. 진짜 마지막으로 기업가의 마음으로 이야기한다면, 영화라는 산업은 절체절명의 위기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게임, 인터넷, 소셜 미디어가 영화의 지분을 파고든지 오래다. 두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영화를 보는 게 힘든 시대에 영화가 영화 산업으로 생존하는 방법은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것뿐 아닐까? 링 위에 올라가지 않으면 싸울 수 없다. 맞지 않고 때릴 수 없다. 아프지 않고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영화감독을 평가할 때 지금은 링 위에 오르는 용기만을 우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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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양승철
    포토그래퍼
    일러스트
    모델
    문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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