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벚꽃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는 계절이 지나간다. 올해는 벚꽃을 실컷 구경하고 싶었다. 벚꽃도 예쁘지만 왜인지 벚나무 옆에는 항상 라일락나무도 있어 눈과 코가 황홀해진다. 적어도 회사가 있는 논현동은 그렇다. 잠시 동안이지만 논현동 오래된 아파트 사이사이로 벚꽃과 라일락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스튜디오에 미팅을 하러 가다가도, 점심으로 평양냉면을 먹으러 가는 길에도 찬란한 꽃분홍과 연보라색 냄새에 취한다. 향을 온전히 마시고 싶어 그 나무 아래 무작정 서 있었던 적도 있다. 언제부터 그렇게 꽃을 좋아했다고.

특색이라곤 없는 한가한 집 근처도 해마다 두 번씩은 도로가 마비된다. 어린이날과 지금처럼 벚꽃이 필 때. 동네에 어린이대공원과 워커힐 산책로가 있는데, 이맘때면 이 동네의 모든 도로는 토요일 오후 세 시의 강변북로처럼 차로 꽉 막힌다. 벚꽃이 뭐고, 꽃구경이 뭐기에. 꽃이라면 그냥 오며 가며 보면 되지 굳이 저렇게까지 할 일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벚나무 아래 좀 서 있어본 사람으로,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게 됐다. 예쁜 건 제대로 보고 싶고 또 그 옆에서 서성이다가, 같이 사진까지 찍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걸. 그리고 그걸 누군가와 함께 보면 훨씬 더 좋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벚꽃 앞에서 셀피를 찍진 않았다. 벚꽃 사진은 여러 각도로, 동영상이나 슬로모션까지 두루 찍어뒀지만.

휴대전화 슬로모션 기능을 쓴 건 촬영 때문에 간 경주에서다. 경주는 곳곳에 벚꽃이 많았다. 마침 비가 와서 꽃잎은 일부 떨어졌고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젖은 벚꽃은 야릇하고 기묘했다. 요상하게 생긴 간판들만 배경에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시처럼 그득하지 않고 띄엄띄엄 떨어진 벚나무 사이로 여관이며, 닭집이며, 벌거벗은 논이 보였다. 참 현실적인 풍광. 그래도 벚꽃이 초라해 보이진 않았다.

영화 < 트럼보 >를 보고 나온 새벽에 본 벚꽃은 눈먼 벨기에 수녀가 뜬 레이스처럼 찬란했다. 밤 벚꽃이 이렇게 예쁜 거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교토에서 산 엽서의 그림은 밤에 핀 벚꽃을 그린 거라는 걸. 어떻게 그런 색의 조합이 생기지는지도 분명해졌다. 그날 밤 레이스 같은 벚꽃을 따라 계속 걸었다. 압구정 골목골목에도 오래된 빌라 단지에는 벚나무와 라일락나무가 많았다. 깊은 밤의 끝엔 늘 술이 당긴다는 게 문제였는데, 결국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작년 봄엔 도쿄 나카메구로에서 벚꽃을 봤다. 그 유명한 나카메구로의 벚꽃을. 3월 말은 원래 본격적으로 피는 시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날씨가 급격히 좋아지자 꽃잎이 열렸다. 나카메구로 하천을 따라 쭉 늘어선 벚나무는 꽤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하천가에 사람들이 모여 술과 음료, 주전부리를 팔기 시작했다. 기발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딸기가 들어간 이치고 샴페인을 두 잔 마셨다. 후끈한 볕과 흩날리는 벚꽃을 배경으로 이번엔 혼자 셀피도 시도했다. 건질 게 하나도 없는 사진들, 전문가로서 놀랄 만큼 제대로 된 앵글이 하나도 없었다. 나카메구로의 벚꽃을 실제로 보니, 영화 < 4월 이야기 >에 나온 벚꽃이 소품이 아니라 진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기와 벚꽃 향에 취해 나카메구로에서 다이칸야마로 가는 언덕을 씩씩하게 올랐다.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내년엔 여수나 화개장터에 가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