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의 가장 치명적인 순간 – 3

그 여자가 웃을 때, 그 여자가 갑자기 빨리 걸을 때, 그 여자가 멍하니 있을 때, 그 여자가 말을 걸 때, 그 여자에게 대답하고 싶을 때…. 지난날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그 여자를 문득 마주쳤던 장면, 그리고 영원히 방부해버린 표정과 모습을 모았다. 여자 혹은 여배우를 기억하는 방식으로서 우리는 추억이 아니라 순간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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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민,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 ━ “나한테 사과해요”라고 외치는 강칠을 바라볼 때. (청순하다는 말이 한지민에게는 굴레일지 몰라도) 한지민이 가장 청순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이 클로즈업 됐을 때다. 강칠(정우성)이 지나(한지민)를 향해 어눌하지만 억울한 마음을 분출할 때 한지민은 대사 한마디 없이 강칠의 눈만 바라봤다. 강칠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면서도, 되려 화를 내는 강칠이 당황스러우면서도, 고백 아닌 고백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하는 눈빛이 화면에 그렁그렁 가득 찼다. 실제로 이 장면에서 한지민의 눈에 정우성이 비친다. 자꾸만 TV 앞으로 더 당겨 앉게 된다.

송선미, <골든타임> ━ 돌아온 남자에게 화난 듯 다정하게 대할 때. 신은아(송선미)의 완벽에 가까운 부산 사투리는 글로 옮기기가 참 힘들다. 존댓말을 쓰는 신은아의 말은 어미나 단어 자체는 표준어에 가 깝지만 억양만 사투리인 ‘요즘 사투리’이기 때문이다. <골든타임> 9회, 응급 환자의 수술 때문에 인혁이 급하게 병원으로 돌아온 걸 보고 은아는 “이렇게 부른다고 쉽게 올걸, 사표는 왜 내셨어요?”라고 분명한 사투리로 묻는다. 어쩐지 화도 좀 났다. 그래서 캐나다 갈 준비 잘하고 있냐는 인혁의 말에 소리를 빽 질러 답한다. “네! 교수님은요? 갈 자리는 정하셨어요? (인혁의 전화가 울리자) 전화 받으세요.” 이게 애정 어린 말이라는 건 부산 사람이 아니어도 은아의 표정으로 알 수 있다. 이 짧은 대화를 그 어떤 장면보다 로맨틱하게 만든 건 송선미다. 그녀의 목소리와 말투다. 이런 송선미를 두고 ‘조연’, ‘서브 여주’ 같은 단어를 붙이는 건 정말이지 아무 의미 없다.

한효주, <광해> ━ 안뜰에 가만히 서있을 때. 안뜰에 나와 선중전(한효주)의 얼굴에서 음영이 완전히 사라졌다. 흰 피부와 검은 눈 그리고 쪽진 머리만 선명했다. 눈두덩이에 그 흔한 살구색 섀도조차 바르지 않은 채, 피부색으로 번져가는 듯한 입술 색을 한 채,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광해> 속 중전의 얼굴은 내내 새벽빛을 정면으로 받은 것처럼 차가웠다. 그게 생김새로 완성될 분위기와 장면이었다면 한효주보다 더 예쁜 배우가 물망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주변 음을 소거한 듯 내뱉는 숨소리와 정지 된 듯 움직이는 몸짓은 한효주만이 만들 수 있는 그 순간의 에너지였을 테다.

이휘향, <달빛가족> ━ 김승진이 ‘형수님의 노래’를 부를 때. ‘건전가요’가 의무적으로 삽입되던 시대는 끝났지만 세상은 금세 바뀌지 않았다. 부모님을 여의고 다섯 형제가 끈끈하게 뭉쳐 살아가는 가정을 중심으로 했던 89년 드라마 <달빛가족>에 당대의 아이돌 가수 김승진이 막내이자 가수 지망생으로 출연해 무척 건전한 노래들을 불렀다. 김창완이 작사, 작곡한 노래들로 드라마 삽입곡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큰 인기도 끌었다. 그중에서도 ‘형수님에게 바치는 노래’는 충격적이었다. ‘형수님’은 이전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 형태의 여자였고, 그녀는 이렇게 애잔하고 그윽한 노래를 바치는 존재였다. 김승진이 이휘향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그녀가 지었던 미소가 생각난다. 당시의 음반을 들으면 항상 마지막 곡인 ‘건전가요’가 나오기 전에 멈추겠지만 이 곡은 다를 것이다. 건전한 마음은 누가 만들어줄 수 없다.

신세경, <지붕 뚫고 하이킥> ━ ‘학교 냄새’에 관해 말할 때. 세경이(신세경)는 준혁이(윤시윤)네서 ‘식모살이’ 중이다. 준혁이 낡았다고 버린 체육복을 입고, 사물함 덕분에 가방 없이 등교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준혁이 가방을 놓고 간줄 알고 학교에 쫓아간 세경은 학생으로 오인되어 뜻밖의 학교생활을 한다. 체육시간에 뜀틀을 뛰고, 점심시간에 급식을 먹는, 넌 밥도 안 먹느냐는 대꾸처럼 굳이 설명하려면 화가 날 것 같은 평범한 시간. 그리고 준혁과 나란히 앉아 세경은 말한다. “학교 냄새 너무 좋다.” 학교 냄새라는 게 있냐고 되묻는 준혁에게 다시 말한다. “뭐라고 해야 되지? 먼지 냄새라고 해야 되나? 학교에서만 나는, 오래된 책이나 가구에서 나는 냄새 같은 거 있잖아요. 시간이 흘러도 학교가 변해도 그 냄새는 똑같은 것 같아요.” 잘 모르겠다는 준혁을 두고 세경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덧붙인다. “나도 학교 다닐 땐 잘 몰랐어요.” <지붕뚫고 하이킥>이 인간적 불행을 다루는 방식과 함께 신세경이 인간적 결핍을 연기하는 방식이 끔찍이 황홀한 순간이었다.

김태희, <천국의 계단> ━ 김태희가 권상우를 빌려줄 때. 극단적인 연기의 만찬 같은 작품이었다. 선과 악이 출근과 퇴근처럼 분명한데, 선한 쪽도 악한 쪽도 각각의 방향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김태희의 악역 연기는 좀 특별했다. 미모와 윤리 사이에서 흔들리게 한다는 점에서. 김태희의 연기는 “눈을 부라린다”는 지문이 대본에 얼마나 많은지 확인해보고 싶게 만든다. 그녀의 역할은 증오할 만했고, 그녀의 연기는 부족했다. 그런데 그 마땅한 순간에 감탄이 나왔다. ‘나쁜 년’이라면서 한 번 더 보고 빈정대고 돌아서면서 다시 봤다. 한정서(최지우)가 기억을 되찾자 차송주(권상우)가 결혼을 선언하는 드라마의 후반부, 한유리(김태희)는 어머니에게 악녀의 기운을 받아 이렇게 말한다. “지금 너 송주 오빠 다 차지한 거 같지? 송주오빠 돌아오게 돼 있어. (중략) 불쌍해서 잠시 빌려주는 셈 치면 되지 뭐. 그 대신 깨끗하게 쓰고 돌려줘.” 살다 보니 세상에는 반납이 더 기다려지는 대여도 있었다.

윤소이, <굿바이 솔로> ━ 잘 때. 물론 윤소이는 예쁘다. 하지만 그녀를 뜯어보면 거의 완성에 이르러 손을 놓은 두상 같다. 예쁘지만 좀 투박한 조각 같은 정수희(윤소이)가 자고 있다. 그녀에게 다가와 입 맞추는 사람은 약혼자의 가장 오래된 벗이다. 이 입맞춤으로부터 모든 게 뒤틀린다. 그녀는 뒤틀린 부분을 되돌려놓으려고 애쓰기보다 뒤틀린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두 사람은 잠들기 직전, 사람의 마음이 참 허약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들의 부모와 세상의 온갖 어른들이 그 근거였다. 사랑 앞에서 흔들리고 마음이 약한 건 나이가 들어도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전 세대로부터 그 다음으로 나아갈 작정이다. 윤소이의 얼굴은 아무리 고약한 운명이더라도 뭐든지 가리지 않고 직접 부딪혀 뚫고 나아가려는 여자의 굴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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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원, <극장전> ━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 “내가 너 첩 해줄까?” 이 대사를 치기이든 능청이든 분류할 수 있을까? 홍상수 영화 속 인물의 대사라는 설명이 더 가까울 것 같다. 오래전 좋아했던 남자와 우연히 만나 단둘이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엄지원이 말한다. 노골적이지만 순정어리고, 솔직하지만 좀 징그러운 말. 엄지원이 이 말을 할 때, 술집에서는 도원경의 ‘다시 사랑한다면’이 흐른다. 그리고 그녀는 이어지는 노래방 장면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못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잘 부르려는 마음보다 ‘다시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는 노래랄까. 사랑스럽고 민망하고 웃기다. <극장전>은 영화를 본 사람이 영화와 무관한 시간을 보내지는 않지 않을까, 하는 가정에서 출발한 영화다. 사람들은 방금 전 그 노래를 들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지금 막 생각난 것처럼 어떤 노래를 부르곤 한다. 홍상수는 이 과정을 낱낱이 아느냐기 보다 그 빤한 인간을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나영, <아는 여자> ━ 울먹이면서 항변할 때. 동치성(정재영)은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내일이 없을 것처럼 산다. 오진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허탈하고 화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 술을 들이부으면 광기가 깃드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아는 여자’와 ‘사랑하는 여자’ 사이에 있던 한이연(이나영)에게 화풀이를 한다. “너, 나 사랑하냐? 관심 있냐? 잘 모르겠냐?” 동치성을 오래도록 은밀하게 좋아했던 한이연은 대답한다. “왜 나한테 그렇게 얘기해요.” 이나영은 여기에서 글의 한계를 보여주는 연기를 한다. 어린아이가 호소하는 듯한, 간절한 것과 억울한 것의 교차가 그 떨리는 말에 담겨 있다. 이 당황스러울 만큼 황당한 연애담이 이나영의 호소로부터 문득 또렷해진다.

이미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방에서 울 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S사대부중 3년생 O양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이미연이 연기한 이은주는 실화처럼 전교에서 수위를 다투는 우등생이지만, 입시에 관한 압박감과 성적 하락을 비관해 자살한다. ‘입시지옥’이라는 말이 그리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던 학력고사 세대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입시지옥에 문제의식을 갖고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대의 청춘스타인 최수지가 나왔고, 이미연이 나왔다. 이미연은 이 영화에서 ‘예뻐야 할 것’이라는 주문만 받은 것 같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뭘 해도 흐트러짐 없이 예뻤다. 당혹스러운 부분은 자살하기 직전, 방 안에서 그녀가 우는 신이다. 카메라는 너무 심하게 울어서 눈물이 양말까지 흘러내려가는 장면을 오래도록 보여준다. 지금 보면 웃기기까지한 이 과장이 통했던 것은 우는 사람이 이미연이기 때문이었다.

송혜교, <순풍산부인과> ━ 미선과 미달이를 사이에 두고 다툴 때. <가을동화>의 송혜교는 낯설었다. 오지명의 딸 오혜교는 꼭 필요한 말만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오혜교는 항상 누군가와 싸웠다. 큰언니인 미선은 물론이고, 미달이 같은 어린애도 예외는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잔소리를 쏟아내는 식이었다. “툭하면 큰소리야, 재수없게”처럼 센 말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오혜교는 밉지 않았다. 하얀 피부와 도톰한 분홍빛 입술, 시선을 확 끄는 가슴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엔 좀 모호했지만 <가을동화> 이후의 송혜교를 보면서 답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이후의 송혜교는 식물 같지만, <순풍산부인과> 시절의 송혜교는 동물에 가깝다. 젊음의 그 통제불가능한 생기에 매혹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도연, <밀양> ━ 교회 의자를 내려칠 때. 신애(전도연)는 남편을 잃었다. 어린아이와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내려왔지만, 아들마저 살해당했다. 대신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에게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 신애는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서하려고 교도소 에 찾아갔다. 유괴범은 신애에게 말한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신애는 교도소에 서 나오자마자 쓰러진다. 집에서 죽은 아이의 웅변 소리를 두 번 듣다, 교회로 찾아간다. 교회 의자에 앉은 신애. 눈치를 보다 의자를 탁, 탁, 탁, 탁, 탁, 탁 빠르게 손으로 내려친다. 더 세게, 더 빠르게, 멈추지 않고 치면서 힘주어 십자가를 바라본다. 자신도 모르게 비집고 나오는 신음. 울분, 분노, 노여움, 증오, 표현할 수 없는 응어리 그 무언가가 아주 짧게 스친다. 본격적인 파멸의 신호이자 신과 대적하는 장면. 신애는, 그러니까 전도연의 연기는 마땅히 신과 마주할 만하다.

>> 여배우의 가장 치명적인 순간 – 4 (최지우, 심은하, 신세경, 김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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