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의 가장 치명적인 순간 – 4

그 여자가 웃을 때, 그 여자가 갑자기 빨리 걸을 때, 그 여자가 멍하니 있을 때, 그 여자가 말을 걸 때, 그 여자에게 대답하고 싶을 때…. 지난날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그 여자를 문득 마주쳤던 장면, 그리고 영원히 방부해버린 표정과 모습을 모았다. 여자 혹은 여배우를 기억하는 방식으로서 우리는 추억이 아니라 순간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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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지, <응답하라 1997> ━ 공개방송에서 ‘전사의 후예’ 안무를 따라 할 때. 누군가를 사랑하는 눈은 저런 걸까? <응답하라 1997>의 첫 회, 중반부까지 거칠고 장난스럽기만 했던 정은지가 도대체 흔들림 없는 눈으로 무대를 응시하며, ‘전사의 후예’의 춤을 따라하고 따라 부른다. 그녀는 진지하고 확신에 가득 차 있다. 팬은 아주 잘 알고 익숙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정은지는 연기 선생님은 가르쳐주지 않았을 그 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녀의 춤을 보면서 무엇에 관한 것 인지 모를 용기가 솟아난다.

최지우, <올가미> ━ 앞머리는 두 갈래로, 뒷머리는 반만 묶었을 때. 제일 예뻤을 때로 꼽은 건 아니다. 오히려 요즘 최지우의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얼굴도 충분히 반가우니까. 하지만 스물셋의 최지우, 그러니까 그녀가 스크린에 처음 주인공으로 등장했을 때 그동안의 한국 여배우와는 전혀 다른 선을 지니고 있었다. 큰 키, 얇고 긴 팔다리, 리코더 같은 목, 움푹 파인 쇄골은 ‘서양적’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여리여리하고, ‘동양적’이라고 말하기엔 쭉쭉 뻗어 있었다. 좁고 길쭉한 얼굴에 앞머리는 양옆으로 내리고 뒷머리는 하얀색 집게핀으로 반만 묶거나, 혹은 질끈 묶으니 어디서도 못 보던 부류의 미녀 같았다. 한데 그 어여쁜 머리를 한 수진(최지우)을 아들에 미친 시어머니가 한 움큼 쥐고 욕조로 끌고 가서 물에 적신다. 수진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을 토해낸다. 그녀의 에너지도 장면을 뚫고 나온다. 영화는 철저하게 시어머니 진숙(윤소정)의 광기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 기운의 합을 맞추는 건 최지우의 리액션이다. 그녀의 메마른 몸이 차가운 바닥으로 나뒹굴 때 날카로운 선이 장면 안에 가득하다. 섬뜩하면서 아름답다.

심은하, <백야 3.98> ━ 모스크바를 돌아다니며 러시아말을 할 때. 심은하의 작품 중에서 <백야 3.98>은 가장 초라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성대하게 시작했지만, 최악의 드라마로 꼽히며 끝났으니까. 그럼에도 <백야 3.98>의 심은하가 아나스타샤란 이름으로 모스크바의 아름다운 지하철에서 내려 엄청나게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 ‘DAEWOO’ 간판을 뒤로하고 눈 덮인 모스크바 시내를 검정 베레모를 쓰고 걸어 다닐 때. 그리고 그녀가 (잘할 리 없는) 러시아말을 뱉었을 때의 충격은 ‘브라운관’ 앞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게 생소해보였다. 심은하의 얼굴도 덩달아 고립되었을까? 드라마는 시청률 저조로 끝났지만, 심은하를 걱정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정확히 1개월 후, <청춘의 덫>이 시작됐다. 심은하는 완벽하게 우아해지기 직전에, 러시아에 있었다.

이제니, <남자셋 여자셋> ━ 김진과 데이트할 때. 발랄한 유학생 역엔 영락없이 이제니였다. <공룡선생>과 <LA 아리랑>에 이어 <남자셋 여자셋>에서 이제니는 비로소 만개한다. ‘꿀벅지’, ‘베이글녀’, ‘몸짱’ 같은 말은 태어나지도 않았던 때, (극중) 여대생 이제니의 몸은 은근히 카메라를 육박해왔다. 1996년 <경향신문> 기사엔 이렇게 쓰여 있다. “가끔 친구들은 ‘넌 정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글래머야’라며 그녀의 몸매를 부러워한다. (중략) 평소에는 청바지에 스웨터 등 캐주얼한 스타일을 즐기고 몸매선을 드러내는 타이트한 차림은 피한다.” 대학생이라는 말과 글래머란 말 사이에 교차점이 거의 없던 때, 그런 이제니는 동시에 ‘톡톡 튀는’ 대학생이기도 했다. 하필 상대역은 깡마르고 썰렁한 ‘안녕맨’ 김진. 구박하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고, 용서하고, 달래고, 관계를 이끌고 그를 껴안는 이제니로부터 “나도 대학교 들어가면” 이란 가정으로 시작하는 싱거운 남자들의 말이 무수히 쏟아졌다.

전지현, <별에서 온 그대> ━ 침낭에서 못 나와, “익스큐즈미?” 할 때. 배우가 캐릭터와 완벽히 겹칠 때 연기에 대한 평가는 사실 무의미하다.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만큼 <별에서 온 그대>의 한송이는 전지현 이외에 다른 대안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캐릭터다. 발랄함, 싱그러움, 엉뚱함의 교집합에 너무너무 예쁜 얼굴이 더해지면 드라마 속에서 뭔 짓을 해도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까지 동의하는 전지현 그 자체가 된다. 이때 그 파급력은 모든 광고를 싹쓸이한다. <별에서 온 그대>에선 특히 모든 걸 내려놓(을 것 같지만 결국 예쁘게 웃)는 연기가 드라마에 활기를 주는데, 이는 바로 이전 작품인 <도둑들>의 예니콜의 쾌활함이 근거가 된다. 도민준을 간호하기 위해 침낭 속에서 못 나오고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됐으니까 나가”라는 말에 “익스, 익스큐즈미?” 라고 말한 뒤 끊임없이 계속 말을 이어가는 장면은 오직 전지현만이 할 수 있는 억양, 말투, 톤이다. 그녀, 예니콜, 한송이와 같은 캐릭터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고, 아마도 전지현은 그 역할에 1순위 후보일 것이다.

엄정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 솔잎주를 두 병째 시킬 때. 연희(엄정화)와 준영(감우성)의 첫 만남. 낮은 상을 앞에 두고 준영은 차를 마신다. 연희는 술을 마신다. 아까 밥 먹을 때는 맥주 한 잔도 사양하더니…. 솔잎주 한 병을 혼자 비우고 새로 주문하며, 인어공주처럼 한쪽으로 포개뒀던 다리를 양반다리로 바꿔 앉는다. 그렇게 몸이 풀리고, 말문이 트인다. “사실 (아까 같이 본) 그 영화 본 거예요. 그저께도 선봤거든요.” 맘에도 없는 걸 묻고 또 물어 준영이 “그녀는 서른일곱 번째 혹은 서른여덟 번째 맞선 나온 여자처럼 굴었다”라고 묘사한 연희가 진짜 자기 말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한 달 사이 만나본 남자만 열명이 넘어요.” 그리고 술집에서 나온 연희는 비틀거리면서도 잘 걷고, 보블헤드 인형처럼 머리를 까딱거리면서도 먼저 다가가진 않는다. 그러며 묻는다. “전철 끊겼겠죠. 어쩌죠?”, “어디 가요?” 같은 맘을 다른 말로 딱 두 번. 거기서부터의 엄정화는 당해낼 수가 없다.

김부선, <말죽거리 잔혹사> ━ 현수야, 부를 때. 못잊어 떡볶이.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김부선이 운영하는 떡볶이집의 이름이다. 현수(권상우)는 실패한 짝사랑을 잊기 위해서인지, 떡볶이를(어쩌면 김부선을) 잊지 못해서인지 영업이 끝난 한밤중에 그곳으로 향한다. 만날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도 없이 혼자. “어머 현수야.”, “현수는 얼굴이 많이 빠진 것 같다.”, “현수 보니까 옛날 생각 많이 난다.”, “현수도 하고 싶은거 해.” 김부선은 줄곧 현수의 이름을 부른다. 다른 친구들에겐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수의 이름을 부를 때 유독 그 반 박자 느리고 짙은 목소리가 더욱 낮게 깔린다. 얼굴만 기억해도 신이 나서 자꾸만 찾게 되는 것이 단골집인데, 홀리듯 그 가게를 찾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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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희, <무릎과 무릎 사이> ━ 자영의 얼굴과 몸이 화면을 가득 채울 때. 이 여자의 얼굴은 아무 곳, 어떤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게 아닐까? <무릎과 무릎 사이>는 1984년에 개봉했다. 하지만 어느 시대라도 기준이 되었을 것 같은 세련, 저토록 모던한 얼굴, ‘분위기’보다 ‘무드’라는 단어가 더 차지게 어울리는 생김…. 하지만 그렇게까지 예쁜 여자이기 때문에, 그대로 그 시대에 갇혀서 끝까지 삶과 불화할 것 같은 여자이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이장호 감독은 <무릎과 무릎 사이>에 등장하는 모든 섹스 신에서 자영의 얼굴에 집중한다. 거의 모든 역할을 그녀의 달뜬 표정이 해낸다. 몸은 의도치 않은 부분에서 갑자기, 적나라하게 눈에 띈다. 시작과 동시에 캐미솔 차림으로 침대에서 바로 앉는 모습에선 ‘여자 몸이 원래 저런 걸까?’ 싶을 정도로 가냘프게 하늘거린다. 알몸으로 엄마와 대면하는 장면에선 작고 동그란 입으로, 그녀의 과거를 추궁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왜 이래요! 상대가 궁금해요? 그래요, 어머니 말이 맞아요. 그러나 한 명이 아니고 여럿이에요. 이제 속이 시원하세요?” 그럴 때 자영의 알몸에 꽂히는 시선이란 그저 무력하다. 참 작고, 하지만 여리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누구라도 한 번은 쥐고 싶은 양감. 다른 장면에서, 남자들은 자영의 무릎과 허벅지를 한 손에 꽉 쥐고 놓지 않는다. 순간 꺾이는 목, 동그란 모양으로 터지는 탄성. 좀 과장됐다 싶은 표정도 그 모던한 얼굴 위에서는 설득력을 얻는다. 격한 표정, 도드라지는 뼈와 살, 일부러 놓아버린 것 같은 초점…. ‘설득력’이라고 점잖게 얘기할 일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이보희의 얼굴과 몸은 정말이지 섹시하니까. 32년이라는 시간조차 머쓱하게, 그녀의 얼굴과 몸 앞에서 한동안 머물다 지나가니까.

고소영, <비트> ━ 2년 만에 민을 만났을 때. 로미(고소영)는 2년 만에 민(정우성)에게 삐삐를 친다. “2년 동안 맨해튼에 쭉 있었어. 센트럴 파크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이야. 내가 왜 뉴욕을 좋아하는 줄 아니? 누구도 타인의 사생활에 신경 안 쓴다는 거야. 노바디 케어스. (중략) 온리 인 뉴욕. 뉴욕에서만 가능한 일이지.” 친구의 자살에 충격을 받아 정신병원에서 시간을 보낸 로미는 다시 만난 민에게 그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한다. 턱을 들고 눈을 과장스럽게 깜빡거리거나 굴리며 팔짱을 낀 채로. 그렇게 ‘오그라드는’ 얘기를 누구보다 도회적인 얼굴로 또박또박(하지만 좀 부자연스럽게) 말한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의도한 듯 번갈아 나오는 고소영과 정우성의 얼굴이야말로 과연 아름다운 청춘인지라(로미가 긴 생머리로 화장을 하고 나오는 첫 장면이기도 하다), 과연 저 연기가 어색한게 맞긴 한 걸까, 거짓말하는 장면이라 그리 들리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게 그냥 로미의 말투인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민은 문어체로 이렇게 말한다. “정말 로미가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단 한 번도 지 워진 적이 없었던 로미. 로미가 지금 내 앞에 있다.” 로미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던, 1997년.

이은주, <번지점프를 하다> ━ “버스 정류장까지만 좀 씌워주시겠어요?”할 때. 이은주의 목소리는 높고 선명하다. 하지만 조금만 힘주어 말하면 이내 갈라지거나 수수깡처럼 부스러질 것만 같다. 그 목소리를 두고 “섹시하다”고 부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좀 신경질적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번지점프를 하다 >속 태희(이은주)는 야무지고 명료한 여대생의 모습을 목소리로 먼저 드러낸다. 인우(이병헌)의 우산 속으로 뛰어든 태희가 “죄송하지만 저기 버스 정류장까지만 좀 씌워주시겠어요?”라고 묻는 장면은 귀로 먼저 기억된다. “씌워주시겠어요?”의 정확한 발음과 부드럽고 깔끔하게 올라가는 억양, 그리고 절대 흐트러질 수 없다는 듯 착 달라붙는 목소리…. 인우와 태희가 17년이 지나 다시 기차역 앞에서 만났을 때는 태희가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해, 너무 늦었지?” 이은주의 목소리로 시작해 이은주의 목소리로 기억되는 영화.

최진실, <질투> ━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을 때. “하경아, 가지 마. 넌 가면 안 돼. 나 더 이상 질투하기 싫어.” 신스 브라스가 터져나오고, 카메라가 두 사람의 포옹을 가운데 두고 돌아간다. 곧바로 시점이 바뀌어 이제는 두 사람의 포옹을 찍고 있는 촬영 스태프들을 비추더니 ‘컷’하는 소리가 나온다. 그곳의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한다. <질투>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파격적인 엔딩이다. 하지만 엔딩이 지나치게 주목받아 드라마 전체가 묻힌 측면이 있다. <질투>는 90년대가 시작됐다는 걸 알린 드라마이자, 최진실이 더 이상 새댁이 아니라고 선언한 작품이다. 영호와 하경이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낯선 도시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부터 쭉 한국 사람들은 최진실과 닮아 있었다. 최진실을 보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품었고, 최진실이 지독한 역할을 맡으면서 한국 사회도 악착같아졌으며, 최진실이 죽으면서 한국 사회는 외화벌이를 스타의 척도로 삼는 세상을 살고 있다.

전혜진, <더 테러 라이브> ━ 첫 등장에 재킷을 벗고, 윤영하에게 말을 걸 때. 차분한 여자는 힘이 있다. 아주 심각한 상황에 서라면 더욱 그렇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윤영하는 테러범과 계속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때 조종실로 한 여자가 들어온다. 호랑이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코끼리처럼 무겁게, 재킷을 벗고, 팔짱을 낀다. 그러다 긴장하고, 흥분한 윤영하를 막으며 말한다. “잠깐만요, 윤영하씨. 말씀하지 마세요. 테러범 말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 없어요. 전 대테러센터 박정민(전혜진) 팀장이고요, 발신지 추적 중인데 시간이 좀 빠듯하거든요. 우리가 지금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차분하게 사인 맞춰보죠.” 말의 속도, 높낮이, 어투 모두 신뢰가 간다. 침착한데, 이상하리만큼 감정에 호소한다. 어떻게 할거냐고 계속 되묻는 윤영하에게 박정민은 이렇게 답한다. “내가 장담하는데요, 윤영하씨 오늘 정시 퇴근해.” 전혜진은 최근 몇 작품에서도 홀로 침착했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던 <허삼관 >에서도, 여배우들의 무덤 같았던 <사도>에서도 전혜진은 사근사근 자신의 몫을 해낸다. 새삼 그녀에게 좋은 배우라는 말은 낯부끄러운 수식이지만, 한 번 더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침착해지는 순간을 찾고 싶을 뿐이다.

강수연, <감자> ━ 밭에서 쭈그리고 앉아 호미질을 할 때. 원, 동그라미, 둥금, 볼록함. 강수연에게서는 필시 동그란 뭔가가 튀어 오른다. 입술이 앵두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이며 매력인지 모르던 때, 어느 날 강수연의 입술을 보고서 ‘저것은 앵두구나’ 했던 일. 파르라니 깎은 머리로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찍고는, 삐죽삐죽 이제 고만큼 자라난 까까머리를 하고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꽉 쥐던 장면. <씨받이>에서 뭐가 뭔지 몰라 구석진 응달에 달팽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소녀. 감자밭에 아낙들과 쭈그리고 앉아 둥글 둥글 감자를 캐며 까르르 웃던 웃음. 강수연은 동그랗고, 동그랗다. 다 받아 들이고, 모두 튕겨 낸다. 그렇게 완벽하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강수연를 등에 업는 장면을 찍은 이덕화는 나중에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아니, 무슨 테니스 공 같더라고.”

김자옥, <지붕 뚫고 하이킥> ━ 울 때, 웃을 때. ‘안방극장’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이라면, 안방극장 최고의 스타로 김자옥을 뽑는 데 주저할 수 없을 것이다.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는 말에 김자옥보다 어울리는 얼굴은, 음성은, 이름은 없을 테니. 지난해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유난히도 그 음성이 생각나곤 한다. 구슬이 구르는, 젖어서 스미는, 촛불로 일렁이는, 조약돌처럼 눌러놓는 그 음성에는 사랑을 속삭 이든, 누구를 나무라든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보드라운 힘이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 83회에서 김자옥은 남의 집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변기가 막혀버리는 초대형 재난과 맞닥뜨린다.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알았던 자옥씨’의 이미지에 이보다 큰 타격이 있을까. 김자옥은 해가 지고 밤이 깊도록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한다. 울고 뚫고 (안 뚫리고) 운다. (눈물이 참 맑다.) 마침내 작전개시, 강제로 이끌려 나와서는 부끄러워 누구도 못 보는 그녀에게 진득한 연인 사이인 순재(이순재)가 감싸듯이 이렇게 말한다. “진짜 이슬만 먹고 사신다고 생각하겠어요? 아직도 그런 걸 끝끝내 안 보이려는 자옥 씨의 소녀 같은 마음. 저한텐 그 마음이 이슬보다 더 고운 마음인 것 같아요. 자옥씨, 제 눈에는 언제나 참 예뻐요.” 비로소 그녀가 코끝을 만지며 웃는다. ‘코끝을 만지며’는 대본에 있었을까? 김자옥. 텔레비전 앞에 영원히 아로새겨진 이름. 내 내 어여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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