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동네 밥집같은 프렌치 레스토랑

2016.05.31손기은

프렌치 요리가 봄날을 지나면서 더 가벼워졌다. 확 달라진 공기는 새로운 동네에서 시작됐다. 연남동과 성수동에 이제 막 문을 연 프렌치 비스트로 네 곳을 찾아갔다. 메뉴판을 보며 숫자 계산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가격, 눈치 볼 것 없는 분위기, 무엇보다 훌륭한 음식. 서울의 프렌치 비스트로는 이제 진짜 시작이다.

랑빠스81의 전지오 셰프와 주방 안쪽의 송홍윤 셰프. 사퀴테리를 직접 만드느라 브레이크 타임에도 쉴 시간이 없다.

수평이 안 맞아 덜그럭 거리는 원형 테이블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의 코트 자락이 눈앞을 스쳐도 그러려니 하며, 파리의 어느 골목 작은 비스트로에서 두 시간 내내 오로지 밥만 먹는 시간. 거창한 감상은 관광객만의 것이겠지만, 그곳에서 먹은 접시 위 오리 가슴살 구이의 맛은 바랜 적이 없다. 문화를 먹는다는 말은 괜한 꾸밈일지도…. 맛있는 접시 앞에선 오로지 혀만 펄럭인다.

다행히 국경을 넘어야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절은 저 멀리 지나가고 있다. 일본에서 최고의 파스타 한 접시를 비운 적도, 서울에서 파리 뒷골목을 맛본 적도 많다. 하지만 오늘 저녁 식사 장소를 정하기 위해 ‘프렌치’라고 말하는 순간 덜커덕 머뭇거렸다면, 그건 어떤 장벽 때문일까? 아직까지 프렌치 요리는 우리나라에서 ‘고급 양식’으로 해석된다. 파스타나 피자에 비하면 마음먹고 식당을 찾아가야 하는 요리다. 와인을 곁들이면 가격대는 더 올라간다. 월급 탈 날만을 기다리거나,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원하는 술과 메뉴를 모두 주문한 뒤 계산서를 보지 않은 적도 있다. 문을 연 지 이제 한 달 된 프렌치 비스트로 ‘앙프랑뜨’의 그레고리 드프레즈 셰프도 10년째 한국에 살면서 비슷한 벽을 느꼈다.

앙프랑뜨는 양고기 메뉴가 특화돼 있다. 사진 속은 양 정강이 요리. 양 정강이를 팬 프라이한 후 스튜처럼 와인 베이스 소스에 졸인다. 소테한 줄기콩, 느타리, 알감자를 함께 냈다. 문을 연 지 한 달째, 이 메뉴가 너무 잘나가는 바람에 주방은 즐거운 고민에 휩싸였다.

“처음 한국에 온 2001년, 그리고 프랑스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2007년까지만 해도 프렌치 요리는 한국에서 특별한 음식을 즐기는 부유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선보이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최근엔 달라졌죠. 외식 사업차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생각도 바뀌고, 한국에서도 새로운 세대가 출현했어요. 비스트로다운 비스트로가 프렌치 요리를 친근하게 만드는 기능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건 셰프들의 열정이기도 해요. 이제 프렌치가 재산을 탕진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음식이 됐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열정이요.”

프렌치 요리는 프랑스의 기념품이 아니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동네 밥집처럼 편하게 다가온 경험이 희미했기에…. 남 몰래 어색했던 이 기운은 눈에 띄게 낮아진 가격을 쬐고 천천히 녹는 중이다. 과거에 비해 수입 식자재의 가격이 내려간 덕도 있고, 셰프들이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덕도 크다.

 

 

키친로딩의 김 로이든 셰프는 남기는 재료 하나 없이 주방을 운영하려고 한다. 성수동에 있는 키친로딩은 지난해 11월부터 기존의 함박스테이크 전문점 콘셉트를 버리고 새로운 셰프를 영입하며 프렌치 비스트로로 전향했다.

키친 로딩의 생선요리. 프라이팬으로 구운 대구 위에 래디시, 한련과 꽃과 잎, 김부각처럼 구운 방풍나물, 구운 케일, 트레비소 등을 마구 올렸다. 금귤 발효 소스는 조금만 더해 풀 향을 헤치지 않게 했다.

“프렌치 요리의 식재료를 최대한 국내에서 공수하려고 합니다. 아티초크가 비싸다 싶을 때 국산 나물로 대체해보는 식이에요. 푸아그라가 이렇게 비싼데, 꼭 이걸 써야 할까? 그럴 땐 과감히 빼고 다른 메뉴를 짜는 거예요. 회사가 청송에 농장을 가지고 있어 채소류도 저렴하게 받고 있고, 남양주 ‘준혁이네’, 광명 ‘잇츠허브’ 등 농장에서 직송으로 거래하고 있어요. 제철이라 가격이 저렴해진 재료를 쓰기 위해 그때그때 메뉴를 바꾸고, 남으면 발효시키거나 식초를 만들어요. 사과 껍질로 식초를 만들거나 남는 청어로 피클을 만들죠. 정말 쓰지 못하는 식재료는 모아다가 퇴비를 만들어 다시 청송 농장으로 보내고요. 메뉴 가짓수를 줄이고, 대신 자주 바꾸는 식으로 운영해야 해요. 작은 비스트로라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요.”

대신 셰프는 1인 다역을 견딘다. 오픈 주방이라 고객 응대와 서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오전 8시부터 장을 보고 밤 11시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 그 덕에 저녁 3코스에 3만8천원, 점심에 판매하는 생면 파스타는 1만2천원이 가능해진다.

 

 

렁팡스는 쉴 새 없이 기계가 돌아가는 성수동 골목에 두 달 전에 자리를 잡았다. 성수동이라는 동네 덕에 메뉴판의 가격이 훨씬 가벼워지기도 했지만, 이 골목이 식당의 공기도 바꾸어놓았다. 수마린, 메종 드 라 카테고리에서 일하던 김태민 세프는 밤이면 착 가라앉는 이 골목이 맘에 들었다.

토마토소스를 더해 비린 맛을 잡은 폴렌타와 한쪽만 구운 새우. 파슬리와 레몬 제스트를 섞은 그레몰라타를 새우 위에 올리고 샬롯과 크레송을 흩뿌린 뒤 레몬즙과 소금, 후추를 더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북적이는 걸 싫어해요. 뚝섬역 쪽도 아니고 이 골목은 정말 도박일 수도 있는데, 취향을 따르기로 했어요. 파리의 네오 비스트로 몇 군데를 갔는데 관광지가 아닌 구석에 자리 잡은 걸 봤어요. 물론 성수동은 그곳보다, 그리고 청담동이나 한남동보다 프렌치에선 더 척박하니까 훨씬 쉽고 편안한 메뉴로 구성했어요. 양파수프 같은, 정말 클래식한 비스트로 메뉴보다는 프렌치가 깔려 있지만 흔하게 접하지 못한 접시를 고민했죠. 앤다이브, 아스파라거스, 관자, 새우 같은 익숙한 재료 안에서 쉽게 쉽게요. 프렌치를 처음 접하는 이들은 ‘이런 것도 있네’라는 반응이 나오고, 프렌치에 익숙한 이들은 ‘쉽네’ 할 수 있게요. 너무 신기하거나, 너무 뻔한 건 피하고 싶었어요.”

구석 자리를 좋아하는 셰프의 취향을 반영해 테이블 사이사이에 좁은 벽을 세웠다. 구석 자리에 끼어 앉아 있는 기분이 비스트로의 맛을 살렸다. 코스를 내지 않고 단품으로만, 디저트까지 다 합쳐서 열다섯 가지 남짓한 선택지도 김태민 셰프를 닮았다.

네오 비스트로는 ‘뉴 스타일 비스트로’, ‘비스트로노미’라고도 부른다. 파인 다이닝을 내는 레스토랑과 편하게 식사할 수 있는 비스트로의 중간 개념쯤 된다. 1992년, 이브 캉데보르드 셰프의 ‘르 꽁뜨와’가 새로운 비스트로의 1세대라면, 2006년 문을 연 이나키 애즈피타르트 셰프의 ‘르 샤토브리앙’ 같은 곳이 네오 비스트로를 이끈 두 번째 물결이다. 2011년부터 생겨난 ‘사튄’, ‘셉팀’ 등도 네오 비스트로의 강자들. 강한 소스보다는 재료의 맛을 살리고, 채소를 비롯한 식재료를 정성껏 공수하고, 재기발랄한 메뉴를 선보인다. <비스트로노미>의 저자인 제인 시갈은 기존 비스트로와 네오 비스트로를 이렇게 비교했다. 기존 비스트로가 흰색이나 체크 식탁보를 깔았다면 네오 비스트로는 아무것도 깔지 않고, 기존 셰프들이 더블 브레스티드 흰색 셰프 재킷을 입었다면 네오 비스트로 셰프들은 파란색 설거지용 앞치마와 티셔츠를 입고 여기저기 타투를 한다. 화장실의 에이솝 비누도 네오 비스트로의 필수품이다.

서울의 비스트로는 지금 어느 지점쯤에 흩어져 있을까. 비스트로도,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도, 위아래 그득한 프랑스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 채워야 할 빈 공간이 많다. 파인 다이닝과 함께, 편하게 프렌치를 즐길 수 있는 비스트로가 동네 곳곳을 채우면 네오 비스트로도, 최근 프랑스에서 자주 보이는 동남아 문화가 섞인 새로운 형태의 비스트로도 갑자기 툭 튀어나올 지 모른다.

 

 

연남동 랑빠스81은 비스트로보다는 ‘부숑’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다. 부숑은 리옹식 선술집을 뜻하고 육가공 메뉴가 더 풍성하다. 이태원에서 프렌치 파인 다이닝과 베이커리를 운영하던 그레과르 미쇼 셰프가 전지오 셰프와 손잡고 올해 초 문을 열었다. 그레과르 미쇼 셰프는 우직하게 클래식 프렌치를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다. 함께 일하는 전지오 셰프 역시 그 점이 맞아 친구이자 동업자가 됐다고 설명한다.

와인과 함께 먹기 좋은 토끼고기 테린.

“빠떼 깡파뉴, 까술레, 오리 리예트 등 정말 전형적인 부숑의 메뉴들로 채웠어요. 간도 과감하고 짭짤하게 와인과 마시기 좋도록 했고요. 프레시 소시지 7~8종, 드라이 미트 7~8종 정도를 늘 갖춰두려고 해요. 다양한 사퀴테리를 직접 만드니까 시도를 많이 해볼 수 있어 좋아요. 물론 사퀴테리가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한 프렌치 요리는 아니겠지만, 요즘 손님들은 거부감도 없더라고요.”

서울의 프렌치 비스트로가 진짜 현지처럼 될 수는 없다. 연남동과 성수동이라는 친근한 동네에 생긴 저렴한 프렌치 비스트로라도 여전히 프렌치 요리를 연착륙 시키기 위해 고민한다. 한국 손님들을 위한 아이디어, 타협, 양보의 공간을 널찍하게 열어둔다. 그중 하나가 ‘파스타’를 찾는 손님을 위한 메뉴다. 프렌치 식당이지만 이탤리언이 익숙한 손님들이 (특히 점심에) 파스타를 원한다. 물론 프렌치 요리에도 파스타가 있고 가니튀르(주요리에 곁들이는 재료)로 파스타를 넣을 때도 있다. 하지만 프렌치 요리의 색을 선명하게 유지하기 위해 모두에게 익숙한 파스타는 피하려고 노력한다. 앙프랑뜨에서는 허브 베르데 소스를 개발해 토마토소스를 피했고, 스타게티 면보다는 곡물처럼 생긴 프레골라를 선택했다.

앙트레, 메인, 디저트 순서로 서브되는 문화에 익숙지 않거나 음식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해 셰프가 웨이터의 역할까지 소화하는 경우도 잦다. 키친 로딩의 로이든 김 셰프 역시 설명을 길고 자세하게 하는 편이다. 랑빠스81의 전지오 셰프도 요즘 주방보다 홀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길다.

 

문득 갈비찜이 먹고 싶다거나 불현듯 냉면이 떠오를 때는 많지만, 그간 프렌치 요리에 갈증을 느낀 적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지난 일주일간 연남동과 성수동의 작은 식당에 앉아 프렌치 요리를 싹싹 비웠더니 머릿속의 프렌치 식당들이 파르르 살아났다. 가장 동시대의 네오 비스트로를 구현하고 있는 제로 콤플렉스, 청담동 프렌치 비스트로의 두 터줏대감인 비스트로 욘트빌과 레스쁘아 뒤 이부, 여자 오너 셰프가 지키고 있는 해방촌 꼼모아와 방배동 그린 테이블, 그리고 더 분방한 프렌치를 보여주는 금호동 고메트리와 일본 식재료를 가미한 프렌치 파인 다이닝을 보여주는 신사동 엑스키까지…. 지금 이 순간, 너무 당긴다.

고트 치즈와 마스카포네를 섞어 엔다이브 위에 올린 요리. 렁팡스 창가 자리에 와인과 함께 차렸다. 중학교 친구이자 최근 미슐랭 ‘원스타’를 받아 화제가 된 리옹 ‘르 파스탕’의 하석환 소믈리에가 와인 리스트를 짜는 데 도움을 줬다. 대학 동창인 ‘르 파스탕’의 이영훈 셰프가 선물한 파란 앞치마를 입은 김태민 셰프는 촬영이 끝나자 저녁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에디터
    손기은
    포토그래퍼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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