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늘은 일요일, 마감이 끝을 달리고 있다. 연일 찬란한 날씨 때문에 놀지도 못하고 마감만 하는 게 괴로웠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그런데 봄비가 이토록 시원할 줄이야. 이런 날은, 특히 이런 일요일은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빗소리나 들으며 집에만 있고 싶다. 수박 잘라 먹고, 배 깔고 누워만 있고 싶은 날씨. 사무실이 답답해서 괜히 커피나 사러 밖으로 나가봤지만 옷과 신발만 흠뻑 젖었고 기분은 더 별로다. 비 오는 일요일 저녁 사무실은 모두가 자리에 있지만,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다. 난 화보 제목이 아직 국장님을 통과하지 못했고, 작은 원고 하나가 남아 있다. 그리고 패션팀 PS 제비뽑기에 또 당첨됐다. 세 달째다. 왠지 뭔가에 진 기분. 담배를 피우고 들어온 후배를 쳐다보고 우는 표정을 지었더니 살며시 에그 타르트를 내 책상에 가져다 놓는다. 맛있어 보인다. 이 에그 타르트는 대체 어디서 났을까. 정적을 깨고 편집장이 방에서 나왔다. 미술팀에서 ‘구운 양파’ 과자를 발견하고 기뻐한다. 옆에 앉은 선배는 아까부터 배가 고팠다며 짬뽕을 먹으러 가자고 수시로 얘기하는데, 일단 모르는 척하는 중이다.

몇 분이 흘렀다. 결국 짬뽕을 먹으러 나왔다. 회사 근처 중국집이 모두 문을 닫았다. 뭘 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이때다 싶은지, 짬뽕을 먹고 싶다던 선배가 곱창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같이 나온 다른 선배가 “난 곱창 싫어” 대차게 거절한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우리 셋은 결국 냉면집에 갔다. 난 물냉면과 만두, 짬뽕을 원했던 선배는 갈비탕, 다른 선배는 뭇국을 시켰다. 맛이 다 그냥 그랬다. 와중에 짬뽕을 외치던 선배가 갈비탕을 정말 맛깔나게 먹는다. 고기는 정말 오랜만이라면서. 그건 거짓말이다. “엊그제 나랑 평양냉면이랑 제육 먹었잖아요. 제육은 고기 아니에요?”라고 말하자 눈을 얇게 뜨고 흘기더니, 다시 갈비를 제대로 뜯는다. 정말이지 군침이 돌 정도로. 우린 반 이상 남겼고, 갈비를 힘차게 뜯은 선배는 넉넉히 시킨 남은 만두까지 말끔히 마무리했다. 하정우가 울고 갈 정도다. 먹는 CF에 나가도 손색이 없겠다.

다시 들어온 사무실은 훨씬 더 조용하다. 여느 때보다 이달 마감은 참 조용하다. 늘 그렇듯 일찌감치 원고를 끝낸 건 디렉터다. 편의점에서 두루 사온 과자와 음료수, 젤리를 사람들이 찾기 쉽도록 보기 좋게 나열하더니, 사람들의 반응이 없자 곧 집중해서 미드를 보고 있다. 사람들을 파악하려고 두리번거리다가 미술팀 후배와 눈이 마주쳤다. 배시시 웃는다. 저녁 9시 즈음이 되면 건물에서 절약을 위한 정전 방송이 나온다. 갑자기 불이 꺼졌다가 누군가 전화를 하면 곧 환하게 켜진다. 이런 방송이 나올 때면 초등학교 민방위가 생각난다. 방송이 나오면 하나같이 우르르 책상 밑으로 들어가던 기억. 요상하게도 잊고 있었던 책상의 모양이랑 바닥의 색깔까지 전부 기억난다.

다시 몇 시간이 흘렀다. 밤이 깊었다. 화보 제목으로 몇 가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허튼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용기 내어 편집장 방으로 향했다. 결국 제목은 ‘다크 나이트’로 정해졌다. 속이 다 후련하다. 오늘 무슨 일인지 머리를 양갈래로 발랄하게 묶은 피처팀 푸드 담당 에디터가 슬며시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고 밝힌다. 어쩐지. 갈비탕을 든든하게 먹은 선배가 기분이 좋은지 책상 구석에서 이것저것을 꺼낸다. 밀라노에서 사온 귀엽게 생긴 정어리 캔이랑 시트 마스크, 가격은 합리적이고 성능은 좋기로 유명한 화장품 몇 개를 건넨다. “이거면 되겠니?” 푸드 담당 에디터가 활짝 웃는다. “이제야 생일이 실감나요.” 짠하다. 매년 생일에 마감을 하겠구나. 작은 것에 감사하는 표정과 양갈래 머리가 참 잘 어울린다. 내일 이맘때도 비가 오면 좋겠다. 그땐 집에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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