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의 가장 치명적인 순간 – 1

그 여자가 웃을 때, 그 여자가 갑자기 빨리 걸을 때, 그 여자가 멍하니 있을 때, 그 여자가 말을 걸 때, 그 여자에게 대답하고 싶을 때…. 지난날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그 여자를 문득 마주쳤던 장면, 그리고 영원히 방부해버린 표정과 모습을 모았다. 여자 혹은 여배우를 기억하는 방식으로서 우리는 추억이 아니라 순간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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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 <마더> ━ 묘지에서 루즈를 꺼내 바를 때. 피해자의 장례식장에서 (살인용의자인) 아들의 무죄를 주장하다 된통 뺨을 맞고 돌아서는 길. 마더(김혜자)는 갑자기 멈춰 서서 루즈를 꺼내 바른다. 새끼손가락으로 찍어서. 입술을 한껏 벌리며. 그런데 그 입 모양이 마치 광대 같다. 히스 레저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의 조커도 스친다. 대체 저 여자는 뭐지? 모성이라는 게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생각한 봉준호 감독은 김혜자에게 기름때처럼 들러붙은 ‘한국의 어머니상’ 어쩌구 하는 이미지를 그렇게 비틀어 놓는다. 줄을 타는 것도 같고, 불을 지르는 것도 같은, 자다 일어나 웃는 애처럼 좀 모자라 보이는가 하면, 석상 밑에서 담배를 꺼내 물듯이 회고적이기도 한 이 아슬아슬한 여자. 김혜자라는 이름에는 계속해서 미스터리가 생겨 난다. 배우의 숙명이다.

심은하, <청춘의 덫> ━ 진주 목걸이를 선물 받을 때. 남자가 배신했다. 순정을 다했던 여자가 복수를 결심한다. 여자는 엎드려 우는 대신 거울 앞에서 요염한 표정을 짓는다. (복수를 위해 꼭 필요한) 다른 남자로부터 진주 목걸이를 선물 받는 장면. 과연 그녀의 복수가 더 철저히, 더 예쁘게 이루어지리라는 예감으로 충만한 순간. 지금 그 여자를 연기하는 배우가 해야 할 일은 단 한가지다. 너무너무 예쁠 것. 그 자리에 심은하가 서있다. 카메라가 잡은 것은 다만 심은하다. 유일한 핵심. 세상의 중심. 천상의 피조물. 그녀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다. 목걸이를 한 그녀가 웃는다. 복수는 그녀의 것.

혜리, <응답하라! 1988> ━ 외출하기 직전 거울을 볼 때. 어디선가 본 여자애. 분명히 쟤를 안다. 1988년 쯤, 다녔던 학교에서, 그 앞 분식집에서, 등교길 시내버스에서, 훗날 앨범 속에서,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1988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은 1994 년생 혜리가 거울 앞에서 김완선의 ‘기분 좋은 날’에 맞춰 청 재킷을 입고 앞머리를 빵 띄우며 스프레이를 치익 뿌릴 때, 그건 ‘추억’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된다. 어디선가 본 여자애, 분명히 아는 여자애 성덕선(혜리)은 그렇게 ‘옛날’이 아니라 바로 ‘여기’로 걸어온다. 그애는 무슨 말을 할까? 그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혜리가 연기를 잘해서라는 말은 택도 없이 부족한 말이다. 혜리에게는 바위를 든 헤라클래스도 무 색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있다. 예술 아니라 스포츠로도 안 되는 샘솟는 원천이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혜리는 연기를 한다기보다 힘을 낸다. 아니 힘이 난다. 그걸 누가 이겨? 그걸 어떻게 이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기도 모르게 청바지를 입는다. 기분 좋은 날이다.

김옥빈, <유나의 거리> ━ 운동화를 신고 거리를 달릴 때. 유나(김옥빈)는 소매치기. 그녀가 믿는 것은 거리의 룰이다. 거리의 도리를 바로 알고 정의를 구현할 것. 그러다 결심하면 주먹이 먼저 나갈 지도 모른다. 어떤 용맹함 그리고 안간힘. 길가의 강아지풀처럼 어디서나 스스럼없는 유나는 예쁜 척을 못한다. 아마 예쁜 줄은 알 것이다. 하지만 그걸 무기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쪽팔려서.’ 그러니 다 됐고, 유나는 달린다. 잡기 위해. 잡히지 않기 위해. 머리를 질끈 묶은 김옥빈이 앞으로 달린다. 발이 재고, 보폭이 대담하다. 큰 눈은 더 커진다. 눈알에 닿는 바람이 시원하다. 세계가 다 열리는 것 같다.

최명길, <그 여자> ━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들길을 걸어갈 때. 최명길은 말하자면 ‘형’의 여자 같았다. ‘내’가 상대하기에 그녀는 지나치게 우아하고 지나치게 관능적이었다.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 사람들>과 김홍준 감독의 <장미빛 인생>을 거치며 최명길은 더없이 농밀한 색을 냈지만, 시시하 게시리 ‘섹시’ 따위에 붙들리지 않았다. 색을 내면 낼수록 주변은 오히려 스산해졌으니, 1990년 9시 뉴스가 끝나고 <그 여자>가 방영될 때면, 시골로 시집온 도시 여자가 들길을 걸어가는 모습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분위기’가 거기에 머무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쇼팽의 왈츠가 흘렀고, 부풀린 단발머리로 최명길이 대청에 앉아 마시는 커피는 커피 광고에 나오는 커피보다 더 분위기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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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고은, <사랑과 야망> ━ 슬립 차림으로 요가 매트에 앉을 때. 서울 사는 여배우 김미희의 본명은 김미자(한고은)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지나는 한국. 누구의 삶인들 파란만장하지 않았을까 싶은 시절에 그녀는 순천에서 나고 자라며 한 남자를 사랑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자리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 자리가 채워지지 않는 건 배우라는 화려한 이름으로도 마찬가지. 미자는 갈구한다. 끝이 없다. 구멍은 자꾸만 생긴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남편이 있고, 영화가 있고, 아들이 있고, 집과 차와 선생님과 가정부도 있지만, 모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자는 강하지 않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자주 운다. 그녀는 요가를 배운다. 얼마쯤은 떨칠 수 있을 거라 스스로를 부축하면서.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달래면서. 하지만 오늘 밤 잠들지 못했다. 한국에서 실크 슬립이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 한고은이 매트 위에 가부좌를 틀며 앉는다. 운다.

정영숙, <청춘의 덫> ━ 쇼파에서 가정부를 부를 때. 정영숙에겐 유난히 검은 베일이 어울린다. 마스카라도 모피도 다이아몬드도 어쩌면 모두 그녀의 차지다. 당연지사, 그런 것들에 어울리는 행동은 아무 때나 부리는 신경질이다. 권태와 짜증, 불만과 허무, “누가 내 속을 알아?” 싶은 마음. 그녀는 외롭고 화려하고 지쳤고 수시로 화가 난다. 진정 사랑했다고 믿고 싶은 남편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자식은 성에 차기는커녕 기막힌 짓만 골라 한다. 결혼하겠다며 데려오 는 상대들의 꼴이라니…. 상처투성이 그녀가 의지할 곳은 한 군데뿐이다. “아줌마~.” 대본에 없어도 그녀는 자동으로 부를 수 있다. 동물이 제 울음을 울듯이 아줌마를 부를 수 있다. “네, 사모님.” 아줌마가 열일 제치고 그녀에게 달려온다. 그 잠깐 동안 그녀에게 평화가 깃든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이영애, <불꽃> ━ 침대에 앉아 카드를 읽을 때. 어쩌다 결혼까지 하게 됐지만, 영 마음이 환해지지는 않던 남자가 카드를 줬다. 한 장이 아니라 아예 쇼핑백에 가득 담아서. 드라마 작가인 박지현(이영애)은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는 식이 마음에 안 든다며 방으로 들어와 카드를 펼친다. 그리고 느닷없이 웃음이 터진다. 이미 멈출 수 있는 웃음이 아니다. 배가 땅기도록, 땅겨도 너무 땅겨서 아파도 어쩔 수 없는 웃음 이다. 여자에게 (그것도 작가씩이나 되는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카드 한 장에 한 단어라도 간신히 쓴 이 남자가 ‘귀여워서’ 박지현은, 이영애는 진짜로 웃는다. 이영애라는 그 이름값 때문인지 자꾸만 거한 컨셉트가 그녀를 둘러싸지만, 그냥 멍하니 있을 때, 대사와 대사 사이가 지문조차 없이 비었을 때,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일 때, 그렇게 무방비일 때, 이영애는 그때가 진짜 이쁘다.

문소리,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 참치집에서 참치를 먹을 때. 늘어뜨린 생머리, 트임이 깊은 스커트, 구두는 당연히 하이힐, 때때로 손바닥만한 부채. 무슨 저런 대학이 다 있나 싶은 어느 지방 대학의 염색과 교수인 조은숙(문소리)은 절름발이다. 그녀는 (극중 지방 방송국 피디(박원상)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리까지 저니까 더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 흔한 말로 이 여자는 ‘허세가 쩌는’ 스타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은숙은 누구한테 보이기 위해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꾸미지 않는다. 조은숙은 원래 그런 여자다. 그녀가 젓가락으로 참치를 집어먹는다. 입을 옹다물고, 종종종 씹는다. 노란 무도 한 점, 붉은 생강도 한 점. 부위가 ‘아카미’인 듯한 참치도 또 한 점. 성욕과 식욕을 넘나드는 미묘한 관계쯤은 아무래도 좋다. 다리까지 저는 여자가 능란한 젓가락질로 참치를 먹을 때, 말은 되려 거추장스럽다. 그 장면에 <하하하>의 왕성옥(문소리)이 횟집에서 소주를 마시는 장면을 겹치면, 실로 굉장한 여자가 나타난다. ‘굉장한 여자’라는 말에 합당한 배우로 문소리 말고 또 누가 있으려나.

160114 GQ 063

김용림, <인생은 아름다워> ━ 남쪽 바다를 보며 ‘서귀포 사랑’을 부를 때. 아침마다 새로 쪽을 진다. 누군가의 할머니,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침마다 그러셨던 것처럼. 어머니(김용림)는 제주도 송악산 언저리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서 아들들과 손주들과 함께 살지만, 마당을 사이에 두고 밥은 따로 차려 먹는다. 제주의 오랜 풍습이 그렇기 때문이다. 드라마 첫 회, 복닥복닥 온갖 캐릭터가 자기 소개를 하느라 분주한 시간. 카메라는 갑자기 언덕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어머니를(김용림) 잡는다. “님 떠난 밤 부두에~ 울며불며 새울 때~ 칠 십리 해안선을 서리서리 서린다, 서리서리 서린다~.”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딱히 무슨 일 때문은 아니다. 잔정이 많은 막내아들(윤다훈)이 옆에 앉아 엄마의 팔을 주무르며 노래를 같이 부른다. 그 장면을 보면서 과연 인생은 아름다운 뭔가가 아닐까 생각하는 건 자연스럽다. 애달픈 지난날이, 구비구비 고단한 삶이, 또한 남아 있는 나날이 못내 아름답다. 강직한 몸, 둘러싸는 음성, 말뚝처럼 붙잡는 힘, 김용림은 이 나라, 이 시대의 보배다.

배종옥, <여자의 방> ━ 전화를 받다가 거치적거리는 귀고리를 뺄 때. 1991년, <행복어사전>과 <도시인>에 잇달아 출연하면서 배종옥은 당시 일하는 도시 여성의 표상처럼 떠올랐다. ‘할 말은 하는 여자’가 주요 골짜였다. 할 말을 하는 것뿐인데 그게 무슨 대단한 변화라도 되는 양 취급 당하던 시절.(당시 관련 신문 기사를 보면 유난히 ‘할 말은 하는 여자’라는 표현이 잦다.) 짧게 쳐올린 커트 머리를 하고서, 자유로운 듯 덤벙대지만 결국 ‘도련님’ 같은 남자(두 번 모두 최수종)와 옥신각신하던 그녀가 1992년 <여자의 방>에서는 의류회사에 다니는 디자이너로 나온다. 여전히 ‘할 말은 하는’ 여자인 채, 이전과 다르다면 커트 머리에 바지 차림이 아니라, ‘언밸런스 단발머리’에 패션과 스타일을 즐기는 여자라는 점이다. 이름은 다소 중성적인 한영진. 그녀는 어느 날 부드러운 블라우스에, 높은 힐에, 큼지막한 귀고리를 달고 출근한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는 날 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와 수화기를 드니 대번 귀고리가 거치적거린다. 할 말은 하는 여자 한영진은 할 일도 하는 여자라서 그깟 귀고리쯤 얼른 빼버린다. 구두도 확 벗어 던진다. 그 장면을 어디까지나 ‘페미니즘’ 적인 관점으로 바라봐도 좋을까? 사실, 그 즈음 배종옥이라는 배우가 선보인 캐릭터와 연기의 맥락이 그랬다. 1990년대 초, 한국 드라마에는 ‘할 말은 하는 여자’ 배종옥이 있었다. <여자의 방>을 쓴 주찬옥 작가는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도 썼다.

고현정, <여자의 방> ━ 늘어진 소매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 이름은 윤희수(고현정). 나이는 20대 초중반. 집에서 개인용 PC로 번역 일을 하는 그녀는 한눈에 맑고 깨끗하고 조심스러운 여자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서 보면 왕성한 호기심에, 엉뚱한 반항기에 어딘지 의뭉스런 구석까지 있다. 대낮에 동네 놀이터에서 누가 보거나 말거나 키스를 할 정도로(당시에는 정말 파격적인) 대담하기까지. 아직 <모래시계>(1995)에 출연하기 전이었던 고현정은 이 청순한 듯 능청스런 여자애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치렁치렁 긴 치마와 쭈욱 늘어난 긴 소매를 택한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는다. 어쩌다 개그맨 김영철이 고현정을 흉내 낼 때 하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동작은 이 드라마에서 윤희수가 가장 많이 하는 제스처였다. 한영진이(배종옥) ‘할 말은 하는 여자’로서 달라진 현대 여성의 면모를 선보이는 동안, 고현정은 누구보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려는 여성을 연기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여성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 여배우의 가장 치명적인 순간 – 2 (윤여정, 김고은, 김희애, 손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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