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아빠와 바둑의 시간

2016.03.28GQ


일요일 오전 11시경, 안방 바닥에 체스판이 놓여 있는 날이 있었다. 나는 아홉 살이었다. 잠옷 바지에 헐렁한 흰색 러닝셔츠를 입고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망연자실했다. 아빠는 웃으면서 서류 가방을 들고 서서 말했다. “한번 잘 생각해봐, 왜 졌는지. 다녀올게!” 나는 아빠랑 딱 한 판만 더 두고 싶어서 거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아빠는 일요일에도 출근해야 하는 사립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었다.

나는 일요일 아침마다 “아빠, 학교 가기 전에 체스 한 판만 두자”고 졸졸 쫓아다녔다. 아빠는 살짝 귀찮아하곤 했는데, 꼭 한 판은 놀아주고 출근하셨다. 그 한 판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내가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아빠는 엄마를 자주 불렀다. “여보! 우성이 어디 있어?” ‘나 여기 있는데?’ 하고 한참 생각하다 보면 엄마를 또 불렀다. “여보! 우성이… 못 봤어? 얘 어디 갔지?” 내가 약이 바싹 올라서 옮겼던 말은 기사였나, 비숍이었나. 열한 살 즈음엔 내가 엄마를 부르기도 했다. “엄마! 아빠 어디 갔지? 혹시 출근하셨어요?” 그럴 때마다 아빠는 웃으면서 다시 턱을 괴셨고 나는 참 많이 졌다. 아빠는 봐주는 법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아빠랑 두는 체스가 그렇게나 재미있었다.

집에는 두껍고 무거운 바둑판도 있었다. 혼자서는 들 수도 없었고, 바둑알 중 몇 개는 이빨이 빠져 있었다. 일요일마다 체스를 두자고 조르기 몇 년 전, 아빠는 나한테 바둑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선생님이 흰돌, 배우는 사람이 검은돌을 쥐는 거야.”, “이렇게 두다가 이런 식으로 감싸면 그걸 집이라고 해.”, “끝까지 두고 누가 집을 더 많이 지었는지를 헤아려서, 더 많이 지은 사람이 이기는 거야.” 나는 물었다. “그럼 언제까지 둬야 해?” 나는 그때도 잠옷 바지에 흰색 러닝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일요일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저 넓은 바둑판을 다 채울 생각을 하니 그냥 막막하기만 했다. 내가 그때 아빠한테 바둑을 배웠다면, 일요일마다 아빠랑 보낸 시간이 조금은 길어졌을까? 출근 전 짧은 한 판이 아니라 퇴근 후 긴 대국이 됐을까?

내가 지금 즐기고 있는 모든 취미는 아빠한테 배웠다. 스키, 스케이트, 수영은 일곱 살 때부터. 볼링과 탁구는 중학교 때, 당구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중학교 땐 일요일 아침 10시에 볼링장에 가서 두세 시간 동안 열몇 게임씩 했다. 대학교 땐 일요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둘이 당구장에 갔다. 아빠는 150, 나는 80점을 놨다. 아빠는 그때도 봐주는 법이 별로 없었고, 나는 참 많이 졌다. 게임 값은 진 사람이 냈다. 학교 앞에서 친구들하고 치는 당구는 시시했다. 볼링도, 당구도 아빠랑 칠 때가 훨씬 재미있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마지막 대국을 보면서, 나는 아빠가 보고 싶었다. 바둑은 아름답구나, 한 수 한 수가 문학이구나, 그 아름다움으로도 승패를 겨루는구나…. 이런 생각 속에서 괜히, 어쩐지, 갑자기, 30대였던 아빠가 출근한 후 안방에 혼자 앉아 패착을 고민하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때 아빠는 최고로 바빴는데, 그랬는데도 아침마다 저녁마다 나랑 보낸 시간이 그렇게나 많았다는 사실이 바둑처럼 아름다웠다. 그때 안방에서 가까스로 일어나 체스판을 정리하고 나선 거실에는 정오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볕이 잘 드는 이층집에 다 같이 살았다. 참 따뜻했던 가죽 소파에 혼자 누워 안방에서 < 전국노래자랑 >이 시작하는 소리를 들을 때, 나한테는 시간이 참 많았다.

    에디터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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