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

2016.06.01이충걸

한국도 요샌 커피를 아는 사람들의 나라가 되었다. 커피 감별에 필요한 기술-집중력, 정확한 감각 인지, 결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웬만한 커피 전문가들에게 쫄지 않고, 니들이 좋다고 마시는 커피는 다 구정물이라고 외치는 광야의 커피 선지자도 한 아름이다. 강렬한 커피를 강렬한 사람들에게 마시게 하는 강렬한 커피숍도 늘었다. 도쿄에서 부드럽고도 이상한 드립 커피를 마시고, 약간의 진저 브레드 맛이나 꿀맛, 토마토 수프의 톡 쏘는 달콤함을 감지한 순간, 전에 마시던 커피는 쳐다 보지도 않는다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와인을 대할 때처럼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의 존재를 너무 신경 쓰기 시작했다. 동시에 과감한 커피 재배 농가의 딸이나 유기농 실험 이야기를 곁들인 프리미엄 커피라면 기꺼이 프리미엄 가격을 지불하기도 하는 것이다. 가격을 올릴지, 기준을 낮출지, 그 차이를 떠안을지 어쩔 수 없이 결정해야 하는 로스터들의 삶이야 꼬였지만. 생활의 복잡한 메커니즘. 식사와 식후 커피라는 형식, 커피 브레이크라는 문화적 의례가 사회 기관적인 것으로 변하고 여가용 약물이 기능적 약물로 새 이름표를 단 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일하게 만들기 위해서. 커피는 심미적인 기쁨이 아니라 일하게 만드는 두뇌의 로켓 연료이기 때문에….

맥주는 하위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 대형 맥주 회사의 물 같은 어필에 적응한 사람은 가격이 어떻든 구스 아일랜드 에일이나 러시안 리버 라거로 바꾸는 데 관심이 없다. 와인에는 부정확하건 아니건 가격을 매기는 데 반응하는 잘 조직된 맛의 계층이 있다. 한편 커피 신도들은 커피가 와인 같은 취급(이라기보단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 커피 내리는 방식이, 그 간단한 거 갖고 있어 뵈려 하는 제스처인진 몰라도, 크러스트를 흐트러뜨리고, 냄새를 맡고, 잽싸게 마시고 뱉는 저 커피 감정가가 현란한 행위와 모호한 형용사로 쇼를 하는진 몰라도, 커피는 분명 의사소통의 한 형태가 되었다. 망한 커피라도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그래서 삶처럼 커피도 복잡해졌다. 커피 지식인들은 에스프레소만 마실까? 드립 커피는 과연 특이한 커피의 이상적인 진열장일까? 다크 로스팅은 좋은 커피 빈을 칭송하는 한 방법일까? 그건 커피를 흥미롭게 만드는 특성을 싹 불살라버리는 게 아닐까? 커피도 와인처럼 품종과 지역과 농장을 지목해 주문할 수 있을까? 윤리적으로 재배된 커피에 대한 수요가 가령 윤리적으로 재배된 바나나 수요보다 많을까?

커피를 통해 구원받고 싶은 마음은 원하는 누구에게도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의 모든 커피숍을 항해한다 한들 허무한 일이다. 이윽고 세 번째 커피의 증흥기는 샌프란시스코와 베를린과 뉴욕에 도착했다. 하지만 미국 큰 체인 카페의 콩은 신선하다 하나 빼어난 바리스타는 드물다. 런던은 지난 몇 년 동안 플랫 화이트 투어를 할 정도로 변했지만 (꼭 1990년의 시애틀에 있는 것 같다.) 코벤트 가든의 한 커피숍에선 우유와 에스프레소가 너무 달아 죽지 못해 설탕 항아리를 삼키고 말았다. 이탈리아엔 바리스타는 있는데 콩이 없다. 갈리기 전의 라바짜 벽돌 커피가 여전히 일반적이라서. 에스프레스와 우유 둘 다 처절하게 뜨거워서 쓰라린 지옥을 맛보게 한 토리노의 커피숍은 부정적으로 잊을 수 없다. 이상하게 파리는 또 괜찮은 커피를 만드는 카페가 드물다. 우리 집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자기가 커피 빈을 갈아 콘에 담고 그 위에 물을 졸졸 붓는 동안 영원히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 배째라 뉴욕의 바리스타도 있다. 완벽한 커피를 맛보이고 싶단 말은 진심이겠지만 빨리 나오는 커피가 더 최고란 말이다! 그러므로 종국엔 알게 된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코코넛 껍데기에 담긴 타마타브산 커피를 마신다 해도, 모로코에서 시종들이 자개 박힌 테이블 위에 커피를 놓아준다고 해도, 비엔나의 일요일, 천 개의 야외 테이블에서 휘핑크림 덮인 커피를 마시는 3천 명 무리에 섞여 있다 해도, 호주에서 컵이 아닌 잔으로 신경 곤두선 롱 블랙을 마신다고 해도, 프랑스의 시골 여관이나 노르망디 해변에서 팔뚝보다 두꺼운 컵에 카페오레를 마신다고 해도 집에서 마시는 커피보다 못하다는 것을.

제대로 된 커피 한 잔 내리는 일은 와인 코르크를 따는 것보다 어렵다. 가짓수 많은 저녁 식사 준비하는 것보다야 쉽겠으나. 합쳐졌다가 흩어 졌다가 다시 합쳐져야 하는 단계는 단순하지만, 물과 콩, 두 재료의 변수는 거의 무한의 실수를 만든다. (사실 어떤 조리법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정하고 재미 없는 대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캡슐 커피도 귀찮아하는 판에 어느 천년에 집에서 드립 커피를 내린단 말이냐? 내가 생각하는 커피의 아름다움은 간결함, 즉 간편함. 그러니까 블랙 커피에 설탕만 잘 조절하면 돼…. 높은 등급의 커피 향은 분명히 나타나니까….

최고의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커피가 준 대부분의 경험 방식엔 가장 비싼 옵션이 적용되지 않는다. 커피 물리의 공식대로라면 아홉 개의 압력 관에서 85~95도의 물을 뿜어내는 기계만이 최상급 에스프레소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열한 살이던 내가 밖에서 놀다 집에 들어왔을 때 엄마가 타준 커피 맛과 견줄 수 없다. 맥스웰하우스였는지 네스카페였는지는 잊어버렸다. 엄마의 비밀은 설탕이었을까?

누가 낮에 집에 오면 신경 쓰인다. 낮에는 술이 커피보다 더 좋기도 하고. 그럼, 얼음 넣은 아이스 커피? 나만 더운가? 카페오레? 미디엄이나 스트롱 커피를 만들어 같은 양의 뜨거운 우유를 동시에 컵에 부으면 되나? 아침 커피는 장수하는데 참 좋다지만 하루의 시작부터 대뜸 비엔나 커피는 거북해. 카푸치노? 커피 좀 안다 하는 친구들은 거품 애매하게 떠 있다고 싫어할지도 모르는데? 우유는 솜털 같은 대신 크리미해야 하고, 커피 콩은 깔깔하게 갈려야 한다고 지적하면 그를 죽여버릴 것 같다.

팽팽하게 반항하는 커피 열매 껍질을 깨뜨리고 점액질 코팅에서 멈춘 이빨이 희미한 단맛이 나는 층을 만나기 전 바로 그 순간, 과일로서의 전생을 완전히 잊지 않은 음료를 후루룩 미뢰에 뿌릴 때, 흙냄새 나는 달콤함이 천천히 사라지면서 더 가볍고 더 끝이 말리는 뭔가를 드러낼 때… 의 쾌락이 사라지고 나면 기계를 분해하고, 기구를 닦고, 잔을 씻어야 하는 인생의 기나긴 숙제만 남을 뿐.

    에디터
    이충걸
    출처
    Gettyimages / 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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