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기계 인간이 사는 집

2016.09.27이충걸

언젠가 이 시절을 뒤돌아보면, 아이폰이 출시되는 9월 어느 날과, 그 전에 소요하는 여타의 날들로만 기억할 게 뻔하다. 잡다한 범주로 우리를 분류하는 디지털의 나날들이 요즘 삶의 모양을 잡아간다지만, 어떤 물건도 전화기의 성공을 대체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비 자본주의의 불도저 전파 방식 이전에 기술 스펙과 시장 가격이 생의 주제를 점령하다니.

기기들을 스마트하게 만드는 동일한 요소들 – 연결성, 세련된 소프트웨어, 반지성 – 은 그동안 나온 제품들을 순식간에 예스럽게 만든다. 사실 집이 새로운 디지털 개척지가 된 건 한참 전의 일. 집 안에서 일어나는 행동 데이터를 흠뻑 담은 센서들은 모든 것에 찰싹 부착되었다. 칫솔, 냉장고, 전기밥솥, 섹스 토이, 대문 열쇠까지 집 구석구석에 점점이 박혀 당신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또 무엇을 갈망하는지 척척 알아맞힌다. 이것들은 개화하기 전엔 암기식의 기계적 의무만 실행했다. 냉장고 디자인은 그 이후 몇십 년 동안 별로 변한 것도 없다. 하지만 지금의 스마트 냉장고는 전자 박람회 기간이 아니더라도 거의 언제나 (주변을 인지해 서로 의사소통하도록 고안된 웹 연결 네트워크인) 사물 인터넷의 주제로 등장한다. 음식 종류에 따라 온도를 조절하고, 물을 더 마셔야 한다고 상기시키고, 고기가 떨어지기 전에 주문하는 냉장고는 현재 진행 중인, 앞으로도 몇십 년 동안 가속화될 변화를 위한 꽤 괜찮은 대리인이다. 항차 집안 곳곳의 스마트 표면들은 거기 놓이는 무엇에든 반응할 것이다. 사용할 물과 세제량을 정하기 위해 빨래 더미와 더러운 정도를 헤아리는 세탁기, 바깥 날씨에 따라 실내 온도를 바꾸는 에어컨, 닭 한 마리를 던져놓으면 알아서 레시피를 제안하는 오븐, 머그 잔을 내내 따뜻하게 유지시켜 주는 조리대, 당신의 생활 패턴을 감지해 아침에 일어나는 걸 확인하자마자 쪼르륵 커피를 내리는 커피 머신….

한편, 미래의 보안 시스템은 안면 인식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지문과 심장 박동 같은 생체인식 센서로 무장할 것이다. 현관문이 당신을 알아볼 때는 열쇠를 챙길 필요도 없다. 잠은 몇 시간 자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시시콜콜 모니터하는 건 집이 하는 일 중 가장 사소한 것이다. 스마트 변기만 해도 임금의 똥오줌이 든 매화틀을 살피는 지밀나인처럼 당신의 건강 여부를 비위도 좋게 탐지해서 의사며 보험회사와 공유할 테니까. 심장 박동이 너무 느리거나 호흡이 평소와 다를 때, 그런 신경 쓰이는 물리적 신호를 포착해 스스로 알아서 도와달라고 어딘가에 전화하는 집에서라면 혼자 밥 먹고 혼자 죽는다는 공포가 조금은 상쇄되지 않으려나? 좋건 싫건, 집까지 당신을 스토킹하는 세상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겠지만. 하지만 스마트폰이 당신을 미행하고 빼도 박도 못하는 민형사적 증거를 남긴 지도 아주 먼 옛날. 수년간 지속돼온 나노 단위의 기록은 집을 바퀴처럼 돌아가게 만들었다. 데이터 접근 권한을 가진 기술 회사들은 당신 삶에 무엇이 적절한지 결정하는 주체가 되었다. 나 또한 나의 관심을 두고 경쟁하는 기기들에게 불협화한 꼰대 같은 상대가 되진 말아야지, 하고 주먹을 꽉 쥐는 것이다. 좋게 보면 집의 모든 전자 기기를 다스리고 내 삶도 관리하는 단일의 인지 조수를 갖게 되는 셈 아닌가? 도움을 주고, 친절하고, 늘 어울릴 수 있으나 결코 방해하지 않는. 스물네 시 간 대기 중이나 육체는 없는. 또 기계 조수의 전지전능한 음성은 집 안의 사교 역동성까지 변화시켜 쓰레기 문제로 마누라와 대치할 때 눈치껏 청소기에게 찔러줄 것이다. 정말 제대로만 작동하면 눈치도 못 챌 것이다. 집게 같은 로봇 팔은 당신 피부를 스크럽하다가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스승과 춤을 추거나 그를 꼭 안을 수 있도록 멀리서도 제어 가능한 동무 아바타로 기능할 것이다. 결국 확장된 사회 풍경 속에서 미래 주택의 진정한 가치는 집을 떠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약속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다음 마당을 책임지는 기계 서사의 무자비한 헌신에 뉘라서 초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놀랍게도 업그레이드된 기기들이 제시하는 건 감시의 완곡한 표현이다. 당신이 언제 집에 들어오고 언제 불 끄는 걸 잊고 밖에 나가는지 다 아는 전등의 지능은 정보 수집과 통제라는 샴쌍둥이 목적에 부합된다. 데이터는 가장 막강한 채굴 자원. 시시하건 말건 따분할 틈이 없다. 집은 내내 당신의 습관을 추적하고, 행동을 예측하고, 윤곽을 만들어 데이터의 UFO 모선에 보고한다. 기술 회사가 기계에게 자기를 더 노출하고 더 고백하도록 당신을 조종하면, 당신은 매 초마다 너무 유용한 데이터를 먹이로 주고, 자치적인 기기들은 첩보를 동아전과 처럼 펴 들고 당신에 대해 피 터지게 공부하는 것이다.

사실 스마트 기기의 진정 기발한 점은 소유에 대한 전통적 모델들을 뒤집는 방식에 있다. 본질적으로 당신은 네트워크로 이어진 살림살이를 정말로 사거나 소유하는 게 아니라, 그 회사가 정한 조건에 맞춰 빌리고 작동시킬 뿐이다. 저항은 할 수 없다. 당신은 한때 멍청했던 물건들보다도 스마트해질 수 없다. 제조업체가 ‘허락’한 곳이 아닌 데서 고장난 제품을 고치다가 문득 이상한 죄의식이 밀려오면, 그때 비로소 깨달을 것이다. 당신은 돈 주고 산 사물을 지배하지 못하며, 기기 회사는 사용권이 지불된 물건을 통해 역으로 당신을 통제한다는 것을. ‘스마트’가 도시의 무기화된 감시 시스템에 조잡하게 적용되면 제품 약관에 따른 사유화, 알고리즘적 통제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기가바이트의 혁신을 목숨 걸고 강조하면서 공중변소를 청소하지 않는 건 어처구니 없는 이 도시의 이율 배반적인 냄새. ‘스마트’라는 단어는 ‘고통’의 게르만적 조어에 뿌리를 두었으니 내재된 폭력성과 혼란, 지능과 해악은 가려진 채 틈 있을 때마다 이데올로기가 파고든다. 하지만 어디에 권력이 놓이고 어떻게 작동하는 지에 대한 판단은 늘 생략된다. 조작과 기만에 밝은 수백만 명이 반복 복제하는 결정들은 모두의 삶을 향상시킬 거라고 다들 믿고 싶어 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는 건 대충 겪어봐서들 안다. 그래봤자 환한 척 불투명한 미래의 일. 자율주행 시스템만 해도 궁지에 몰린 대량 교통 체계의 강력한 대체 수단으로 떠올랐다 하나 플라잉 카는 대중화될 기미조차 안 보이는 걸. 어쩌면 디지털 미래란 고릿적 기계류를 교체하고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화려할 것 없는 겉치레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진짜 스마트한 사람들은 애초에 이런 기기며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시대를 납득 시킨 기술 업계의 결정권자들 같다.

    에디터
    이충걸
    포토그래퍼
    Gettyimages / 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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