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난 슬플 땐 홍콩 영화를 봐

2016.03.27GQ

홍콩 영화를 좋아했다. 어릴 적엔 금요일 밤마다 비디오 가게로 달려가 홍콩 영화를 대여섯 편씩 빌리고, 주말 내내 텔레비전 앞에 요를 깔고 누웠다. 엄마는 누룽지처럼 거실 바닥에 붙어 있는 아들을 마뜩잖아 했지만, 브라운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어린애에게는 어떤 말도 소용이 없었다. 신작은 1천5백원, 구작은 1천원. 1만원이면 검정 비닐봉지 한가득 비디오를 담고, 남은 돈으로 아이스크림도 몇 개 살 수 있었다. 초등학생에게 1만원의 행복이란 딱 그런 거였다. 가게마다 비치하고 있는 영화가 다르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 동네, 저 동네 헤집고 다니며 보지 않은 비디오를 수집하듯 빌렸다. 마을버스를 타고 15분을 달려 비디오를 빌리고, 다시 옆 동네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밤. 지금은 하래도 못할 일인데 그땐 그게 귀찮지 않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홍콩 영화엔 지금은 화석이 된 낭만이 있었다. 사랑, 우정, 배신과 복수, 폭발하는 자동차와 검은 연기 사이로 유유히 걸어 나오는 주인공. 어지러운 홍콩의 밤 거리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 남자는 여자를 목숨 바쳐 지키고, 모든 장애물을 넘어 끝끝내 복수하는 상투적인 낭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장면 하나하나를 세공하듯 다듬은 예술 영화는 흉내 낼 수 없는, 너무 순진해서 촌스럽고 그래서 더 소중한 감정. 그게 진짜 ‘맛’이었다. 이야기가 터무니없이 전개되고 대사와 사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허술해도 비장한 음악에 마음을 졸였고, 주인공이 죽으면 내 친구가 죽은 것마냥 가슴이 저렸다. 요새 애들은 “뭐야, 영화가 왜 이래” 하고 코웃음 칠 테지만,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들은 알 거다. 그 시절 홍콩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끼리 공유하는 비밀스런 감성이랄까.

그때는 임청하를 굉장히 좋아해서 그녀가 나온 영화라면 감독이 누군지, 시놉시스가 어떤지 확인하지도 않고 일단 봤다. < 동방불패 >, < 백발마녀전 >, < 절대쌍교 >, < 육지금마 >, < 동서사독 >, < 화룡풍운 >, 어이 없게 웃긴 왕가위 감독의 < 동성서취 >까지. 무협 영화를 좋아하게 된 건 순전히 그녀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임청하는 다른 여배우들과 달랐다. < 천녀유혼 >의 왕조현, < 시티 헌터 >의 구숙정, < 천장지구 >의 오천련, < 중경삼림 >의 왕비, < 양축 >의 양채니 모두 파릇파릇하고 예뻤지만, 그녀에게는 단지 ‘예쁘다’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눈부심이 있었다. 그냥 카리스마라는 단어로 정의하기 힘든, 더 복잡하고 미묘한 차원의 아름다움이었다. 눈을 부릅뜨면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워 보여도, 그 뒤편에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연약한 모습이 숨겨져 있었으니까. 날카롭게 올라간 커다란 눈, 작지만 야무지게 닫힌 입술, 점을 찍은 듯 푹 파인 턱도 모두 다 수려했다. 제일 좋아했던 건 그녀의 중성적이고 침착한 목소리다. < 중경삼림 >에서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대사도 몇 마디 없는데, 임청하의 귀찮은 듯 무뚝뚝한 음성이 북극성처럼 빛났다. 알아 듣는 말 한마디 없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몇 번이고 같은 장면을 되돌려서 보았다. “그게 중요한가요?”와 “날 이해하지 못할걸요?”라는 자막의 글씨체까지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다. 얼마나 많이 봤는지 그 대사만큼은 광둥어로 외울 수도 있었다. 그땐 정말 그랬다. 지금도 가끔씩 기분이 울적하거나 허전할 때면 홍콩 영화를 본다. 새벽이 올 때까지 몇 편이고 이어서. 그러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그리고 추억들로부터 위로 받는다. 너무나 단순하고 충만하게.

    에디터
    윤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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