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나고 난 뒤

선거가 끝났다. 전례와 여론 조사를 뒤엎는 결과에 매체들은 연일 후속기사를 쏟아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선명한 실감을 주는 것은 잠잠해진 거리다. 전단지와 유세와 구호소리가 사라진 거리. 선거 전 마지막 일요일이 절정이었다. 연희동 주택가 골목 깊은 곳에 있는 4층 방에서도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멀고 고만고만하게 들렸지만 그것에도 기승전결은 있는지 점점 커지고 열띠어 갔다. 후보자가 자신의 이름과 기호를 각혈할 것 같은 목소리로 정점을 찍을 때, 나는 창문을 닫았다.

보지 않아도 선했다. 얼굴과 숫자를 창피할 만큼 크게 찍어 넣은 유세 트럭이 사람 많은 길목마다 버티어 서고, 그 앞에서 똑같은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며 호객하고, 후보자들은 핏대 세워 마이크에 침을 튀겨 가며 표를 호소하고, 지지자들은 목청껏 애정과 연대를 과시한다.

명백한 공해고 기실 이중공해다. 후보자는 웅변하지만, 들어 줄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다. 선거용 현수막에 적힌 단어가 우선 그렇다. 발전, 특화, 맞춤형, 선진화 같은 말은 팽팽하게 걸린 현수막이 무색할 만큼 헐겁고 허름하게 읽히고, 일꾼이니 걷겠다느니 뛰겠다느니 하는 말은 너무 너덜너덜해 정치인 금지어 사전을 하나 만들고 싶다. 내용은 오죽한가? 여야 3 당의 공약에 들어가는 돈이 2백12조라고 한다. 올해 2월로 국가 채무는 이미 6백 조를 넘겼다. 국가 총생산 대비 40퍼센트에 가깝고, 국민 일 인당 국가 채무가 1천만원이 넘는다. 상황은 들여다 볼수록 가관이다. 서울 지역 후보자가 공약한 신설 지하철 역만 60곳이 넘고 일자리 창출은 3당의 수치를 합치면 1천만에 육박한다. 사상 최악의 깜깜이 선거, 매 선거 때마다 나오는 말이고 또 그때마다 기대치를 경신하는 말이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올해 선거운동 소음 관련 민원 신고가 급증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한마디로 시끄럽다는 말이다.

답은 명백하다. 선거운동이 이러면 안된 다는 것. 유권자들이 각 후보자들의 성향과 업적을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진지하고 객관적인 자리, 이를테면 TV 토론회 같은 것에 더 치중해야 한다. 누가 그걸 모르나?

선거운동이 왜 이렇게 됐을까? 두 겹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속살이다. 후보자가 남발하는 공약과 구태스러운 정치 수사는 모두 당의 기조와 정책에 맞물려 있다. 당 수뇌부라면 이 공약이 공약이라는 말조차 못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강행한다. 이겨야 하기 때문이고, 매번 필사적으로 그렇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각당 대표의 행보는 절박한 상황을 대변했다. 김무성 대표는 공천 파동에도 불구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릎을 꿇었고 김종인 대표는 국회의 필리버스터, 무제한 토론을 멈춰 세웠다. 안철수 대표는 자신의 지역 구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호남에서 보냈다. 이겨야 하니까, 그게 전부다.

이기기 위해 선택한 외피는 어떤 것인가? 익히 겪는 수단이다. 차량과 대형 스피커를 동원한 가두유세, 무분별하고 무례한 데다 위법 소지까지 의심스러운 투표 독려 메시지, 사방에 드리우고 내걸린 현수막들, 지역 시장을 찾아가 먹고 마시고 웃고 공공단체 행사에 참여해 지역 인사들과 악수하고 연단에서 축사하고 기념사진 촬영하기. 저런 걸 누가 볼까, 믿을까 싶지만 의구심은 접어둬야 한다. 바로 그런 것으로, 여태 선거라는 것을 인지하지 않았나. 다시 말해 최소 이십 년 이상 전국 각지에서 검증한 방식이고 여전히 먹히는 방식이다. 가장 높은 투표율을 올리는 연령층, 50대 이상에게 특히 그렇다.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걸까?

2013년, 부산에 갔을 때다. 해운대로 택시를 타고 움직이는 중이었는데 며칠 뒤 영도다리가 재개통된다는 얘기를 기사에게서 들었다. 기사는 행사가 크게 있을 거라고, 대통령도 참석할 거라고 말했다. 국정 업무로 바쁘실 텐데 이런 행사까지 오실 거 있느냐고 넌지시 말하자 기사는 정색했다. “암만, 내려와야지예. 여가 부산인데.” 안동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선거철이었고 나는 구시장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저편이 와글와글했다. 국회 의원쯤 되는 사람이 온 모양이었다. 아주머니께 저런 거 보기 좀 그렇지 않냐고 말하자, 모르는 소리 말라고, 저런 사람이 와야 시장에 사람이 많이 온다는 답을 들었다. 옆에 있던 남자는 더했다. “자슥, 올 거면 일로 오지 왜 절로 가뿌노?” 외가가 전라도인 친구에게 들은 얘기도 있다. 친구의 외할머니는 예전부터 야당만 찍는 분이셨다. 드디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어 이윽고 임기가 끝날 무렵 외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찍어줘도 소용없당게. 그깐 해준 게 뭔디?”

어떤 사람들은 맹목과 신앙에 가깝게 특정 후보를 지지하겠지만, 대개는 자기 실리에나 밝다. 그 실리에 도움을 주는 정치가의 힘이 가깝고 친근할 때 더욱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트럭을 타고 다니며 세력을 드러내고, 큰 목소리로 군중을 쓸어 담을 듯 말하고, 대식가처럼 시장 곳곳을 누비며 잘 먹고 손이라도 한번 씩 잡아주며 ‘예산 폭탄’이라는 말을 할 줄 아는 후보자에게 투표한다. 이상한 걸까? 적어도 이것 자체만 놓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상당히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내 권리를 최대한 비싼 값에 사겠다는 후보에게 팔겠다는 것이 왜 나쁜가?

이기기 위해 허튼 공약이라도 불사할 수 있다는 정당의 논리와 그런 공약이라도 해보라는 유권자의 이해관계가 맞물리고, 선거운동은 관계에 속한 사람들의 난장이 되는 수순.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시끄러운 이벤트. 어떤 사람의 열광과 지지만큼 어떤 사람의 냉소와 혐오도 당연하다. 둘은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하나를 둘러싼 두 겹이고 양면이다. 저토록 열광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똘똘 뭉치는 한 냉소하고 혐오하는 사람들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또 냉소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한 열광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매 선거마다 똑같이 열광하고 지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유권자가 있는 한 후보자들은 더욱 기고만장하게, 아무리 용렬하고 우스꽝스러운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분은 계속 그러시도록, 나는 창문을 닫고 싶다. 창문을 닫는다고 창밖의 소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창문은 소음을 지우거나 약화시킬 뿐이다. 소음은 사라지지 않고 연희동 사러가 마트의 사거리에서도 내 방으로 이어지고, 다른 수많은 방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다음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음을 소음이 아닌 소리로 듣고, 환호하고 즐기는 것이 나름의 권리와 자유라면, 소음을 소음으로 듣고 불쾌해 치워버리는 것도 권리와 자유다. 창문을 닫는 것도 권리와 자유일까? 아니, 시끄러운 것을 피하는 게 어떻게 권리고 자유인가? 그건 본능의 쾌불쾌에 따른 반사 행동이다. 청각이 녹초가 돼 시끄러운 것을 시끄러운 줄 모르도록 적응하는 것과 아예 닫아 걸고 그것을 피해버리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나. 피할 수 있으니 피하는 것일 뿐 결국 마찬가지다.

“보이는 게 한심해도 투표는 바로 하자.” 손석희 앵커가 JTBC 뉴스의 앵커 브리핑에서 한 말이다. 우습지만 우습게 들을 수 없는 이 말은 상황을 정확히 꿰뚫는 데가 있다. 시끄럽기 때문에 투표해야 하고, 투표해서 치워야 한다. 결국 투표로 발언하고 요구해야 한다. 창문을 닫는 것은 그 안에 갇히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를 덮어 썩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모든 냉소와 혐오를 일으키게 만든 사달 아닌가?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마찬가지다. 똥이 무서워서 치우나? 더러워서 치우지.

야당은 승리했고, 여당은 참패했다지만, 중요한 얘기일까? 이겼다고 생각하는 쪽은 나름대로 함정을 피해야 할 것이고, 졌다고 생각하는 쪽 역시 나름대로 기회를 엿 볼 것이다. 이 후의 이합집산, 천변만화를 가늠하려 애쓰는 것은 부질없고 무모하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이전에 투표하지 않던 사람들이 투표했다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먹히던 방법을 먹혔다는 이유로 더는 써먹을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른 것 아닐까? 판은 바뀔 것이다. 다음 선거는 더 시끄러울까, 덜 시끄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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