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숲 속의 하얀 집

2016.04.28이충걸

세계는 황사가 아니더라도 여전히 창백하다. 강물은 쭈글쭈글하며 하늘은 칙칙하다. 4월. 미세 먼지가 벚꽃을 밀어내 오후엔 불을 켜야 하는 잠깐의 저채도 구역. 색상의 스펙트럼은 회색과 베이지, 갈색의 언저리 어딘가에 있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랑을 원하듯 색깔을 갈망한다. 색깔을 대하는 산 것들의 반응은 얼마나 육체적인가.

봄은 자기의 주기를 잘 알고 있어 4월엔 점점 낮 시간이 길어진다. 무지개는 5월에 강렬하고, 6월엔 수만 개의 녹색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봄이 눈에서 회색을 걷어내자 버드나무의 노란색, 살구꽃의 연유색, 밤나무의 연초록색, 목련의 아이스크림색이 쪽배처럼 떠다녔다. 페인트 가게에서 색상 칩을 갖고 놀 때보다 현란하게. 꽃은 손금 무늬로 뻗은 가지에 매달려 횃불같이 빛났다. (내 손이 문득 봉오리가 큰 꽃처럼 보인다.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죽어가지만 꽃 모양의 손이라면 웬만해선 누굴 아프게 하지 않았음 좋겠다.)

…언젠가 집을 짓고 싶었다. 한명숙의 노래처럼 “모두가 세상이 새하얀” 그런 집을 짓고 싶었다. 그리고 공원 옆에 하얀 집을 지었다. 흰빛이 외부에서 오는지 내면에서 오는지 알 길은 없으나 오래된 벽의 구름 낀 흰색, 부드럽게 자욱한 눈보라색, 낡은 화이트 셔츠의 희미한 색조가 좋았다. 공기까지 야멸차게 하얀 집에 들어갈 때,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내 자신이 미학적 엄격함으로부터 한참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만 빼고.

그렇게 방의 몽상 속으로 들어가 공간을 장악하는 샹들리에의 존재감 대신 텅 빈 하얀 색깔에 사로잡히고 나면, 소유한다는 것에 구속되지 않는 삶이 괜히 멋져 보이고, 데이비드 소로와 호치민을 굳이 뒤적거리게 된다. 갖지 않았거나 가질 수 없는 것을 추상으로라도 동경하는 몽상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계 기간엔 집을 어떻게 점거할지 대단한 조언들이 넘쳐났지만 온통 하얀 집이어야 한다는 생각 말고 다른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한참 뒤 커튼의 흰색을 통해 햇살이 걸러지고 빛의 강도가 오히려 증폭될 때,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색은 버그도프 굿맨 쇼윈도의 라벤더색 벽도, 투탕 카멘의 황금색도, 돈황 벽화의 주황색도 아닌 흰색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하얀 집에서 사는 건 깨끗함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엇을 요구한다. 아득한 무한성, 세계 평화에 대한 최소한의 생각을 자극받는 한편, 사소한 것에 휘둘리지 않고 해방감의 본질에 다가서기도 하는 것이다. 동시에 많은 걸 덜어낸다는 명제는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적 상쾌함으로 얼룩졌다. 물건을 통해 우아한 상태에 이를 것인가, 평평한 피안에 다다를 것인가는 도덕이 아닌 취향의 문제일 텐데, 어수선 한 게 눈에 띄어서도 안 되고, 스크래치조차 말도 안 됐다. 표준보다 더 나가는 집주인의 체중 또한 미니멀리즘의 윤리라는 건축 코드에 위배되었다. 영혼마저도 최소한도가 되어야만 몰아와 비세속성을 의미하는 도덕적 진전 상태가 된다고 희끄무레한 목소리가 윽박지르는 것 같았다. 사람 들은 단순성이나 축소, 물건을 버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지만, 문제는, ‘단순성’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나에겐 무물질성을 유지할 도덕적 스태미나가 당연히 없었다. 별로 비싸지도 않은 물건을 조금이라도 걷어낼 여유도 없었다. 문의 선을 방해하는 손잡이를 달지 않아 등으로 밀어 열고, 벽의 면을 해치는 스위치를 감춰 어둠을 몰아내지 못하는 방은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열반의 경지였다. 나는 집 안에 날리는 개털이나 먼지 더미까지 장식의 교묘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 미니멀리즘의 최신 풍조에나 겨우 관심이 있었다.

질량과 부피의 축제엔 돈이 든다. 세상사를 남겨놓고 떠나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공간을 비우는 도시형 미니멀리즘에는 골치 아픈 비밀이 하나 있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사실 다들 엄청난 부자도 아니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지. 그런데 빈 공간은 심지어 허공이나 빛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광합성을 하며 살 수 없으니 물질에서 영양을 얻는다. 친구의 그림, 조카가 만든 찰흙 자동차, 엄마가 보낸 꽃병의 온기에 도취되고 기쁨을 기억하며 환희에 소리친다. 내가 사물과 무관할 때는 이따금씩의 애도 기간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햇살이 침대 옆에 내려와 단풍나무 탁자의 나뭇결로 또렷이 반짝거릴 때, 걷어챈 듯 상실로부터 빠져나와 직물과 가구, 사물의 관능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소유의 대단한 무게, 짓누르는 물질 속의 익사는 반복되었다. 문을 여닫고, 스위치를 켜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방식도 새로 배웠다. 생활은 비워지기는커녕 두둑히 다시 채워졌다. 있음과 없음, 비움과 채움은 하나가 없인 존재하지 못하는 인생의 두 얼굴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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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에서 매일 새벽 5시에 깼다. 자동차와 사람으로 질식하기 전의 세상은 주인이 몇 없는 왕국 같았다. 새벽은 갈라진 달걀 껍데기 사이로 빛이 들어오듯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 사는 존재에게 시간의 선물은 빛의 신비를 경험하게 하는 것. 새벽의 포플러 섬유 같은 빛이 바람의 끝자락에 얹히면 공원은 순간적으로 정오보다 깊은 담청색으로 바뀌었다. 어떤 땐 시계 눈금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때로 시간이 사라졌다. 문득 사방을 돌아보면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시곗바늘이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서로에게 다가간다. 긴 바늘은 짧은 바늘에게 “아, 쫌만 기다려. 정오가 되면 함께 날 수 있단 말이야”라고 말한다. 나뭇가지에 간밤의 남은 빛이 어른거린다. 어제 비친 햇빛의 증류물. 그 아래쪽은 꿀 같이 무겁다. 무한히 가벼운 하얀색 세상에선.

 

    에디터
    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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