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신 여성론 – 수지

2016.09.05이예지

모두가, “수지는 착하다”고 말한다. 착하다는 말이 주는 고전적인 수동성의 이미지나, 착한 몸매, 착한 가격처럼 괴상하게 변용된 사용법 은 잠시 미뤄놓고 보더라도, 수지는 ‘착하다’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싹싹하고 반듯하다. 자신의 첫 영화였던 < 건축학개론 >의 촬영 현장에서 그녀는 늘 웃었고, 막내 스태프의 말을 들을 때도 감독의 말을 듣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맞추고 경청했으며, 수더분하고 서글서글한 행동으로 분위기를 풀어주는 존재였다. 자신의 마지막 촬영 날엔 스태프 전원에게 서툰 그림과 함께 한자 한자 꾹꾹 눌러쓴 감사의 카드를 일일이 손에 쥐어줘 예쁨을 한껏 받기도 했다. 내가 보고 들은 < 건축학개론 >의 수지가 아니더라도, 그녀가 참여한 영화와 드라마 현장 어디에서도 그녀에 대한 모난 말은 들려오지 않는다. 여자는 예쁜 여자를 경계한다는 피곤한 선입견이 맞다고 가정해본들, 딱히 반발심을 일으키는 구석이 없고 모난 데 없이 착한 수지에게 적의를 품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수지가 인간적으로 착한 품성을 지녔느냐와는 별개로, 대중에게 착한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은 또 다른 범주의 일이다. 다시 돌아가 ‘착하다’는 말이 지닌 함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걘 애가 착해.”, “과장님은 착한 분이에요.” 어느 쪽이 자연스러운가? ‘착하다’는 말은 무심코 손아랫사람 혹은 은연 중 나보다 하수로 보고 있던 사람, 내게 해를 가하지 못할 것 같은 상대에게 더 많은 겸양과 겸손, 선의를 기대하며 쓰는 말이 아니었던가. 거기에 착한 몸매 혹은 착한 가격 따위의, 뛰어나거나 효율적인 것을 곧 선으로 전치하는 속물적 변용이 더해지니, ‘착하다’는 호명에 대한 의구심은 더 깊어진다. 발화하는 주체에 권위를 쥐어준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려운 말, ‘착하다’는 대중들이 수지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겉으론 배드 걸 속으론 굿 걸”을 부르며 데뷔한 수지는 그들에게 한결같은 ‘굿걸’이었다. 구설수에 휘말린 적도, 자극적인 노출을 한 적도 없으며, 자기주장이 강한 말도, 호불호가 갈리는 행동도 하지 않는 그녀, 수지는 무해하다.

일단은 외모부터 그렇다. 수지는 상대를 유혹해 파멸시킬 팜파탈처럼 위압적으로 관능적이지도 않고, 풀 수 없는 불가해한 미지의 영역을 숨겨두지도 않은, 순수하고 악의 없는 얼굴을 지녔다. 한국 남성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넥스트 도어 걸’이 지닐 수 있는 궁극의 마스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의 경우도 별반 다르진 않다. 나쁜 감정은 조금도 담기지 않을 법한 선한 눈, 투명하고 청신한 피부, 그리고 눈꼬리를 살풋 포개어 곰살맞게 웃는 순한 미소까지, 어디 하나 돌출된 데 없이 자연스럽게 조화된 이 말간 얼굴을 별달리 좋아하진 않을지라도 미워하긴 힘들다. 여성의 얼굴에서 개성이 강하거나 진한 인상보다 선이 여리고 단점 없는 얼굴을 선호하는 한국적 미의 기준에서, 그녀는 매우 유리한 기본값을 지닌 셈이다. “백지 같다”야말로 그녀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닐까? 백지같다는 말은 무엇이 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지만, 대중이 투사하는 모습 그대로 그려질 수 있다는 함의를 품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백지같은 수지가 한국 남성들이 호명한 ‘국민 첫사랑’의 왕좌에 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스에이의 멤버로 연예계에 데뷔한 수지는 눈에 확 띄진 않아도 그룹에서 제일 예쁜 멤버로 알음알음 소문이 퍼졌다. < 드림하이 >로 첫 연기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풋풋함을 넘어 서툴고 정제되지 않은 ‘고혜미’의 모습은 기존의 아이돌 팬층에만 소구될 뿐 아직은 별다른 특징도 특색도 없는 틴스타의 이미지였다. 지금의 수지를 있게 한 것은 명실공히 < 건축학개론 >이다. < 건축학개론 >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카피와 복고의 정서로 영화의 서사를 사적 서사로 확장시키는 전략을 쓴 영리한 작품이다. 수지는 여기서 수많은 남성이 자신의 첫사랑을 겹쳐봤을 서연으로 분했다. 긴 생머리의 맑고 청순한 외모에, 주눅 든 남자를 명랑하게 잡아끌어줄 아는 발랄함, 타지에서 와 남모를 외로움도 품고 있는 음대생 서연. 누구나 마음속에 그려볼 법한 해사한 첫사랑의 이미지다. 가난하고 어리숙한 승민은 서연을 만나 첫사랑에 빠지고, 서연 역시 그에게 마음이 있어 보인다. 고백을 결심한 승민은 서연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다가, ‘강남 오빠’ 재욱과 만취한 서연을 발견 한다. 이어 만취했지만 명백히 거절의 제스처를 취하는 그녀를 재욱이 집으로 데리고 들어 가는 광경까지 목격한다. 이것은 승민의 오해인가? 아니다. 자격지심에 눈이 먼, 외면이다. 서연은 자신을 피하는 승민을 찾아가지만 돌아오는 건 “꺼져줄래”라는 말 뿐. 한국 남성의 어떤 찌질한 전형을 거의 인류생태학적 아카이빙의 수준으로 재현한 승민이 이 서사에서 자생적 생명력을 지니고 생동하는 것과는 달리, ‘썅년’ 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아련한 첫사랑으로 남은 서연은 필연적으로 대상화될 수밖에 없다. ‘썅년’이거나 첫사랑이거나, 대상화의 틈새에서 수지는 별다른 기교나 전략 없이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그대로 연기했다. 담백하게 툭툭 뱉는 말투와 씩씩한 걸음걸이, 서연의 말투나 행동은 많은 부분 수지의 실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전략이 없는 전략이 유효했달까. 연기에 대한 잘못된 습관이나 길이 들지 않은 상태로, 꾸밈없이 서연 그 자체가 된 수지는 영화의 흥행 성공과 함께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실상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이후의 행보다. 수지는 < 건축학개론 >에 이어 드라마 < 빅 > 과 < 구가의 서 >를 차기작으로 택했다. < 빅 >에서는 새침하고 도도한 장마리를 맡아 고혜미에서 크게 변주된 바 없는 여고생 캐릭터를 연기했고, < 구가의 서 >에서는 뛰어난 검객이지만 알고 보면 순정파인 담여울로 이미지의 외연을 넓히기도 하며, < 건축학개론 >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안전하게 연기 커리어를 쌓아갔다. 이제는 배우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름에도, 미스에이 활동도 병행하며 배우와 가수로서 성실한 나날을 보냈다. 잘못된 선택은 영화 < 도리화가 >였다. 조선 최초의 여류 소리꾼이라는 진채선은 얼굴에 흙먼지를 묻히고 수염을 그려 넣으며 선머슴처럼 굴지만, 정작 스승 신재효와 흥선대원군 사이의 치정 싸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고루한 서사에 매몰된다. 2012년(2002년이 아니다)에 발표된 미스에이의 ‘남자 없이 잘 살아’라는 곡을 마주 했을 때의 당혹감과 비슷했달까. 최초의 여류 소리꾼이라는데, 그가 결박된 서사는 왜 기생, 궁녀, 후궁들이 처하곤 하는 그것과 다름이 없고, 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정절을 지키는 것뿐인가. 결국 < 도리화가 >는 진채선이 부르는 춘향가의 반복일 뿐이다. 수지는 남장, 민 얼굴에 때 묻히기, 비 맞으며 돌 매달고 소리하기 등 고행을 단행했지만 그래도 들리는 말은 “저래놔도 예쁘네”에 지나지 않고, 초중반 진채선의 선머슴 같은 모습은 왕에게 간택 받은 후 ‘메이크오버’된 아름다운 모습의 극적인 대비를 주기 위한 비교 지표로 활용될 따름이다. < 건축학개론 >의 서연이 대상화를 이용해 발돋움했다면, < 도리화가 > 진채선은 대상화의 덫에 먹혀버린 것이다. < 건축학개론 > 에서처럼 수지 그대로의 모습을 연기하기 역시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이제는 색깔 없이 투명하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비춰 보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수지가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 함부로 애틋하게 >에서도 수지가 내놓은 답은 답보 상태다. 털털하고, 명랑하고, 구김살 없는 캔디형 여주인공이자 다큐멘터리 PD(사실 이 직함은 아무 의미가 없다) 노을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을 점령한 신파와 최루성 드라마 여주인공의 전형이다. 그녀는 노을을 연기하며 < 건축학개론 > 때보다 능글맞아졌을 지언정, 툭툭 던지는 듯한 톤과 씩씩한 행동거지, 제스쳐들은 여전히 그대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수지에게서 ‘안 꾸며도 이렇게나 예쁜’ 스탠스의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지 않다. 수지는 타고난 미모가 어떻게든 가려지지 않는다는 장점을 활용해 수수하고 털털하지만 사실은 예쁜 캐릭터를 이미 < 구가의 서 > 때부터 많이 반복해왔다. 이런 캐릭터들은 시종일관 화려하게 꾸민 다른 여성 캐릭터들과 빈번히 대조되고, 마치 ‘개념녀’에 대한 강박과도 비슷한 굴레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지는 예쁘다. 어떤 전제를 달고 토를 붙이더라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냥 그걸 마음껏 보여주면 안 되는 건가. 늘 소박하고 꾸미지 않는 배역을 맡아온 수지의 선택엔, 대중들이 그녀를 소비하는 방식이 개입되어 있다. 대중이 수지를 소비하는 법은 현아나 설현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여성 스타를 성녀 혹은 창녀의 고전적인 이분법으로 소비하는 데 익숙한 이들은 수지의 섹시함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적인 은유, 예를 들어 늘씬한 뒤 태를 드러내며 유혹하는 손짓이 없이도(혹은 없기에) 수지를 사랑해왔다. 그녀는 그런 대중의 안온한 사랑 안에서 비타민 음료를 들고 생글생글 웃거나, 흰 원피스를 입고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순면 생리대와 땅김 없는 수분크림을 내밀면 됐다. 그런 수지가 도발적인 배역을 맡거나 욕망을 드러낸다면, 대중들은 당혹감과 배신감에 휩싸여 그녀를 비난할 것이다. 예상에 불과하지 않냐고? 수지는 이미 작년 이민호와의 열애 보도로 한 차례 대중들의 인지 부조화와 맞닥뜨렸다. 한 매체는 수지와 이민호의 데이트를 취재하기 위해 프랑스와 런던을 찾았고, 그들이 묵은 호텔 이름까지 상세히 보도했다. 대중들이 열을 올린 것은 물론, 이들의 동침 여부였다. 네티즌들은 동선과 날짜를 짜맞춰가며 연인이 동침을 했을지 아닐지에 설전을 벌였고, 충격과 배신감을 토로하면서도 수지와 이민호가 묵었다던 호텔의 이미지들을 공유하는 비상한 열정을 보였다. 국민 첫사랑 수지의 열애는 적잖은 가십거리가 됐다. 하지만 그녀는 이 부분도 아이유나 설리처럼 의외의 인물과 의외의 방식으로 연애를 밝힌 것이 아닌, 서로의 이미지를 보강해줄 수 있는 매우 정석적인 인물과 해외 데이트 파파라치 공개라는 ‘셀럽’ 스러운 과정을 통해 모범적으로 연애를 발표했고, 덕택에 비교적 이미지에 큰 타격 없이 파장이 진화될 수 있었다.

그녀의 성역은 여전히 굳건하지만, 나는 이제 그 너머의 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 대중적으로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무색무취의 그녀가 보여준 매력은 아직 백지 그 자체의 매력뿐이다. 자의식 없는 아름다움에는 한계가 있고, 국민 첫사랑은 기실 < 건축학개론 >으로 이미 끝을 냈어야 하는 게 맞다. 그녀가 당장 < 차이나 타운 >의 김고은처럼 머리를 자르고, < 검은 사제들 >의 박소담처럼 피를 토하고, < 아가씨 >의 김태리처럼 전라 연기를 펼쳐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녀의 욕망이 궁금하다. 또래 스타이자 같은 아이돌 출신인 아이유, 설리 등이 명백하고 뚜렷한 욕망을 투사하며 대중 앞에 현현히 자기현시를 하고 있는 바로 그 반대의 항에 수지는 서 있다. 수지를 말한다면, 수 지 자신보다는 대중들의 시선을 말하게 되고, 그녀를 규정해온 배역들에 대해 말하게 되는 건 그녀 자신이 무엇을 지향하는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수지의 면면에서 어떤 개성적 특징을 찾아 내자면, 나는 그것이 여성성이 아닌 소년성이라 느낀다. 입을 크게 벌리고 코를 찡긋거리며 와하하 웃고, 기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씩씩하면서도 우직한, 초등학생 남자아이 같은. 나는 그런 모습들을 “국민 첫사랑”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미면 이렇게나 예쁜”의 전제가 붙지 않는, 온전한 수지로서 보고 싶다. 어떤 시선에도 결박되지 않고, 대중의 호명에 응하지 않는 수지. “내 이름은 수지가 아닌데, 자꾸만 실수로 수지라 부를 때”면, 어떤 수지가 등장할까. ‘굿 걸’이 아닌 수지를 보기 좋게 꺼내 보일 수지를 고대한다.

    에디터
    장우철, 손기은, 정우영, 유지성
    이예지('씨네 21' 기자)
    일러스트레이터
    이자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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