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신라, 사자와 원숭이의 경주

우리가 전통이며 역사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개 조선과 조선에 관한 것이기 쉽다. 그러는 사이 신라는 온통 미스터리가 된 게 아닐까? 금으로 은으로 그렇게도 화려한 치장을 했던 왕국. 왕의 무덤을 수호하는 석상으로 아라비아인과 익살스런 사자를 세운 나라. 불교의 나라, 여왕의 나라, 왕릉에 로마의 유리잔을 묻은 고도. 신라의 향가 ‘헌화가’를 떠올리며 꽃 한송이 꺾어 경주로 들어갔다.

경주 남산 숲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 자객 섭은낭 >은 9세기 당나라 남쪽 어딘가가 배경인데, 여름을 오가는지 보이는 풍경이 온통 싱그럽다. 소리도 풍부하다. 이만큼이나 가까운 새소리와 저만치까지 먼 북소리가 꿈인 듯 섞여 흐른다. 무르익은 태평성대. 자객의 검조차 피의 살기보다는 버들의 물기가 스민 듯하니, 은낭(서기)은 마침내 임무를 스스로 끊어내고 길을 떠난다. 돌아오리라,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비장하게 떠나는 게 아니라 동반자와 방울방울 웃으며 소풍가듯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렇게 길을 떠나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장면인데 이런 내레이션이 함께 나온다. “두 사람은 신라로 갔다.” 나는 ‘이 얼마나 호젓한 이야기인가?’ 생각했다. 9세기 신라라면 원성왕 사후 소성왕,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 순으로 왕위가 이어지는 때. 마침내 두 사람이 도착한 경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흥덕왕릉이 있다. 집들과 축사와 밀밭과 과수원이 뒤섞인, 평범하다 말하면 그뿐인 마을. 이런 곳에 왕릉이 있다고는 잘 그려지지 않는 길이 공터에 닿으면 갑자기 숲이 시작된다. 소나무숲이다. 수많은 ‘찍사’가 안개 낀 아침마다 장사진을 이룬다 하나, 한낮인 데다 성글게 빗방울마저 떨어지는 지금은 다만 적막하다. 숲에서 본 숲은 칼집보다 깊은 그늘에 속해 있을 뿐 잡목도 넝쿨도 없이 소나무와 소나무로부터 나온 것들로만 가득하다. 떨어진 솔잎이 얼마나 겹쳐졌는지 바닥이 숫제 푹신푹신했다.

이렇게 숲을 통과했나 싶을 때 사람보다 곱절은 큰 석상이 넷 나온다. 무인상과 문인상이라 불리는 석상이 각각 둘씩 마주섰는데, 가만 보면 생김과 차림이 낯설다. 알려진바 그것은 아라비아 사람과 저 중앙아시아 사람의 모습이다. 우선 얼굴을 보면 무인상은 크게 커브를 그리는 매부리코와 왕방울만 한 눈이, 문인상은 가는 눈과 긴 귀가 대번에 ‘나는 외국 사람입니다’ 스스로 소개하는 모양새다. 게다가 바닥에 세우면 허리까지 닿는 큰 칼, 풀어 헤친 머리를 질끈 묶은 띠, 당시 외국인들이 주판을 넣어 다니는 용도로 썼다는 주머니, 전적으로 신라와는 다른 옷차림까지. 이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대개 간단한 문장으로 처리된다. “신라는 외국 문물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그런데 내게는 간단하지 않았다. ‘외국’이라니, ‘문물’이라니, ‘교류가 활발하였다’니. 그것도 한 개인의 이색 취향쯤이 아니라, 왕조의 절대권력을 수호하는 석상이 외국인이라니. 질문은 갑자기 어딘가로 빨려든다. 신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흥덕왕릉 무인상

능으로 다가서면 사람이 올라탈 수도 있을 법한 크기의 사자상이 또한 넷이다. 그런데 표정과 포즈가 가관이다. 사자라니 사자인 줄 알지, 불독이라 했으면 불독이구나 했을지도 모를 일. 절대권력을 수호하는 상징이라기에 그것은 어쩐지 우스꽝스럽다. 부풀린 듯 둥그런 덩치에 모두 고개를 옆으로 틀고 있는데, 두 마리는 서로를, 두 마리는 아예 다른 곳을 본다. ‘수호’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차라리 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거나 아예 딴청을 피우는 뉘앙스다. 이건 뭘까. 그냥 웃음이 나오는 이 유쾌한 활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사자의 젖은 뒷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보았다. 차디차다. 언제나 그랬을 것이다. 천 년 전부터 여기서는. 신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비가 갠다.

흥덕왕릉 사자상

시내로 나와 국립경주박물관에 갔다. 나는 마치 분실물을 찾는 사람처럼 이렇게 묻는다. “여기 로마 유리잔이 어디에 있나요?” 직원이 앞서 걷고, 그를 따라간다. 리듬이 생긴다. 마침내 문을 열기 직전까지의 긴장 같은 것. “경주박물관에 로마 유리잔이 있어”라는 말을 처음 들은 순간으로부터 그 긴장은 여태 숙성되었던 걸까? < 실크로드와 경주 >라는 책의 머리말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일환으로 중국과의 관련성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아시아에 병존하는 여러 문화권과의 교류나 그 결과로 초래된 문화적 다양성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로마의 유리잔은 황남대총에서 출토되었다. 그 유리잔이 만들어져 여기에 놓이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하건대, 질문은 반복된다. 신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신라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떻게 말했을까. 그 말과 지금 경상도 사투리는 얼마나 통할까.

한편, 박물관 특별 전시로 < 탁본으로 보는 신라 원숭이 >가 열리고 있다(5월 1일까지). 전시 소개글은 이차돈의 순교를 묘사한 < 삼국유사 >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곧은 나무가 부러지고 원숭이가 떼지어 울었다.” 경주에 원숭이가 살았을까? 모르는 일이다. 한반도에 원숭이가 살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렇게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던 때, 장터로 원숭이 한 마리 끌고 다니는 이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번에 전시하는 원숭이 탁본은 능묘의 호석에 조각된 것을 입체 탁본으로 만든 것으로, 김유신 장군의 무덤, 성덕왕릉, 구정동 방형분, 경덕왕릉, 원성왕릉, 흥덕왕릉, 진덕왕릉에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원숭이의 생김생김이 어쩐지 귀여운 만화 캐릭터 같다. 원숭이라기 보다, ‘손오공’이라는 이미지에 가깝달까? 전시 소개글에는 이런 질문이 있다. “당시 장인들은 원숭이를 직접 보고 새겼을까요, 아니면 상상하며 새겼을까요.”

 

원성왕릉으로 가려다 남산자락 옥룡암에 잠시 들르기로 한다. 거기에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이 있다. 집채보다 커다란 바위를 빙빙 둘러 가며 그림을 그려놓았으니 대번 울주 반구대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낙서 같기도 하고 신호 같기도 한 도상은 미륵도 있고, 구름도 있고, 보리 수나무와 사자도 있다. 한참을 거기 앉아 쉬었다. 혼자서든 여럿이든 누구라도 이곳을 비밀로 여기기를, 그런 기대가 자연스러웠다.

옥룡암 남산탑곡마애불상군.

괘릉리 원성왕릉은 경주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동해남부선 철도와 나란한 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나온다. 이 도로에는 ‘악명 높은’이라는 수식이 달리기도 하는데, 덤프 트럭이 그 덩치로 스피드를 내는 도로라 그렇다. 하지만 4월의 도로는 온통 흩날리는 꽃잎의 세상, 도로를 벗어나 부드럽게 휜 길로 들어서면 거기에 능이 있다. 이번엔 숲이 막아서지 않는다. 봉분 앞이 훤하도록 들판으로 펼쳐진다. 흥덕왕릉과 마찬가지로 원성왕릉에도 사자상이 넷, 무인상이 둘, 문인상이 둘이다. 이번에도 무인상과 문인상은 외국인의 얼굴이고, 사자들은 더욱 우스꽝스럽다. 아예 잇몸까지 다 드러내고 웃는 놈도 있다. 그것들에 차례로 꽃을 바친다. 활짝 핀 클레마티스다.

원성왕릉 무인상
원성왕릉 사자상

신라 향가 중에 ‘헌화가’를 좋아하는 것은, 그 노래가 어디까지나 꽃에 관한 것이라서였다. 아름다운 수로부인이 절벽에 핀 꽃을 꺾어달라고 하자, 검은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치며 지었다는 노래. 길들인 해석과 지정된 배경설화가 버젓하다지만, 나는 멋대로 이 노래가 쓰이는 장면을 상상한다. 지체 높고 우아한 수로부인은 과연 꽃을 애호하는 여성이었는데, 하필 절벽에 핀 꽃이 낯설고 기이하여 저 꽃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주위에 묻는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자, 검은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꽃의 이름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한다. 노래는 거기서 멈춘다. 나는 말하자면 그 꽃이 이 땅에 없던 외래종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수로부인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은 게 아닐까 추측하는 것이다. 그리고 검은 소를 몰고 가는 노인이란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 그 꽃을 알고 있는 나라에서 온 사람을 표현한 게 아닐까 한다. 갑자기 나는 그 꽃이 클레마티스일 거라고 정해버린다. 무인상의 오른 주먹 위에, 사자상의 머리 위에 클레마티스를 올려놓고 가만히 쳐다본다. 사방이 고요하다.

거기로 아이들이 왔다. 수학여행 인솔교사가 마이크를 들고 말한다. “여러분 여기가 괘릉 입니다. 괘릉의 ‘괘’자는 공중에 걸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에 나는 놀란 사람처럼 되었다. “이 곳이 연못이었기 때문에, 관을 공중에 띄워서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바닥을 한 번 보세요. 축축하지요? 여기는 연못이 있던 자리입니다.” 신라라는 나라가 있었다. 왕께서 돌아가시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하필 연못 위에 관을 매달았다. 그리고 큰 칼을 든 외국인과 이빨이 다 드러나게 웃는 사자를 무덤 앞에 세웠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알 수가 없다. 소나무에 기대어 있다가 몸을 세우니 어깨에 끈끈한 송진이 묻었다.

흥덕왕릉 소나무숲

클레마티스를 머리에 얹고 웃는 사자를 보고 아이들이 덩달아 웃는다. 그때 나는 태국에서 보았던 꽃과 미소를 떠올렸다. 수많은 불상을 표현할 때면 으레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식의 표현이 붙었지만, 한 번도 불상으로 부터 ‘미소’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태국에서 두 손을 모으고 인사하며 미소짓는 사람들을 대하자, 바로 불상의 은은한 미소라는 이미지가 환기되었다. “당신도 깨달았나요?” 꽃을 건네며 미소를 짓는 것. 태국은 불교의 나라다. 신라는 불교의 나라였다. 나는 웃는 사자를 보며 속으로 말한다. “너는 어디서 왔니. 너는 무엇을 알고 있니.” 신라에 (또한 태국에) 사자는 살지 않았다. 사자는 아프리카와 인도에 살았다. 신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해가 진다.

시내로 돌아오니 조명이 첨성대를 별보다 밝게 만든다. 멋이라고는 없는 얘기. 어차피 이 땅에서 ‘관광’의 이름을 달면 일절 기대하는 바가 없으니, 불빛이 많은 황오동이나 걸어볼 참. 사실은 거기에 내가 ‘아시아의 골목길’이라 이름 붙인 길이 있다. 2016년 현재 경주에 사는 외국인은 1만 명에 다다른다. 경상북도 전체를 기준으로 단연 많은 숫자인데, 그 숫자에 대한 답으로서 ‘아시아의 골목길’을 걸으면 퍽 흥미 롭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태국,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네팔, 각국의 국기를 쇼윈도 가득 채운 휴대전화 가게가 여럿인 데다, 아시안 푸드 마켓, 베트남 음식점, 빨간 바탕에 노란 한자로 쓴 ‘아세안 중국식품점’이나 금색 영어로 쓴 ‘신밧드’ 간판, 피어싱과 핸드메이드 액세서리를 취급하는 ‘페르시아’라는 가게까지. 어디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 하필 경주 한복판에 있다. 천 년 전 아라비아인의 형상을 왕릉에 세웠던 도시에, 천 년 후 이런 골목길이 있다. 두 사실 사이엔 우연이 깃들었을 뿐이지만, 우연치고는 매우 야릇한 우연이 아닌가 한다.

월성의 벚꽃과 남천의 소금쟁이.

긴 밤을 지나 아침이 되었다. 8시에 문을 여는 교동 교리김밥 본점은 7시부터 줄이 생긴다. 그 꼬리에 서자니 뭔가가 아깝기에, 거기에 서지 않고 차를 몰았다. 경주는 어디서나 시야가 널리 트인다. 건축물 고도 제한이 있어서 15 층 이상 건물이 들어서지 못한 까닭이(이태 전 부터는 조례를 수정해 25층 아파트 단지를 짓고 있다) 있지만, 지리적 환경이 본디 그렇다. 또한 산은 이리로 육박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펼쳐져 있다. 사방 어디를 보든 산과 산이 겹치면서 푸른 선을 만드니쉼 없이 그리로 달려 가고도 싶다. 가장 흐리게 푸른 저 선까지. 오늘은 경주에서 마라톤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나는 차를 멈추고 월성 아래 남천 모래톱에 선다. 월성의 벚꽃이 지고, 남천의 물결이 흔들린다. 물가로는 소금쟁이가 있다. 이걸 참 오랜만에 보는구나. 소금쟁이는 어디서 왔을까? 소금을 소금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보다 전이겠지. 그것들이 후두둑 발을 뗄 때마다 수면 위로 무수한 동심원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경주는 지금 소금쟁이의 시간을 지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