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의 여자들

경력, 수상 기록, 연기로 그려본 2016년 할리우드의 초상.

보디 수트는 울리아나 세르젠코, 구두는 마놀로 블라닉, 타이츠는 팔케.

케이트 블란쳇 < 트루스 >와 < 캐롤 >(2015년)을 비롯한 48편의 영화 | 아카데미상 2회 | 영국 아카데미영화상 3회 

케이트 블란쳇이 영화에서 맡을 수 없는 배역이 존재하기는 할까? 만일 그런 역할이 있다면, 그녀는 올해 말쯤 이미 그 역할을 해치워버리고 ‘불가능 목록’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다. 어떤 시대도, 복장도, 분위기도 그녀가 입으면 한없이 자연스럽다. 그녀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샬롯 그레이 >)로 싸우기도 하고, 엘리자베스 1세로 왕좌에 오르기도 하고(첫 아카데미상 후보작), < 호빗(3부작) >에서 놀도린의 왕녀로 투명하게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 에비에이터 >에서 캐서린 헵번 역을 맡아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산책했고, 우디 앨런의 < 블루 재스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에서 블랑슈 뒤보아의 불안한 심리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최근 토드 헤인즈의 더글러스 서크 스타일 로맨스 영화인 < 캐롤 >에서 주연 캐롤 역을 맡았다. 아마도 크리스마스에 개봉한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일 < 캐롤 >은 그녀를 오스카 다시 한 번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려놓았다.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케이트 블란쳇은 < 토르 >의 차기작을 통해 크리스 햄스워스의 휘날리는 금발을 헤치고 마블 유니버스에 입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슈퍼히어로 영화? 그녀의 ‘불가능 목록’에서 지울 것이 또 생겼다.

 

티셔츠는 . 청바지는 사이먼 밀러.

브리 라슨 < 룸 >과 <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 >을 비롯한 15편의 영화 | 아카데미상 1회

브리 라슨은 오랜 연기 생활로 꾸준히 이름을 알린 배우다. ‘브리앤 시도니 디소니어스’라는, 영화 포스터 전체를 덮을 것처럼 긴 본명을 가진 브리 라슨은 6세 때 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10대 초반에는 유선방송 영화와 텔레비전 시리즈의 출연진에 이름을 올리며 동년배 배우들보다 조금씩 앞서 나갔다. 엘리자베스 뱅크스처럼 브리 라슨도 처음엔 조연으로 관심을 받았으며(< 스콧 필그림 >의 록스타 엔비 아담스, 쇼타임 채널에서 방영한 <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타라 >의 수다쟁이 딸, 다소 맥빠진 코미디인 < 디깅 포 파이어 >에서 배짱 있는 인물, <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 > 속 에이미 슈머의 책임감 있는 여동생), 자신과 잘 어울리는 배역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엠마 도나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 룸 >에서 라슨은 주연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능히 해치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게 증명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면서 말이다. 브리 라슨은 어린 아들과 함께 7년 동안 작은 방에 갇혔던 불굴의 어머니 모습을 보여주며 늘 그랬듯이 이야기의 중심에 우뚝 섰다.

 

블라우스는 구찌.

헬렌 미렌 < 트럼보 >와 < 우먼 인 골드 >를 비롯한 60편의 영화 | 아카데미상 1회 | 영국 아카데미영화상 6회 | 에미상 4회 | 토니상 1회

사람들은 헬렌 미렌의 지배에 따르는 충직한 신민일 따름이다. 그녀의 가녀린 입꼬리는 어명과 다름없다. < 조지왕의 광기 >와 < 더 퀸 >(이 영화로 2006년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수상)과 같은 역사물뿐만 아니라 < 엑스칼리버 >의 매혹적인 모르가나, < 롱 굿 프라이데이 >의 악당 정부, < 아인 랜드의 열정 >의 자본주의의 거침없는 여제, 그리고 < 트럼보 >의 가십 칼럼 작가인 헤더 하퍼의 연기에서도 그녀는 위엄 그 자체다. 그녀의 위풍당당한 태도(폭풍에도 끄떡없을 듯한 침착함) 덕분에 마치 또 다른 특권인양 보이는 완전한 악을 연기할 수도 있다. < 칼리굴라 >, < 베니스의 열정 > 같은 영화, 그리고 그녀의 멋진 드레스가 검은 독거미의 그물처럼 흩날리는 <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의 퇴폐적인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헬렌 미렌의 최고의 연기를 꼽을 수 있을까? 힘든 선택이지만 < 프라임 서스펙트 > 시리즈의 제인 테니슨을 유력한 후보로 올리고 싶다. 이 시리즈에서 그녀는 전통적인 경찰 드라마에 페미니스트이자 캐릭터가 강한 주인공을 완성했고 긴장, 커피, 담배가 끊이지 않고 등장했다. 이후로 시청자들은 그녀의 흡연 장면이 언제 나올지 목 빠지게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다.

 

비올라 데이비스 <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을 비롯한 37편의 영화 | 에미상 1회(텔레비전 시리즈< 범죄의 재구성 >) | 토니상 2회

정의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정의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쇼 비즈니스계에서는 그렇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비올라 데이비스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으로 활동했으며, 과장된 행동이나 시선을 빼앗는 잔재주가 아니라 마치 일생에 한 번 온 기회를 거머쥐듯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주변과 리듬을 타기 위해 노력했고, 은밀하게 주위를 물들이는 식으로 자신의 출연 분량의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데이비스는 마이클 만의 테크노 스릴러 영화 < 블랙코드 > 속에서 흐릿한 전개를 이기고 감정적인 중심을 잡았다.) 배역이나 조건과 관계없이, 그녀의 연기는 항상 주목을 받았고, < 다우트 >, < 헬프 >로 증명된 이런 대단한 배우가 ‘왜 더 중요한 역을 맡지 못할까?’라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이제야 그녀는 ABC 연속극 < 범죄의 재구성 >에서 형법교수라는 비중 있는 인물로 등장해 아이리스 머독의 소설에 나오는 멘토처럼 제자들과 심리 싸움을 펼친다. 다음 개봉작은 DC 코믹스의 올스타 난장판인 < 수어사이드 스쿼드 >다. 그녀는 슈퍼 악당들을 세계를 구하는 건설적인 인물들로 바꾸려는 역을 맡았다.

 

바지와 스카프는 스코치 앤 소다.

구구 바샤-로 < 컨커션 >(2015)를 비롯한 6편의 영화

‘구구레투’는 줄루어로 ‘우리의 자랑’이라는 뜻이다. ‘구구’는 이것의 줄임말이다. 일부 분석심리학자들의 생각처럼, 운명과 정체성은 사람의 이름에 집약된다. 이름에서 보이듯 자긍심은 그녀의 연기와 분위기를 규정한다. 그녀는 워쇼스키 남매의 < 주피터 어센딩 >과 같은 광기 어린 환영의 구름 속에서도 조용한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관찰자적 태도를 유지한다. 영국의 옥스포드에서 태어나 왕립학교를 졸업한 바샤-로는 < MI-5 >와 < 닥터 후 > 같은 유명 시리즈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영국 해군 제독의 혼혈 딸을 다룬 18세기 배경의 드라마 < 벨 >, 화려하지만 감옥같았던 슈퍼스타의 성공을 다룬 팝-뮤직 로맨스인 < 블랙버드 >에 출연하며 정상급 배우의 자리를 다졌다. 또한 그녀는 NFL 선수 간의 강한 충돌로 인한 뇌 손상과 그에 대한 리그 사무국의 외면을 다룬 스포츠 드라마 < 컨커션 >에 윌 스미스와 함께 출연했다. 그녀가 화면에 등장하면 외면할 방법이 없다.

 

톱은 클로에, 장신구는 마리아 블랙 주얼리.

알리시아 비칸데르 <대니쉬 걸>, <더 셰프>, <맨 프롬 엉클>, <엑스 마키나>를 비롯한 15편의 영화 | 아카데미상 1회

스웨덴 출신인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2015년 영화계의 거의 모든 장르에 뛰어들었다. < 더 셰프 >에서는 브래들리 쿠퍼의 과거 속 그리운 옛 연인으로, < 맨 프롬 엉클 >에서는 조각 같은 두 명의 근육남과 함께 등장했다. 그리고 < 대니쉬 걸 >에서는 트랜스젠더 예술가로 분한 에디 레디메인의 아내로 전례 없는 사이코섹슈얼의 영역에 뛰어들었고,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비칸데르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놀라운 작품은 인공지능 기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 엑스 마키나 >다. 매혹적인 로봇 아바로 출연해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자기 구현을 이뤘다. 완벽하게 기능적인 상체와 생체공학적 다리를 가진 안드로이드를 통해 얼굴도 확실히 알렸다. 뿐만 아니라 비칸데르는 그동안 < 로얄 어페어 >, < 안나 카레리나 >, < 청춘의 증언 >(< 일곱 번째 아들 >의 검과 마법으로 이루어진 환상의 세계는 논외로 하자) 등의 역사물에 자신을 완벽히 녹여왔다. 차기작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특히 할리우드의 또 다른 천재인 마이클 패스밴더와 함께 출연하는 < 더 라이트 비트윈 오션스 >를 기다린다.

 

루피타 뇽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를 비롯한 5편의 영화 | 아카데미상 1회

단 세 편의 장편영화를 찍었지만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중 한 편은 그저 그런 종류의 영화로 분류될 수도 있지만(< 논스톱 >에서 리암 니슨이 음침한 영웅 연기를 하는 동안 여객기 승무원으로 등장했다), 나머지 두 편은 충격적이었다. 예일대학교 연극대학을 졸업한 뇽은 스티브 맥퀸의 통렬한 작품인 < 노예 12년 >에서 팻시 역을 맡아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 고통, 절망, 용기, 행복으로 비평가들을 사로잡아 끝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2013년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미국 배우조합상, 골든 글로브에서도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레드카펫에서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며 새로운 스타의 반열에도 올랐다. 작년, 루피타 뇽은 제다이들이 사원에 모여 떠드는 영화로 알려진 <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에서 과거에 해적 대장이었던 마즈 카나타 역으로 등장했다. 그녀는 어디서든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그것을 멋지게 드러낸다.

 

코트는 막스마라, 셔츠는 세인트 제임스, 청바지는 시티즌스 오브 휴머니티.

레이첼 와이즈 < 유스 >와 < 더 랍스터(2015) >를 비롯한 34편의 영화 | 아카데미상 1회

레이첼 와이즈는 재능이 너무 많다. 우리가 그녀의 풍부함을 누리지 못한다면 억울할 것이다. 재능 있고, 침착하고, 헌신적이고, 경험이 풍부하고, 아름답고(라파엘 이전 화풍의 느낌을 주는 눈썹), 지적이며(어머니는 교사에서 치료사로 전직했고 아버지는 기계공학자이자 발명가), 영향력 있는 영화계 커플이다.(가장 최신의 ‘제임스 본드’인 다니엘 크레이그.) 와이즈가 비열한 웃음과 눈부신 다이아몬드만 장착한다면 우리 시대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다니엘 크레이그는 리처드 버튼처럼 복잡한 우울한 측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와이즈는 황금마차에 올라타기에는 너무 합리적이다. 로맨틱 코미디(< 나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 >), 코미디 공포물(< 미이라 >, < 미이라 2 >), 멜로드라마(< 러블리 본즈 >), 예술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 딥 블루 씨 >), 가족 드라마(< 어바웃 어 보이 >) 등 모든 영화 장르에서 성공을 거둔 바이즈는 존 르 카레의 소설을 각색한 < 콘스탄트 가드너 >로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 영화로 2006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감쪽같은 다양성은 최근에 전혀 다른 느낌의 두 영화인 < 유스 >와 < 더 랍스터 >에서도 확실히 드러난다. 하나는 황혼을, 다른 하나는 부조리를 그린 작품이다.

 

스웨터는 H&M.

시얼샤 로넌 < 브루클린 >을 비롯한 20편의 영화

루 리드가 시얼샤 로넌을 보고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 ‘Pale Blue Eyes(연한 푸른 색 눈)’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불가능하다.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니까.) 하지만 아일랜드계 미국인 배우인 그녀를 가까이서 보면 항상 그 노래의 가사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콤 토이빈의 소설을 동료 소설가인 닉 혼비가 각색한 < 브루클린 >에서 로넌이 연기한 엘리스 레이시를 볼 때 그렇다. 뉴욕의 시끌벅적한 혼란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이민자로 분해 희망에 찬 시선, 흰 꽃 같은 얼굴, 조용한 자세를 통해 사랑 노래에서 추구하는 미를 완성했다. 이 역할로 로넌은 오스카 최우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로넌이 연기한 레이시는 아메리칸 드림이 아직 생생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 어톤먼트 >에서 < 러블리 본즈 >에 이르기까지 로넌이 빛낸 수많은 영화에서 애절함이 희미하게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화면 속에서 항상 슬픔을 연기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 바이올렛 앤 데이지 >와 < 한나 >에서 각각 십 대 암살자 역을 맡았고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의 화려한 흥겨움에도 참가했다. 로넌은 체홉의 < 갈매기 >를 각색한 영화에서 코리 스톨, 아네트 베닝, 엘리자베스 모스 등과 함께 완벽한 배역이라고 할 수 있는 니나를 연기한다. 개봉만 빨리하길.

 

샬롯 램플링 < 45년 >(2015년 작)을 비롯한 92편의 영화

수십 년 동안 ‘알쏭달쏭함’으로 묘사되었던 샬롯 램플링은 < 45년 >에서 황혼의 흔들림을 겪는 아내를 연기하며 마침내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다들 그렇듯이 그녀의 연기는 오랜 세월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보다 이해하기 쉬워졌다. (광채를 발하는 로렌 바콜을 연상시키는) 냉정한 고양이 눈, 마치 카나리아를 놓아주길 거절하듯이 입꼬리만 움직이는 웃음,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일 때조차 빈틈없는 풍모는 어떠한 자기 연민 없이도 여리고 약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램플링이 보여주는 여배우로서의 고전적인 모습은 < 숙녀 >의 모드 분위기와 < 비엔나 호텔의 야간배달부 >의 가학-피학적 나치 심리극, 그리고 그녀의 연기 경력에 변화를 가져온 에로틱 스릴러인 < 스위밍 풀 >의 후텁지근한 분노를 관통하고 있다. 한 번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적이 없는 램플링은 마침내 < 45년 >에서의 열연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제대로 된 보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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