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신 여성론 – 엠버

2016.09.01GQ

소녀시대가 여고에서 친하게 지내며 몰려다닐 것 같은 닮은꼴 소녀들의 집합이었다면, 같은 기획사에서 데뷔한 에프엑스는 ‘소녀’의 스펙트럼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펼쳐놓은 팀에 가까웠다. 홍조 띤 뽀얀 얼굴로 해맑게 웃는 설리부터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빅토리아, 서늘하고 세련된 분위기의 깍쟁이 같은 크리스탈, 건강한 에너지가 넘치는 루나까지… 그중에서도 엠버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소녀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와장창 깨뜨리는 멤버였다. 농구복 같은 의상과 뉴에라, 한쪽 앞머리를 길게 내려 눈을 살짝 가린 헤어스타일, 굵직한 저음의 랩. 흔히 ‘소녀스럽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과 걸그룹에 기대하는 요소들을 전혀 보여줄 마음이 없다는 듯, 엠버는 등장했다.

어디까지가 SM엔터테인먼트의 기획이고 어디서부터가 엠버의 고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이돌 산업의 정수가 캐릭터 놀이임을 감안한다면 아마 에프엑스 속 엠버의 이미지는 상업적 고려에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모습은 여자 후배들의 러브레터 깨나 받아봤을 것 같은 잘생긴 언니의 얼굴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것은 곧 아이돌 팬덤의 기반이 되는 여성 팬들을 좀 더 빠르게 끌어 모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데뷔 쇼케이스에서 크리스탈은 엠버를 가리켜 “남자 같은 멤버가 있어서 다른 그룹보다 더 눈에 띄고 주목받을 것 같다”고 얘기했으며, 많은 기사에서 “중성적”이라거나 “남자야, 여자야?”라는 표현으로 그를 설명했다. 심지어 신인 아이돌 그룹의 필수 관문, 명절맞이 사진에서도 엠버는 홀로 남성용 한복을 착용했다. 그 선택은 정색하고 이유를 따지지 않더라도 당연해 보였다.

누군가는 엠버에게서 남장 여자 판타지를, 더 나아가 소년 같은 그가 소위 말하는 ‘여자’로 점점 변해가는 일종의 성장 판타지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엠버는 자신을 바꾸지 않았다. 무대에서는 변함없이 바지만 고집했으며, 헤어스타일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쇼트커트에 가까운 길이를 유지했다. 에프엑스에서 엠버의 모습은 캐릭터일 뿐이고, 실제의 자신은 알고 보면 여성스럽고 참하다는 불필요한 변명을 굳이 늘어놓지도 않았다. 변하지 않는 엠버를 견디지 못하는 쪽은 오히려 사람들이었다. 치마를 입는 게 좋지 않나? 메이크업을 조금 더 진하게 해보면 어떨까? 머리를 기르면 훨씬 더 예쁠 얼굴인데…. 엠버가 무대 위에서와 다를 바 없는 원래의 자신을 드러낼수록, 전현무 같은 예능 프로그램의 MC들부터 기사에 댓글을 다는 네티즌들까지 왜 더 여성스러워지지 않느냐고 그를 닦달했다. 게다가 MBC < 나 혼자 산다 >와 < 진짜 사나이 >를 통해 물건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바느질을 해내는 모습이 공개되자, 방송은 엠버에게 “천생 여자”라는 수식어를 칭찬인 양 반복적으로 달았다. 머리카락이 길고,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집안일에 능숙한 것이 ‘천생 여자’라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은 얼마나 우스운 것일까? 개인의 선택과 취향을 두고 여성스럽느니 남성스럽느니 일일이 따지는 건 또 얼마나 부질없나?

많은 이가 뭉툭한 이분법으로 이것저것을 손쉽게 나누고 재빨리 안심한다. 말하자면 엠버는, 거기에 익숙한 누군가의 심기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드는 여성이다. 머리카락은 짧고 바지만 입는 데다 신체적으로도 여성의 특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농구와 스케이트보드 타기를 즐길뿐더러 잘하기까지 하는 여성. 흔히들 이야기하는 “여자라면 저렇지 않은데”와 “그렇게 하고 다니면 남자들이 안 좋아해”의 요소들로 구성된 여성. 그러고도 민망해하거나 수줍어하거나 바꾸어가겠다고 고분고분 노력하지 않는 여성. 엠버가 < 진짜 사나이 >에서 서툰 한국어로 “잊으시오”라고 말한 순간, 대중적으로 가장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해당 장면에서 엠버는 군대 문화에 익숙지 않은 약한 여성이자 순진한 외국인으로 소비됐을 뿐이다. 누구도 낯설거나 불편해하지 않을 존재로.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인다. “‘너는 여자처럼 언제 할 거야?’ 저는 여자예요. 여자는 원하는 스타일로 사는 거예요. 이런 거 조금 그만합시다.”, “개인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한 가지 겉모습에 한정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모든 형태와 크기로부터 나옵니다. (중략) 누군가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재단하지 말아주세요.”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사람들에게 엠버가 남긴 말들은 흥미롭게도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쉽고 간결하며 또렷한 답변이기도 하다. 태어난 대로,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그의 이야기는 모든 평범한 여성의 다짐이며, 자기 자신인 채로 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엠버의 모습은 수많은 평범한 여성의 인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솔로 데뷔곡 ‘SHAKE THAT BRASS’에서도 엠버는 수트를 차려입거나 농구 골대에 덩크슛을 넣는 등 당연히 남성성의 상징이라 여겨왔던 장면을 태연하게 연출한다. 그에게 이런 요소들은 ‘톰보이’ 콘셉트의 아이템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 더해 엠버는 솔로곡들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건네기 시작했다. ‘Beautiful’에서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언급하면서도 결국은 “I’M HAPPY TO BE MYSELF”라고 했다. 조금은 어색한 한국어로 “이 노래를 쓸 때 많은 용기를 냈어요. 왜냐하면 이 주제가(를) 사람들한테 말하고 오픈하는 자체가(에 대해) 많은 겁을 갖고 있었어요”라는 말과 함께 발표한 ‘Borders’에서는 경계를 넘어서길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우겠다고 노래했다. ‘Borders’가 공개된 이후, ‘경계’라는 표현과 어딘가에 갇혀 있는 듯한 뮤직비디오 속 엠버의 모습은 그의 성 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또 한 번 불러일으켰지만 엠버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노래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답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Borders’가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무언가에 대항할 용기에 관한 곡이자, 거의 평생을 ‘여성답지 않은’ 외형으로 살아오며 곱지 않은 시선을 견뎌내야만 했던 엠버의 입장 표명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아이돌, 특히 걸그룹의 멤버일 경우 본인의 의지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외모부터 인성까지 하나하나 평가와 감시의 대상이 되고, 세상이 기대하는 여성상과 어긋난 모습을 드러낼 경우 비난도 감수 해야 한다. ‘팔리기 위해서라면’ 욕망이 없는 텅 빈 인간처럼 굴어야 트집 잡히지 않는 것이 여자 아이돌이다. 엠버가 걸그룹의 멤버임에도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요구하는 전형적인 여성성을 따르지 않은 덕분이다. 그리고 세간의 시선에서 약간이나마 자유로워진 엠버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고 이야기한다. ‘Need To Feel Needed’ 의 뮤직비디오에서는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 지인들과 신나게 장난을 치고, 친구 스캇과 함께 유튜브 채널 < What The Pineapple >을 운영하며 간단한 콩트 연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 엠버는 자신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올란도 게이클럽 총기 난사 사건 당시 SNS에 추모의 글을 올리고, 인터뷰에서 거리낌 없이 그에 대해 언급한 것도 엠버가 유일하다.

지난해 Mnet < 4가지쇼 >에 출연한 그는 왜 치마를 입거나 더 여성스럽게 꾸미지 않느냐는 물음에 단호하게 답했다. “엠버는 싫어하는 건 안 합니다.” 아마 앞으로도 엠버는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것이고, 해야 할 말은 숨기지 않을 것이며,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아이돌과 걸그룹,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하나하나 깨부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편견에 갇힌 사람들을 주저 말고 불편하게 만들기. 무엇보다 내가 선택하고 옳다고 여기는 것들로 나의 세계를 견고하게 쌓아올리고 지키기. 그러니까 어떤 여성도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인생을 간섭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엠버를 통해 새삼 다시 생각했다.

    에디터
    장우철, 손기은, 정우영, 유지성
    황효진(웹 매거진 'ize' 기자)
    일러스트레이터
    이자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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