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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의 하룻밤

2016.08.11유지성

집 주소부터 그녀의 이름까지, 타국의 여행지에선 모든 게 달라진다.

순서가 있다. 매일 하는 익숙한 일이라도 그렇다. 외출 직전. 에어컨을 끄고, 보일러 온수 버튼을 끄고, 양쪽 주머니를 탁탁 쳐 휴대전화와 지갑이 들었는지 번갈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불을 모두 끈다. 집 가장 안쪽에서부터 가방을 메고 걸어 나오며 한 번에. 동선에 따른 ‘루틴’이라면 루틴. 혼자 사는 남자가 켜놓고 나간 에어컨을 꺼줄 사람은 없다.

휴가는 짧다. 며칠 정도로 숙소가 내 집이 되진 않는다. 호텔이라면 문제가 덜하다. 화장실 불, 아니 물을 켜놓고 나갔다 해도 말끔히 정리된 침대 시트와 함께 문제는 해결돼 있을 것이다. 뭘 잘 모르겠으면 24시간 물어볼 사람도 있다. 문도 대개 알아서 잠긴다. 혼자든 둘이든 귀가하면 바닥에 내팽개쳐놓은 옷가지도 얌전히 침대 위로 올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호텔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TV 시청 정도를 제외하고는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아서, 호텔 밀집 지역의 교통 체증 때문에, 어떤 용무로든 방에 누군가 예고 없이 드나드는 게 싫어서,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지내고 싶지 않아서…. 호텔이 아니라도 잘 데는 많다. 누군가 살던 집 혹은 아예 단기 렌트를 위해 마련해둔 공간일 것이다. 로비에서는 한껏 차려입고 파티장에 가는 외국인이 아닌, 아침엔 출근하고 저녁엔 슈퍼마켓을 가는 동네 사람들을 만난다.

잠시 지내다 가는 게 흉은 아니지만, 뜨내기처럼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건 누군가와 함께 집에 올 일이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다. 여행자라 할지라도, 섹스를 앞두곤 뭐든 능숙하게 척척 잘해내고 싶지 않나? 일단 외운다. 방의 동호수부터 정확히. 복잡하면 메모. 문에 스티커 같은 표식이라도 붙어 있으면 다행. 호텔이 아니니 집 키에 숫자 같은 건 쓰여 있지 않다. 취해도 잊지 않을 정도로 반복 숙지. 엘리베이터는 문을 등지고 왼쪽으로 남의 문 다섯 개를 지난 뒤, 한 번 더 오른쪽으로. 우측 엘리베이터는 홀수 층 전용이니 꼭 좌측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것. 경로를 반대로도 한 번 돌아가 본다.

집 안도 잘 살핀다. 몸엔 불이 붙었는데 침대 옆에 올려둔 콘돔을 못 찾아 더듬대다 일을 그르치는 건, 내 집에서도 간혹 벌어지는 일. 여행지는 난이도가 더 높다. 대낮부터 스탠드를 비롯한 조명을 끄고 켜는 법을 미리 익힌다. 밤에 돌아와서 아차, 당황하지 않도록. 냉난방기 리모컨의 능숙한 작동법은 기본 중의 기본. 조도나 온도를 낮춰야 하는 결정적 순간, 두 손이 자유로우리라는 보장이 있나?

또한 제정신이라는 보장은 어떻고. 서울의 모든 술을 다 마셔본 건 아니지만, 자주 가는 곳에서 마시는 술이라면 이제 대강은 안다. 몇 잔을 마시면 어떻게 취하고, 몇 시간을 쉬면 다시 쌩쌩해지며, 어떤 순간을 넘어가면 제아무리 말똥말똥해도 발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과연 이 여행지에 그 술이 있다 해도 그걸 여기서 똑같이 마실 확률은 거의 없다. 안 가본 곳, 안 먹어본 안주, 안 마셔본 술, 그리고 어제 덜 깬 술. 더군다나 시차와 기후도 다르니 영 취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모국어가 아닌 언어가 용기를 만드는지, 낯선 도시가 본능을 깨우는지, 단지 여행자의 신분이 부끄러움을 없애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그러면서 처음 본,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아주 잘 아는 누군가를 만난다. 대개 밤이고, 대화의 농도는 그리 진하지 않다. 너의 나라와 나의 나라. 너의 배우와 나의 가수. 너의 예쁜 옷과 나의 독특한 신발 같은 것들. 하지만 모자라지 않다. 친구와의 시간도 부족한데 여행자에게 시간을 허락한다는 건, 서로에 대한 호기심이 미래의 관계에 대한 기대를 이겨내고 있는 순간일 테니. 그리고 이 여름밤은 짧으니, 다음을 위한 약속 대신 약속보다 굳건한 지금을 만끽하고 싶은 맘.

마신 술잔의 숫자만큼 시간은 줄어든다. 당장 아침에 비행기를 타는 게 아니라면, 아무렴 내일의 계획 같은 건 어떤가. 다행히 집 주소는 아직 또렷하다. 오늘을 잊지 않기 위해 새끼손가락을 거는 대신 인사쯤 겨우 할 줄 아는 언어로, 그 새로운 이름을 함께 적어 외운다.

    에디터
    유지성
    일러스트레이터
    김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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