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당신의 글씨

2016.05.06GQ

언젠가 당신이 내게 써준 것입니다. 보면서 깨닫습니다. 글씨에는 어느새 마음이 고여 있음을.

내가 아는 글씨

1 1996년, 포천. 상근예비역인 내가 전출을 가던 날, 한 고참이 남긴 메모다. 처음 읽었던 때나 지금이나 어쩐지 야릇한 기분을 느낀다. 적힌 전화번호를 눌러보니 결번이다. 2 1983년, 논산. 그때 한국 여자 배구는 미도파와 현대, 막강 라이벌 구도였다. 아홉 살 나는 이명희 선수에게 “누나를 좋아해요” 팬레터를 보냈다가, 그 후로 몇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는 안타깝게도 모두 분실했고, 이 사인만 달랑 남아 있다. 주장 곽선옥, 세터 이운임, 중앙공격수 박미희, 양쪽 오픈 공격수 한경애와 이명희…. 인터넷 세상, 누나의 지금을 찾았고, 부산에서 생활 체육 테니스 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음을 알았다. 사진도 한 장 봤는데 너무 아름다워 눈이 부셨다. 3 1993년, 논산. 고등학교 3학년 때,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가 이런 답장을 받았다. 그때는 ‘에디터’라는 직업도 몰랐지만, 어떻게든 이 카드로부터 뭔가 시작될 거라는 매우 막연하지만, 아주 강력한 믿음에 휩싸였다. 4 1996년, 대전. 내가 이등병이었을 때, 조카 다솜이는 다섯 살 유치원생이었다. 이 유치원생은 15년 후 홍대 미대생이 된다. 5 1997년, 논산. 지렁이도 이런 지렁이는 없을, 못 써도 이렇게 못 쓴 글씨는 다시 없을 글씨. 김천이 고향인 대학 선배 이성우는 이 글씨로 참 많은 편지를 보냈다. 나 역시 ‘내 글씨’로 참 많은 편지를 그에게 썼다. 6 1988년, 논산. 대전으로 전학 간 친구 승권이가 만들어 보낸 크리스마스카드. 카드를 열면 ‘X-MAS’라는 글자가 입체로 벌떡 솟아오른다. 지금도 완전 힘차게 솟아오른다.

 

꼭 쥐고 있는 시간

1 1996년, 충암고등학교 1학년 조성빈의 그림. 이러고 놀면서 주고받은 그림이 몇 장 더 있다. 나는 한 장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자는 시간을 아껴 매일 아침 출근 전에 음악을 만드는데, 요즘 TV에 나와서 “힙합 좀 하네”, “비트 좀 찍네” 하는 누구보다 백배는 쿨하다. 직업은 은행원. 2 2005년, 호주 국립대에서 가까워진 친구 요코 하다노의 편지. 한국어를 이렇게 열심히 읽고 쓰고 하더니, 요코는 거기서 만난 한국인 형과 결혼해 지금 한국에 산다. 가끔 전화하면 지금도 높은 톤으로 “우선오빠?!” 그런다. 3 나는 2001년 겨울 논산훈련소에서 가장 많은 편지를 받은 훈련병이었다. 6주간 받은 80여 통 중 40여 통이 아버지로부터였다. 그때 근무하던 학교 봉투와 편지지에 세로쓰기로 흘려 쓴 한글과 한자. 아버지는 가족 모두와 당신의 안부를 거의 스트레이트 기사처럼 썼다. “날씨가 매우 차진다”에서 “매우 바빴단다”를 지나 “보고 싶다”로 마무리되는, 나한테는 또렷한 이정표 같은 편지. 4 1997년, 같이 외고 입시를 준비하던 조한나의 편지. 한나는 이과생이면서 문과 입시에 수학1이 들어가서 어쩌냐고 나를 걱정하던 친구였고, 나는 늘 수학이 약점이었다. ‘나중에 대학 가서’ 우리가 하고 싶었던 건 ‘놀러도 가고 토론도 하는’ 것이었다. 5 아마 1997년, 큰누나 정소희가 Blur 5집과 같이 준 크리스마스 카드. 큰누나의 이 또렷한 손글씨와 아버지의 유려한 세로쓰기를 보면서 나는 어디쯤 있는지 생각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손글씨가 자꾸만 나를 반성하게 만든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누가 썼는지, 어떤 건 왜 갖고 있는지도 모르는 글씨만 모았다. 1 ‘지식 –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은총’이라고 적혀 있다. 이 비범한 말을, 유치한 새 모양(연필로 그린 흔적이 남아 있다. 누군가 직접 그려서 가위로 오린 것이다)의 종이에 써준 사람은 누구인가. 2 친구가 안동 병산서원 가는 길을 적어준 메모지 뒷장이다. 잘 아는 술집에 앉아서 쓰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에게 물어보니 자기가 그린 게 아니라고.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작가는 ‘FUCK’이라는 글자에 유난히 공을 들였다. 마음에 드는 세계관이라서 버리지 않았다. 3 빌린 CD를 MD에 복사하고 열심히 곡 목록을 옮겨적던 시절이 있었다. 스무 살 무렵일 텐데, 일본어를 잘 쓰지도 못했고 내 글씨도 아니다. 친구 중에 일본어를 이만큼 잘 쓰는 사람도 없었는데? 4 군대 후임이 여자친구 ‘사랑이’에게 보낸 편지가 왜 내게 미개봉으로 있을까. 5 김성근 감독이 SK 와이번스를 이끌던 시절, 2009년 6월 3일 대 롯데 전의 야구 기록지. 일 때문에, 일일 야구 기자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야구 기록지 적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그날 사수 역할을 한 선배가 이 기록지를 바탕으로 설명해줬다. KBO 기록실에서 역대 경기 기록원의 이름을 제공하지 않아 누가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박정권이 4회 솔로홈런을 쳤으며,SK가 홈경기에서 2:1로 이겼다는 기록은 선명하지만, 야구 기록지 적는 법은 잊어버렸다. 6 ‘쌩유!’ 말고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는 엽서를, 뭘 기억하려고 안 버렸을까. 결국 잊어버렸을까.

 

사랑과 걱정

1 서로의 연애 속살을 가장 적나라하게 공유했던 절친한 ‘동무’의 청첩장. 먼저 시집가는 그녀의 청첩장을 받고선 봉투를 선뜻 열지 못했는데, 그 친구도 덜렁 건네기 힘들었는지 안쪽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2014년, 남겨진 나는 외롭지 않았다. 2 편집팀 어시스턴트이자 방콕과 오키나와를 함께 여행한 지수의 2015년 메모.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리지만 훨씬 더 사려 깊은 후배. 선배의 연애를 걱정하며 (전혀) 우려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연애 상태를 (괜히) 언급하는 배려. 3 2004년 뮌헨에서 날아온 고등학교 동창의 엽서. 여행하기 하루 전에도 얼굴 본 사이였지만, 그땐 유럽에서 친구에게 엽서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 후 2011년, 나도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찾았지만 이 친구에게 엽서는 보내지 않았다. 나도 고추장에 밥 비벼먹고 싶었는데…. 보고 싶다, 소연이. 4 진주시에 있는 빠리지엔느는 떠올릴 때마다 배가 고파지는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이곳 사장님은 늘 불쑥, 하지만 다정하게 엽서를 보낸다. 미음을 유난히 크고 둥글게 쓰는 글씨체와는 달리 작고 가냘픈 손을 가진 셰프님. 2015년 6월, 이 엽서를 받고 다섯 달 뒤 빠리지엔느를 찾았을 때, 사장님은 크고 둥근 미음 모양으로 웃었다. 5 뉴욕 주 알바니에 있는 크레이그 초등학교 졸업 증서 뒷면. 1994년에 같이 졸업한 학우들이 나에게 메모를 남겼다. ESL 선생님의 내리사랑과 다운증후군 장애우 MIKE의 사랑이 유난히 선명하다. 희미했던 이 이름들을 지금 페이스북 검색창에 넣으면 무엇이 얼마나 더 선명해질까?

 

1989, 2015

1 < 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의 원제는 <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다. 1989년, 서른다섯의 아버지는 책에 직접 쓴 한 장의 편지를 더 보탰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우려와는 달리, 당신은 아직 늙지 않았다. 2 해외에서 레코드를 주문하면 종종 귀여운 쪽지가 들어 있다. 얼굴은 모르지만, 비슷한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친밀감. 박스는 버리고 메모는 레코드 슬리브 안에 끼워뒀다. 3 지금은 다퉈 멀어진 친구가 연말마다 먼 도시에서 보내온 카드. 우리는 그곳에서 지낼 때 매일 같이 쇼핑하고, 맛있는 태국 음식을 먹고, 집과 클럽을 가리지 않고 파티를 했다. 서울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선뜻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아, 이렇게 화해를 청해본다. 4 2014년, 온라가 처음 케이크숍을 찾았을 때 그는 트랩은 이미 식상하고, 저지 클럽이 흥미로워 호주가 궁금하며, 곡 수정 요청이 오면 엿 먹으라 말할 거라는 남자였다. 온라는 당시 방콕에 살았고, 언젠가 프랑스 남부의 여유로운 도시로 이사를 갈 거라 했다. 5 제19전투비행단 관제탑의 최규범 상사는 무서운 선임하사였지만, 어쩐지 크게 혼난 적은 없다. 그러니까, 꽤 예쁨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중요한 내용은 항상 굵은 사인펜으로 글씨를 썼고, 병사들은 그 말을 목숨처럼 여겨야 했다. ‘영공방위 임무’를 완수한 지 딱 10년이 지났다. 6 작년 여름, 시부야의 바에서 처음 만난 여자애는 댄서였다. 밤에는 춤을 추고 낮에는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녀가 춤을 잠시 멈추고 몰두한 그림엔 ‘Life is Art’라 쓰여 있다.

    에디터
    장우철, 정우성, 정우영, 손기은, 유지성
    포토그래퍼
    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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