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여성론 – 현아

지금 현아에 대해 얘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나오는 대로 말하자면 ‘떡밥이 쉬었다’는 느낌도 들고, 좀 다듬어 말하자면, 현아가 근소하게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이거나 ‘때’가 너무 늦게 온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왜냐면 현아 는 페미니즘이 화두가 되기 전부터 가장 페미니즘다운 논의를 가능하게 했던 연예인이었으니까. 현아는 얼마 전, “누나 머리 풀었다”며 진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컴백했다.

살면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말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더 많았던, 불과 몇 개월 전의 시간을 생각해본다. 그 후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지금 그때를 이미지로 떠올리자니 아무도 없는 사막이 보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사막에 현아가 있다. ‘페미니즘’이 이토록 본격적이고 대중적인 공방전이 되기 전, 일부에서는 그것을 대충 “언냐 이거 나만 불편해?” 라고 불렀다. 단어의 경제성이 완전히 무시되던 비문명 사회에서, 현아는 “언냐 이거 나만 불편 해?”를 외치는 사람들의 커다란 미끼였고, 누군가에겐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존재였고, 구경꾼에게는 그저 비난하기 좋은 그림이었다. “나만 불편해?”라는 질문은 정말 중요하다. ‘아름다운 여성의 상품화’, ‘어린 여가수들이 요구 받는 도덕적 엄숙주의’와 같은 사안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여전히 치열하게 논의되어야 할 주제다. 하지만 일부 남성들이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프레임을 씌워 만든 저 문장에는 논의 자체를 막는 것 외엔 아무런 가치도 없어 보인다. 그런 채 현아는 늘 묻고 있었다. “언냐, 내가 직접 물어볼게. 정말 불편해?”

나는 좀 이상하리만큼 현아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하루 종일 인터넷을 들여다보며 온  것에 트집 잡는 것을 좋아하는 네티즌으로 살면서도, 왜인지 현아한테는 굳이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반응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로 데뷔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탈퇴한 뒤 새로운 회사에서 다시 데뷔.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이어진 솔로 활동, 팬서비스 같았던 듀엣. 디스코그래피만 타임라인으로 만들어도 제법 복잡하고 큼직한 일이 많았고 그 위에는 무슨 단서마냥 출처 없는 루머들이 함께했다. 커리어와 가십 이 결합된 형태의 현아는 확실히 모두의 주목을 끌 만한 사람이었다.

현아가 이슈를 만들었으니 나도 어떤 반응을 해야 한다고 강박을 가졌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매뉴얼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가장 유명한 ‘패왕색의’ 현아. 내가 이 문구를 처음 본 건 당시 포르노그래피 리뷰 등으로 유명했던 ‘레진의 생각이 없는 블로그’에서다. 현아의 화려한 골반 댄스가 담긴 동영상을 올려놓고 ‘패왕색의’ 칭호를 달아놓은 방식은 확실히 내가 적응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둘째는 현아의 섹시함에는 명분이 없다는, 성적 은유가 담긴 그의 활동이 오히려 여성의 권리를 하락시킨다는 다소 비약적인 주장이었다. 그건 논의의 주제지 기호로서 고려할 문제가 아니기에 패스. 셋째, “야한 게 뭐가 어때서?” 같은 절대적 응원. 하지만 그러기에 현아의 무대를 열렬히 좋아한 적이 없었다. 갈피를 못 잡던 어느 날 현아의 동영상 밑에 “내 워너비”라고 쓴 여중생의 댓글을 본 순간, 내가 왜 기존의 방식으로는 현아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가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던 단비는 큰 저택에 살고 있는 소위 ‘부잣집 애’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 이는 우연히 집을 직접 방문했던 나뿐이었다. 단비는 가난함이 유대감으로 작용하는 학교 분위기에 누구보다 깊게 동화된 학생이었다. 가출을 했고 장기 결석이 이어지기도 했다. 어느 날 내가 집에서 뛰쳐 나왔을 때도 단비는 내 곁에 있어주었다. 우리는 찜질방에서 새벽 내내 이야기를 하다 지쳐 눈을 감고 누웠다. 그때, 단비가 대뜸 “나 걸레야?” 물었다. 단비는 그렇게 자기를 향한 상한 소문이나 개인적인 상처를 감추기보단, 상대방이 무안할 만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애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는 듯이. 그때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비는 다시 “나는 혼자 있는 게 너무 싫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나의 가출은 하루에 그쳤다. 단비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그 후로도 단비는 어떤 그룹에도 잘 속하지 않고 누군가 방황하거나 자신과 비슷한 우울을 겪고 있다면 그 사람 곁에 잠시 머물렀다. 그 모습이 늘 ‘어른’ 같다고 생각했다.

현아의 노래는 대부분 2절 클라이맥스에서 어떤 진심을 슬쩍 내비치곤 한다. ‘빨개요’에 서는 “현아는 빨갛고 맛있다”며 본인의 가십을 스스로 폭로한 뒤 “그래서 뭐?” 하고 조롱하며 원숭이 춤을 춘다. 그러다 갑자기 “날 두고 떠 나지마, 나 지금 너무 외롭단 말야. 너만은 나를 떠나지마” 뜬금없는 자기 고백을 한다. 혼자 남게 될까 봐, 그게 싫어서 필사적으로 혼자 남으려고 하는 사람.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빠르게 ‘어른’이, ‘개인’이 될 수 있었던 사람. 정서적 독립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주었던 단비와 현아를 워너비로 삼고 있는 젊은 (어린) 여성들이 겹쳐졌을 때, 무관심이라 생각 했던 현아에 대한 감정은 철저히 개인으로 살아가는 주변 여성들을 보며 느낀 익숙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좀 ‘맛있고’, 내가 좀 ‘빨갛다’고 표현하는 제스처는 (혼자 있기 싫어서) 사람을 끌어당기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무기다. 남성들이 꿈꾸는 판타지 속 여성상이 있다면 현아는 직접 판타지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고 그 자체를 또한 본인의 판타지로 삼는다. 불특정한 사람의 판타지 속에 들어가는 일은 꽤 큰 자기만족을 줄 때가 있다. 그러나 이를 뒤집으면 결국 남성 판타지 속에 갇힌 의미로 제한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그럼 다시 현아는 “갇히는 게 뭐가 나빠?”라고 또다른 질문을 던질 것 이다. 그리곤 “어차피 내가 다 컨트롤해!” 자신감을 보이거나 ‘Next Door Girl’ 특유의 잡을 수 없는 성질을 한껏 이용할 수도 있다. 본인의 타자화된 수동성을 능동적으로 바꿔놓고 모든 장단을 맞춰줄 것처럼 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모른 척 다른 옷, 다른 메이크업으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모두의 곁에 있겠단 자세를 취하지만 어차피 누구의 곁에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현아는 앞으로도 계속 누구의 평가에도 자신을 맞추려들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우연히 일어난 일인 것처럼 굴지만 현아는 사실 모든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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