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이 나아가야 할 길

히트곡은 여전한데, 유행은 사라졌다. 덩달아 케이팝은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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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경쟁하듯 따라 하려던 때가 있었다. 새로운 게 나오면.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곧장 시도는 해보던 때. 독창성이야말로 중요한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건 새로운 음악 위에 서는 거라 대답할 수 있던 때. 거기엔 실시간 유행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유행을 이끄는 ‘얼리어답터’가 있었다. 대부분 작곡가였다. 누군가 새로운 사운드나 장르를 차용한 설득력 있는 곡을 내놓으면, 다른 작곡가들이 엎치락뒤치락 따라붙었다.

한편 가요계, 넓게는 음악계의 유행은 곧 흐름이기도 하다. 하나의 유행이 끝나면 완전히 다른 게 나타나기보단, 긴 물줄기가 흐르는 것에 가깝다. 전의 흐름은 다음의 직전 맥락이자 거름이 된다. 반짝이는 유행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다음은 무엇일지 그 힘차게 흐르는 물줄기를 지켜보는 일이야말로 흥미롭다.

케이팝은 그런 기대로 외신의 주목을 받았다. 분명히 아이돌인데, 영미권 아이돌의 안전한 음악과 콘셉트 대신 좀 기괴해 보일 수도 있는 걸 했다. 노래의 전주에 덥스텝 브레이크를 넣는다거나, 감상용 혹은 차트용 음악이 아닌 클럽을 겨냥한 댄스 음악에서 주로 쓰던 사이드체인 효과를 후렴구에서 강조하는 식이었다. 대중의 보편적 사랑을 받으며 거대한 매출을 올리는 아이돌이 아닌, 이상한 걸 하면서도 사람들의 열광을 사는 게 케이팝이었다. 물론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케이팝에 대한 기대는 있다. 미국 아이튠즈는 지난 12월,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만 공식 차트로 운영되던 케이팝 차트를 신설했다. 피치포크는 f(x)의 < 4 Walls >를 리뷰하며 7.3이라는 꽤 괜찮은 점수를 줬다. 키스 에이프는 미국 투어에 이어 연말 아시아 투어를 돌았 다. CL은 디플로, 오지 마코, 리프 래프와 싱글을 낸 뒤 본격적인 미국 진출을 위한 음반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케이팝에 대한 담론은 2011년 현아의 ‘Bubble Pop!’이 < SPIN >이 뽑은 올해의 노래에 오르고, 같은 해 빌보드에 케이팝 차트가 생겼을 때와는 좀 달라 보인다. 케이팝이 물줄기라면 키스 에이프, f(x), CL은 지금 그 답답하고 느린 물살 밖으로 나와 있는 게 아닐까? 외신도, 국내 매체도, 혹은 그냥 애호가들도 그들의 이름 옆에 누군가를 함께 놓는 일은 드물다. 한창때 소녀시대 옆에는 원더걸스나 카라를 놓을 수 있었겠지만, 과연 지금 f(x) 옆에 누구를 놓을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f(x)의 ‘4 Walls’는 지난해 차트 성적을 지향하고 발매된,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거둔 노래 중 가장 유 별하다. ‘Bubble Pop!’의 맥락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클럽에서 틀어도 무방한, 댄스 음악의 구조와 사운드를 포함한 곡.

물론 그런 노래가 몇몇 더 있었다. 원더걸스 의 ‘I Feel You’와 빅뱅의 ‘BAE BAE’. 거기엔 적어도 뭔가 해 붙이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원더걸스는 ‘프리스타일’이란 낯선 장르를 굳이 강조하며 악기를 들었고, 빅뱅은 능글맞은 섹스 코드를 희한한 뮤직비디오 속에서 마구 풀어냈다. 이런 인상적인 이름들을 지우고 나면, 지금 가요계는 대체 ‘타임라인’을 가늠하기 어렵다. 지금이 2016년 맞나? 과연 ‘썸’의 2014년인지, ‘응팔’의 1988년인지, ‘토토가’의 90년대인지.

가장 최근으로 돌아와, 2016년 1월 4일부터 1월 10일까지의 한 대형 음원 웹사이트 주간 차트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 응답하라 1988 > OST의 리메이크 곡인 한편 군데군데 신곡이 끼어 있는 모양새다. 당연히 과거를 주제로 한 드라마 수록곡에서 새로움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그 막강한 옛 노래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신곡의 노림수, 이른바 ‘셀링 포인트’ 자체는 < 응답하라 1988 > OST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미 가요계를 진작 휩쓸고 지나간 방식을 참조해, 과거 히트곡의 성공 사례를 재현하는데 승부를 걸고 있으니까.

수지의 ‘Dream’, 개리의 ‘또 하루’, 케이윌의 ‘니가 하면 로맨스’. < 응답하라 1988 >의 거센 바람에 밀리지 않고 최상위권에 포진한 세 곡의 신곡이다. 그중 가장 높은 순위인 수지의 ‘Dream’은 수지와 EXO 백현의 듀엣 곡으로, 적당한 ‘그루브’가 있는 알앤비 성향의 곡이다. 케이윌의 ‘니가 하면 로맨스’는 다비치와 함께 불렀다. 역시나 비슷한 장르의, 남녀가 주고받는 구성. 둘 다 충분히 정기고와 소유의 ‘썸’을 떠올릴 수 있는 노래다. 물론 그전에도 남녀 보컬의 듀엣 곡은 꾸준히 나왔지만, ‘썸’은 2014년을 집어삼킨 노래로 거대한 분기점이었으니까. ‘니가 하면 로맨스’는 좀 더 노골적이다. 아예 보도 자 료에 “‘썸’의 제작사단이 의기투합해 시선을 끈다”고 쓰여 있다. 개리의 ‘또 하루’ 역시 노래의 결은 좀 다를지라도, 널리 알려진 래퍼와 보컬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가 랩이 아닌 노래를 한다)의 협업이라는, 이미 익숙한 접근법으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소유와 기리보이의 ‘팔베개’, 가인과 재범의 ‘Apple’, 소유와 권정열의 ‘어깨’, 태연과 버벌진 트의 ‘I’, 매드 클라운과 진실(매드 소울 차일드의)의 ‘화’, 다비치와 매드클라운의 ‘두사랑’, 백아연과 래퍼 Young.K의 ‘이럴거면 그러지말지’, 산이와 백예린의 ‘Me You’, 박경과 박보람의 ‘보통연애’…. 2015년, 동일한 주간 차트 10위권 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듀엣 혹은 협업 곡들이다. (자주 겹치는) 가수와 제목의 면면만 살펴봐도, 노래의 색깔과 주제를 가늠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지금 가요계는 그저 2014년에 계속 머물러 있는 건가? 그 유행이 좀 오래가는군, 하고 말면 그만인가?

그렇게만 보기도 어렵다. 정기고와 소유의 ‘썸’은 노래로서의 성공과 별개로, 허를 찌르는 구석이 있었다. 저비용 고효율. 정기고는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실력(혹은 상품성)은 있지만 선발출장을 하지 못한 FA 선수였다. 그러다 주류 소속사와 계약을 했다. 소유가 ‘썸’을 부르는데 특별한 비용이 들 이유는 없었다. 이미 씨스타는 완성된 팀이었으니까. 걸그룹의 왕성한 기세가 하락세에 접어들 즈음, 굳이 큰돈과 공력을 들이지 않고도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새로운 방정식이 하나 완성된 것뿐이다.

한편 2015년 음원 차트에서 이런 ‘썸’ 유의 노래와 빅뱅, 원더걸스, f(x), EXO 정도를 지우면 가장 굳건히 남는 이름은 임창정이다. ‘또 다른 사랑’은 9월 22일에 나와서, 지금까지 차트 20위권에 있다. 새로워서인가? 새롭지 않아서 일 것이다. 유행의 관점이라면 한참 전에 가요계의 중심에 있던 형식의 노래. 이른바 ‘감성 발라드’. 그것이 돌아왔다는 것에 대한 반가움. 노래의 함량을 따지자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 가요계는 몇몇 거물이 빠져나가고 나면, 그야말로 텅텅 비는 무주공산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걸그룹은 무너졌다. ‘국민 그룹’은 없다. 한 팀의 걸그룹을 성공시키는 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게 어떤 계기로 올지도 모른다. 예지가 <언프리티 랩스타 2>에서 주목을 끌기 전까지, 피에스타는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f(x)처럼 재미있는 실험을 거듭하고 있는 레드벨벳 또한 상업적 성공만 놓고 본다면 100퍼센트 기대치에 만족했다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즉, 로엔 엔터테인먼트나 SM 엔터테인먼트같이 큰 회사에서 발굴한 아이돌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걸그룹, 혹은 좀 더 보수적이긴 하지만 보이그룹은 변신을 그 숙명으로 타고난다. 변신이 아니라면 확고한 콘셉트(혹은 세계관)를 잡고 그것을 완성시켜 나가거나. 그렇게 변신이나 콘셉트로 힘을 잔뜩 줬는데 맥이 빠지는, 유행에 잔뜩 뒤처진 노래를 부를 수 있나? 하다못해 소리의 ‘때깔’이라도 최신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팬덤은 분명 그게 좀 처음 보는 것이거나 이상해도 “우리 언니, 우리 오빠만의 것”을 원한다. 하지만 지금 같은 척박한 환경에선 그런 도전 자체가 효율을 따져봤을 때, 꽤 무모할 수 있다.

즉, 지금 가요계는(외부의 시선에서라면 케이팝은) 공동화된 상태에 가깝다. 혹은 힙스터가 모두 떠나간 번화가처럼 생기가 없다. 기세 좋게 넘쳐흐르던 물줄기의 흐름은 뚝 끊겼다. 가요 차트에 히트곡은 여전히 있다. 터보는 90년대에 자신들의 콘셉트를 쏙 빼닮은 곡을 들고 컴백했고, 싸이는 ‘GENTLEMAN’과 ‘Hangover’의 야심 대신 그의 말을 빌리자면 “대중가수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나팔 바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본 그가 이렇게 말한다. “애쓴다고 안 될 게 되지 않아. 걱정은 옆집 개나 줘버려. 에너지 모아 모아서 파도 한잔 돌리고. 신나면 허리 돌리고.” 과연 그러면 충분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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