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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겨야 사는 남자, 즐라탄

2016.07.23GQ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4개의 각기 다른 리그에서 11개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유로 2016에서는 팀의 조별 예선 탈락을 막지 못했지만, 맨체스터로 떠나는 그는 여전히 성공과 승리만 좇는다.

후드 조끼는 지방시 by 리카르도 티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크다. 그렇지만 그냥 보통의 큰 선수들처럼 뻣뻣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유연하고, 발재간도 좋다. 큰 선수가 그렇게 눈에 띄니, 더욱 인상적일 수밖에. 마치 다른 차원의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경기장 밖에서의 모습 또한 그렇다. 그는 거대한 영화 스크린 같은 사람이다. 그의 자서전(안드레 애거시의 < 오픈 >과 더불어, 최근 발간된 스포츠 관련 서적 중 가장 뛰어난) < 나는 즐라탄이다 >에서 즐라탄은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고통스러운 삶을 얘기한다. 기존의 전기 형식으로는 표현이 어려운 진실하고 꼼꼼한 기록이 담겨 있다. 지금 당장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은.

물론 그의 역할을 맡을 만한 주연 배우를 찾는 일은 어렵겠지만. 딱 한 명 있긴 했다. 외모와는 별개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연기하기에 걸맞다고 생각한 사람이. 얼마 전 오랜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난 무하마드 알리. 무슨 억지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브라히모비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알리처럼 되길 꿈꿨다. 그들이 살던 1950년대의 루이빌(알리가 자란)과 1990년대의 로젠가드(이브라히모비치의 고향. 스웨덴 말뫼의 이민자 지구)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모두가 그곳은 삶의 복권에 당첨되지 못한 패배자들의 도시라 말하고 있는 듯했지만.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파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를 보고 불쑥 이렇게 말했다. “전 패배를 용납하지 않아요. 2인자가 된다는 것은, 패배자 중에서 첫 번째일 뿐이라는 사실을 살면서 배웠죠.”

공격수지만, 득점만큼이나 어시스트도 많은 편이다. 내가 이기적인 선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누군가가 동료 선수나 친구들에게 그렇게 물어보는 경우도 흔하다. 난 팀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경기에서 이기고 싶고,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 공격수는 이기적이어야 하고 언제나 골을 갈망해야 하지만, 그게 경기장에서 바보처럼 행동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른 선수가 자기보다 좋은 위치에 있다면 공을 넘겨야 한다. 물론 팀원들이 훈련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화가 난다.

티셔츠는 아메리칸 빈티지.

아약스, 유벤투스, 인터 밀란, AC 밀란, 바르셀로나, 파리 생제르맹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시즌부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뛴다. 가장 오래 뛰며 전성기를 구가한 이탈리아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나? 나는 한 번 뛰었던 팀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보낸 시간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난 여전히 이탈리아 축구가 세계 최고라고 생각한다. 끝없는 열정과 뜨거운 열기. 내가 경기를 대하는 태도와 이탈리아 축구는 비슷한 점이 있다. 이탈리아는 내 제2의 고향이다. 밀라노와 토리노에 오래 살았는데, 이탈리아인 특유의 말투와 몸짓을 좋아한다. 유쾌한 사람들이라 금세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그들 모두가 축구선수를 존경한다. 어떨 땐 가족보다 더.

특히 유벤투스에서 파비오 카펠로 감독과 뛸 때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소속팀의 모든 감독과 잘 지내진 못했다. 펩 과르디올라 빼고는 다 괜찮다. 다른 감독들과도 자주 싸웠지만, 그건 경기장에서만 그랬고. 카펠로 감독은 나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쁜 축구가 아니라 이기는 축구를 하고 싶어 했다. 이런 점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아약스에서 잘난 척하던 그 모습을 쥐어 패서라도 없애주고 싶었다”라고. 하하. 그는 집요한 사람이었다. 훈련 끝나고 다른 선수들은 다 퇴근하는데 나를 따로 부르더니 1백 개도 넘는 슛을 쏘게 하기도 했다. 또 한 번은 경기장에서 팀 동료인 제비나와 몸싸움을 한 적이 있다. 난 당연히 파비오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되레 조용히 오더니 경기장에서는 그래도 된다고 다독였다. 그는 언제나 경기장에 최고의 긴장감과 아드레날린이 흐르길 원했으니까. 우리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그렇게 승리를 갈망하며 전력투구하고도 지는 날은 어떤가? 미친다. 나는 항상 이겨야 한다. 내 강박이다. 그리고 이 강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어린 시절엔 어땠나? 이민자로서, 매일 승리하는 기분은 아니었을 텐데. 나는 금발이 아니고, 라르손 같은 이름을 갖고 있지도 않고, 집안 형편도 안 좋았다. 그때 결심한 것 같다.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고. 그리고 이렇게 성공했다. 내 어린 시절처럼 사는 많은 아이들에게 집 주소나 출신지가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예로서. 지금의 나는 100퍼센트 스웨덴 사람이다.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스웨덴 사람.

한편 세계적으로 이민자에 대한 불만이 꽤 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장벽이 생기고 있고.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 축구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종교와 같다. 난 그렇게 열린 세계를 원한다.

천하의 즐라탄도 인종 차별을 겪은 적이 있나? 물론이다. 일단 이탈리아에서 뛸 때 경기장 안에서. 스웨덴에 살 때는 명백한 사회적 차별이 있었고. 하지만 이런 것들이 결국 성공을 위한 동력이 되곤 한다. 골을 넣고 상대 팬들에게 야유를 받는 건 즐거운 일이다.

재킷은 디스퀘어드2, 쇼츠는 A-Z.

저에겐 사명감이 있어요. 축구에 대한 사명감. 그러니 패배생각하지 않아요.

올해로 서른여섯. 슬슬 은퇴 생각도 하나? 축구선수의 인생은 기계와 비슷하다. 기상, 아침 식사, 훈련, 점심 식사, 시합. 언제나 똑같다. 이 톱니바퀴에서 단숨에 빠져나오기는 어렵다. 난 수많은 선수가 은퇴 후에 할 일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꽤 많이 봤다. 아직까지 은퇴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더 이상 경기를 뛰는 게 즐겁지 않고, 승리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들고, 올라갈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그만둘 거다. 하지만 아직도 난 하고 싶은 게 많고, 배울 것도 남았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토티도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물론 더 이상 뭔가를 증명해 보일 필요는 없다. 그는 이미 이탈리아 축구의 아이콘이니까.

올해 스포츠웨어 브랜드 A-Z를 설립하며 직접 홍보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축구장 밖에서도 성공하고 싶었던 건가? 돈 때문에 하는 건 아니다. 어릴 때야 가난했지만, 지금은 내가 꽤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실상 별 문제가 없다. 그저 도전을 멈추고 싶지 않다. 내가 경기장을 벗어나서도 승리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나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랄까.

지난 4년 동안 파리에 살았다. 지금은 유로 2016으로 축제 분위기지만, 지난해 11월 바타클랑 극장 테러가 일어난 날은 정말… 믿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나는 그날 스웨덴 대표팀 경기 때문에 다른 도시에 있었다. 파리로 돌아왔을 땐, 모든 게 멈춰 있었다.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대체 그런 짓을 한 사람들 머릿속엔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꿈꾸는 건 추상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다. 사랑과 평화, 그뿐이다.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게 있나? 휴대전화. 몸은 떨어져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는 기분이고 싶다.

마지막으로 부모님 얘기를 해볼까? 자서전 < 나는 즐라탄이다 >을 참고하면, 아버지는 보스니아에서 홀로 자랐다. 고향의 전쟁과 폐허를 고스란히 겪었고, 스웨덴으로 이주한 후에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자주 취해 있었다. 그러다 아들이 축구선수로 대성공을 거뒀고, 이제 말쑥한 옷을 입고 박물관 같은 집에서 살게 됐다. 이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으로서, 부모님을 마주하는 기분은 어떤가? 아버지는 요즘도 나와 같이 다니는데, 언제나 그저 내 곁에 묵묵히 있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확실히 삶의 균형을 찾은 것 같다. 반면 어머니는 계속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공공장소 계단 청소 일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뭐라도 안 하면 심심해.” 음… 맞는 말이다.

    에디터
    글 / 발테르 벨트로니(Walter Veltroni)
    포토그래퍼
    MICHELANGELO DI BATTI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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