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글씨

언젠가 당신이 내게 써준 것입니다. 보면서 깨닫습니다. 글씨에는 어느새 마음이 고여 있음을.

내가 아는 글씨

1 1996년, 포천. 상근예비역인 내가 전출을 가던 날, 한 고참이 남긴 메모다. 처음 읽었던 때나 지금이나 어쩐지 야릇한 기분을 느낀다. 적힌 전화번호를 눌러보니 결번이다. 2 1983년, 논산. 그때 한국 여자 배구는 미도파와 현대, 막강 라이벌 구도였다. 아홉 살 나는 이명희 선수에게 “누나를 좋아해요” 팬레터를 보냈다가, 그 후로 몇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는 안타깝게도 모두 분실했고, 이 사인만 달랑 남아 있다. 주장 곽선옥, 세터 이운임, 중앙공격수 박미희, 양쪽 오픈 공격수 한경애와 이명희…. 인터넷 세상, 누나의 지금을 찾았고, 부산에서 생활 체육 테니스 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음을 알았다. 사진도 한 장 봤는데 너무 아름다워 눈이 부셨다. 3 1993년, 논산. 고등학교 3학년 때,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가 이런 답장을 받았다. 그때는 ‘에디터’라는 직업도 몰랐지만, 어떻게든 이 카드로부터 뭔가 시작될 거라는 매우 막연하지만, 아주 강력한 믿음에 휩싸였다. 4 1996년, 대전. 내가 이등병이었을 때, 조카 다솜이는 다섯 살 유치원생이었다. 이 유치원생은 15년 후 홍대 미대생이 된다. 5 1997년, 논산. 지렁이도 이런 지렁이는 없을, 못 써도 이렇게 못 쓴 글씨는 다시 없을 글씨. 김천이 고향인 대학 선배 이성우는 이 글씨로 참 많은 편지를 보냈다. 나 역시 ‘내 글씨’로 참 많은 편지를 그에게 썼다. 6 1988년, 논산. 대전으로 전학 간 친구 승권이가 만들어 보낸 크리스마스카드. 카드를 열면 ‘X-MAS’라는 글자가 입체로 벌떡 솟아오른다. 지금도 완전 힘차게 솟아오른다.

 

꼭 쥐고 있는 시간

1 1996년, 충암고등학교 1학년 조성빈의 그림. 이러고 놀면서 주고받은 그림이 몇 장 더 있다. 나는 한 장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자는 시간을 아껴 매일 아침 출근 전에 음악을 만드는데, 요즘 TV에 나와서 “힙합 좀 하네”, “비트 좀 찍네” 하는 누구보다 백배는 쿨하다. 직업은 은행원. 2 2005년, 호주 국립대에서 가까워진 친구 요코 하다노의 편지. 한국어를 이렇게 열심히 읽고 쓰고 하더니, 요코는 거기서 만난 한국인 형과 결혼해 지금 한국에 산다. 가끔 전화하면 지금도 높은 톤으로 “우선오빠?!” 그런다. 3 나는 2001년 겨울 논산훈련소에서 가장 많은 편지를 받은 훈련병이었다. 6주간 받은 80여 통 중 40여 통이 아버지로부터였다. 그때 근무하던 학교 봉투와 편지지에 세로쓰기로 흘려 쓴 한글과 한자. 아버지는 가족 모두와 당신의 안부를 거의 스트레이트 기사처럼 썼다. “날씨가 매우 차진다”에서 “매우 바빴단다”를 지나 “보고 싶다”로 마무리되는, 나한테는 또렷한 이정표 같은 편지. 4 1997년, 같이 외고 입시를 준비하던 조한나의 편지. 한나는 이과생이면서 문과 입시에 수학1이 들어가서 어쩌냐고 나를 걱정하던 친구였고, 나는 늘 수학이 약점이었다. ‘나중에 대학 가서’ 우리가 하고 싶었던 건 ‘놀러도 가고 토론도 하는’ 것이었다. 5 아마 1997년, 큰누나 정소희가 Blur 5집과 같이 준 크리스마스 카드. 큰누나의 이 또렷한 손글씨와 아버지의 유려한 세로쓰기를 보면서 나는 어디쯤 있는지 생각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손글씨가 자꾸만 나를 반성하게 만든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누가 썼는지, 어떤 건 왜 갖고 있는지도 모르는 글씨만 모았다. 1 ‘지식 –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은총’이라고 적혀 있다. 이 비범한 말을, 유치한 새 모양(연필로 그린 흔적이 남아 있다. 누군가 직접 그려서 가위로 오린 것이다)의 종이에 써준 사람은 누구인가. 2 친구가 안동 병산서원 가는 길을 적어준 메모지 뒷장이다. 잘 아는 술집에 앉아서 쓰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에게 물어보니 자기가 그린 게 아니라고.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작가는 ‘FUCK’이라는 글자에 유난히 공을 들였다. 마음에 드는 세계관이라서 버리지 않았다. 3 빌린 CD를 MD에 복사하고 열심히 곡 목록을 옮겨적던 시절이 있었다. 스무 살 무렵일 텐데, 일본어를 잘 쓰지도 못했고 내 글씨도 아니다. 친구 중에 일본어를 이만큼 잘 쓰는 사람도 없었는데? 4 군대 후임이 여자친구 ‘사랑이’에게 보낸 편지가 왜 내게 미개봉으로 있을까. 5 김성근 감독이 SK 와이번스를 이끌던 시절, 2009년 6월 3일 대 롯데 전의 야구 기록지. 일 때문에, 일일 야구 기자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야구 기록지 적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그날 사수 역할을 한 선배가 이 기록지를 바탕으로 설명해줬다. KBO 기록실에서 역대 경기 기록원의 이름을 제공하지 않아 누가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박정권이 4회 솔로홈런을 쳤으며,SK가 홈경기에서 2:1로 이겼다는 기록은 선명하지만, 야구 기록지 적는 법은 잊어버렸다. 6 ‘쌩유!’ 말고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는 엽서를, 뭘 기억하려고 안 버렸을까. 결국 잊어버렸을까.

 

사랑과 걱정

1 서로의 연애 속살을 가장 적나라하게 공유했던 절친한 ‘동무’의 청첩장. 먼저 시집가는 그녀의 청첩장을 받고선 봉투를 선뜻 열지 못했는데, 그 친구도 덜렁 건네기 힘들었는지 안쪽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2014년, 남겨진 나는 외롭지 않았다. 2 편집팀 어시스턴트이자 방콕과 오키나와를 함께 여행한 지수의 2015년 메모.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리지만 훨씬 더 사려 깊은 후배. 선배의 연애를 걱정하며 (전혀) 우려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연애 상태를 (괜히) 언급하는 배려. 3 2004년 뮌헨에서 날아온 고등학교 동창의 엽서. 여행하기 하루 전에도 얼굴 본 사이였지만, 그땐 유럽에서 친구에게 엽서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 후 2011년, 나도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찾았지만 이 친구에게 엽서는 보내지 않았다. 나도 고추장에 밥 비벼먹고 싶었는데…. 보고 싶다, 소연이. 4 진주시에 있는 빠리지엔느는 떠올릴 때마다 배가 고파지는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이곳 사장님은 늘 불쑥, 하지만 다정하게 엽서를 보낸다. 미음을 유난히 크고 둥글게 쓰는 글씨체와는 달리 작고 가냘픈 손을 가진 셰프님. 2015년 6월, 이 엽서를 받고 다섯 달 뒤 빠리지엔느를 찾았을 때, 사장님은 크고 둥근 미음 모양으로 웃었다. 5 뉴욕 주 알바니에 있는 크레이그 초등학교 졸업 증서 뒷면. 1994년에 같이 졸업한 학우들이 나에게 메모를 남겼다. ESL 선생님의 내리사랑과 다운증후군 장애우 MIKE의 사랑이 유난히 선명하다. 희미했던 이 이름들을 지금 페이스북 검색창에 넣으면 무엇이 얼마나 더 선명해질까?

 

1989, 2015

1 < 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의 원제는 <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다. 1989년, 서른다섯의 아버지는 책에 직접 쓴 한 장의 편지를 더 보탰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우려와는 달리, 당신은 아직 늙지 않았다. 2 해외에서 레코드를 주문하면 종종 귀여운 쪽지가 들어 있다. 얼굴은 모르지만, 비슷한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친밀감. 박스는 버리고 메모는 레코드 슬리브 안에 끼워뒀다. 3 지금은 다퉈 멀어진 친구가 연말마다 먼 도시에서 보내온 카드. 우리는 그곳에서 지낼 때 매일 같이 쇼핑하고, 맛있는 태국 음식을 먹고, 집과 클럽을 가리지 않고 파티를 했다. 서울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선뜻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아, 이렇게 화해를 청해본다. 4 2014년, 온라가 처음 케이크숍을 찾았을 때 그는 트랩은 이미 식상하고, 저지 클럽이 흥미로워 호주가 궁금하며, 곡 수정 요청이 오면 엿 먹으라 말할 거라는 남자였다. 온라는 당시 방콕에 살았고, 언젠가 프랑스 남부의 여유로운 도시로 이사를 갈 거라 했다. 5 제19전투비행단 관제탑의 최규범 상사는 무서운 선임하사였지만, 어쩐지 크게 혼난 적은 없다. 그러니까, 꽤 예쁨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중요한 내용은 항상 굵은 사인펜으로 글씨를 썼고, 병사들은 그 말을 목숨처럼 여겨야 했다. ‘영공방위 임무’를 완수한 지 딱 10년이 지났다. 6 작년 여름, 시부야의 바에서 처음 만난 여자애는 댄서였다. 밤에는 춤을 추고 낮에는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녀가 춤을 잠시 멈추고 몰두한 그림엔 ‘Life is Art’라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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