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가버린 올림픽 세계

2016.08.24이충걸

단순한 게임도 최고가 될 때는 철학적 논쟁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공격과 수비, 둘 다에 원칙과 기술이 혼합될 때의 사색적인 분립을 즐긴다. 리우 올림픽을 보면서 제임스 레바인이 지휘한 바그너의 < 발퀴레 >를 자주 떠올렸다. 마지막 막이 열려 음악과 드라마가 결합하고 복잡한 진실이 사무치던 순간의 양면성. 논쟁을 일으키는 양면성. 예술엔 흔하나 스포츠에선 가장 적은 양면성. 정교해질수록 예술과 가까워지는 양면성.

어떤 경기는 수면제와 같거나 전염병인 양 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탁구를 볼 땐, 나 스스로 시합의 일부분이 되어 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불빛에 파묻힌 탁구대는 신념을 지탱하기도 벅찬 성지 같았다. TV 앞에 앉아 마하의 속도로 적진을 파고드는 드라이브나 큰 각도로 휘는 스핀의 비밀을 추측하는 건, 김장용 고무장갑을 끼고 암호 기계를 해독하려는 것과 비슷했다. 심오한 경험이었다. 리우 올림픽에서도 실망과 경멸이 있었지만 서울 올림픽에서의 벤 존슨 같지는 않았다. 어떤 선수들은, 인생은 기술과 어떤 순수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싸우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삶 전체가 승리 하나에 매달려 있는 듯 필사적인 선수도 흔했다. 그 경쟁심과 허기, 불안과 전율, 기이한 초대형 열망은 타인에게 설명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베테랑 선수에게도 역시 불충분할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현실이 된 꿈과 깨어진 꿈을 온몸으로 시연하는 선수들은 서정적인 전염 같았다. 하품이나 웃음처럼 그들이 울기 시작하면 따라 울었다. 그들이 환호하면 덩달아 열반에 들었다. 그때 우리가 보는 것은 실력 지상주의의 불안이 가득한 엘리트 스포츠 세계, 기대라는 압력을 퍼붓는 정부, 가차 없는 통제적 기풍, 감정적 비참함, 장비의 한계, 논란을 부르는 점수 시스템이 아니라 그의 성취에 바친 무한의 깊이였다.

이 모든 것에 깔려 있는 주제는 무엇일까? 성공일까? 성공은 무엇일까? 프로든 아마추어든 시합에 나가 먹고 살 정도의 수입을 얻는 것? 전 세계 상위 몇 위 안에 들면 층분할까? 토너먼트 과정에서 전부를 쏟아 부은 것으로 목에 건 마법의 노란 통과증은 그가 원하는 모든 곳으로 데려가 줄까? 경기가 끝나고 나면, 스포츠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아니 알기나 하는지 자주 혼란스러웠다. 선수의 탁월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수시로 모호했다. 선수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경쟁하는 골프나 탁구라면 답은 좀 쉬울 것이다. 누구도 마롱이 행성 최고의 탁구 선수라는 것에 반박하지 않는다. 팀 스포츠인 야구는 조금 더 미묘하다. 야구는 투수와 타자 사이의 신중하고 의식화된 조우의 연속이기 때문에 통계와 순위와 분석이 또렷이 잡힌다. 야구는 직관과 (집계로 뒷받침되는) 판단 사이의 불균형이 비교적 작지만, 농구처럼 상황이 복잡해질 때 눈으로 보는 것의 한계는 두드러진다. 보이는 대로가 아닌 결정적 인과를 포함한 일련의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수의 플레이와 팀의 승리는 어떤 법칙으로 관련돼 있을까? 선수의 가치는 팀에 가져다준 승리의 숫자로 확보될까? 개인의 기록은 팀 안에서 맡은 임무의 맥락 위에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선수를 평가하는 데 수치 말고 다른 접근법이 있을까? 그 출중함을 헤아리는 데 예전의 규격이 여전히 유효할까? 어느 슈터의 최고 득점률은 발군의 기량을 말해주는 한편, 공을 잡았다 하면 패스하기보다 슛부터 쏘는 이기적인 성격과 팀 동료 모두가 리바운드에 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울은 어느 정도인지, 점수는 얼마나 효율적으로 얻는지, 슈팅 포즈는 멋진지, 실책은 잦은지, 블로킹과 리바운드엔 적극적인지, 슛에 이르는 퍼포먼스가 매력적인지를 말해주진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관점으로 그 경기의 게슈탈트를 이해하고, 선수의 특징과 결의와 성장 여부를 판단한다. 관점은 몸으로 획득한 지식의 다른 형태. 문제는 각각의 변수에 얼마만큼 무게를 부여할 지 애매하다는 것이다. 상황이 꼬이면 사람들은 자기 임의대로 알고리즘 을 만든다. 그런 임의의 알고리즘은, 임의적이기 때문에, 실수를 부른다.

스포츠와 전쟁만이 영광의 위상을 얻거나 추락한 영웅을 만든다. 올림픽의 순간 속에 비치는 신체적 우아함은 인종적•도덕적 동등함과 결부된다. 신체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의 조화 속엔 스포츠맨십이라고 불리는 겸손이 곁들여진다. 최고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기술을 마스터한 운동선수는, 단지 빨리 뛰고 달리고 공중을 차오르는 강인 한 신체의 청년이 아니라 올라운드 예술가인 것이다. 이때, 체조 선수들이야 말로 집착적이고 환상에 불과한 완벽주의가 실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상에 다가가는 인간의 조건. 잃어버린 고전 시대의 표본. 꿈의 핵. 스포츠의 완전한 심미성을 가르쳐준 것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의 나디아 코마네치였다. 키 153센티미터, 몸무게 39킬로그램의 열네 살 소녀는 가장 사소한 실수로도 기회는 저 멀리 가버린다는 두려움을 무표정하게 묵살했다. 기계적 확고함, 난이도의 극단적 범위, 추가된 신체적 혁신, 평균대 바닥에 손을 대지 않고 도는 에어리얼 카트휠, 앞으로 나가다 몸을 확 뒤집는 마루의 아라비안 파이크, 별 노력 없이 하는 듯 뒤로 반 바퀴 비트는 공중돌기, 발목이 흔들리지 않는 착지,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과감하면서도 우아한 활강…. 코마네치는 더 작고, 더 마르고, 스트레스에 찌들고, 식이 장애가 있는 어린 오필리어가 아니었다. 동구권 체조 선수들의 남성적인 몸놀림이 스포츠의 우아함을 퇴색시켰다는 비난이 번 성할 때 체조가 스포츠의 결과론적인 진화라는 것을 증명한 여자애. 날 듯이 허공으로 솟구쳐 몸이 표현할 수 있는 한계 너머, 말로 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을 일깨워준 냉정한 작은 벼룩. 실수 없는 경기는 상상도 못하던 시대를 뒤집은 새로운 이질성. 머리에 리본을 묶은 그 소녀는 부모의 실수가 아니라, 전체주의적 강요가 아니라, 완벽함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원시 충동이 만든 존재 같았다.

다문화적인 민주주의, 초과된 열광, 광장의 폭죽 댄스, 인류라는 감정의 세계로부터 잠시 낙오된 증오, 입 안에 남는 재의 맛. 올림픽이 끝나자 매일의 불편을 불평하는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TV는 굉장한 열광을, 금메달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느라 낭비한 기억만 남기고 꺼졌다. 하지만 절정의 즐거움을 연장하는 최고의 방법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건너 뛰어 4년이나 떨어진 도쿄에만 몰두한다면. 2020년의 도쿄는 누구의 황홀 위로 흘러갈까? 모든 것이 인생의 일화, 꿈의 삽화 같다.

    에디터
    이충걸
    사진
    Gettyimages/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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