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서울, 무작정 어른

2016년, 서울에서 내 나이로 산다는 것, 도시를 관찰하지만 발붙이지 않는 40대, 미로 속에 빠진 듯한 30대, 밥벌이를 고민하는 20대. 개인이 쌓고 제각각 흡수한 서울의 시간에 대하여.

조혜령 24세, 대학생

서울의 어디에 사나? 은평구 응암동. 골랐다기보다는 부모님이 결혼한 뒤 이 근처에 자리 잡은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이사를 몇 번 하긴 했지만 나는 그 결정권에서 철저히 제외되었다. 백련산이 가까워서 밖을 나설 때 공기가 좋다(는 착각이 든다). 맥딜리버리가 불가능하다. 가장 좋아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인가? 사직터널에서 사직공원, 배화여자중학교까지 이어지는 산책로. 사직공원 옆 큰 정자에 앉아서 오후 네다섯 시쯤 하교하는 학생들을 볼 때. 서울에서 가장 가치 있게 돈을 쓰는 방법은 뭘까? 인터넷을 통한 해외 직구.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서울아트시네마 매표원. 가벼운 목례. 여기가 견딜 수 없이 지긋지긋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1호선(종로 3가에서 외대앞역 구간) 객실에서 풍기는 지린내에 어느새 익숙해진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서울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것은? 대학교. 대학교 안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고 재미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취업 스터디 같은 것 말고. 이 도시에 살며 세운 계획이 있나? 외국어를 열심히 익혀서 하루 빨리 이 도시를 벗어나자.

나에게 서울은 대학생이 된 뒤, 처음으로 자립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공간이다. 요즘 여기저기서 청년의 자립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꼭 스스로의 삶에 책임지려 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청년들에 대해 목청 높여 얘기 한다. 하지만 자립을 원하지 않는 것은 오직 청년들뿐일까?

서울에 자리를 잡은 가정에서 부모가 통상적으로 당부하거나 혹은 요구하는 “너는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라는 문장이 어떤 뜻을 함축하고 있을지 생각해보자. 그것은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기만 한다면, 그 외의 모든 것은 부모가 책임지겠다는 뜻이다. 집을 제공해주고, 옷을 사주고, 음식을 차려준다는 뜻이다. 음식이 맛이 없다고 신경질을 내면 어찌 되었든 다음에는 더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하고, 밤늦게 공부하느라 배가 고프면 부엌에 먹을 것을 차려놓거나 음식을 쟁반에 담아 책상 앞에 가져다준다는 뜻이다. 먹기만 하면 설거지는 알아서 해결해주겠으며, 옷은 빨아주겠으며, 심한 경우 교우 관계나 사제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 역시 부모가 해결해주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라는 공간은 사는 데 필요한 직접적인 일들은 모두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아이를 키우는 곳이라는 뜻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삶은 과연 이렇게 ‘중요한’ 것들로만 이루어질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중요한’ 일들은 본질적으로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공부를 하려면 책과 노트와 펜이 있어야 하고, 그 물건은 일을 해서 돈을 벌어 구입해야 한다. 또 공부를 하려면 밥을 먹어야 하며, 그러려면 요리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또 적당한 재료를 사놓아야 하며, 다 먹고 나서는 설거지도 해야만 한다.

‘어른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은 대학교에 들어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내게 떠오른 질문이다. 아직까지도 내가 고민하고 있는 하나의 화두이기도 하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른’을 자신의 삶에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정의해보자.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 내 인생의 어떤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이다. 대학생인 나의 입장에서 예를 찾자면,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조금이라도 번다거나, 재료를 사서 식사를 준비한다거나, 빨래를 한다거나, 방 청소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만약 이런 일들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중요한 일을 완수할 수 없다는 게 명제라면,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의 삶을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른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너는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라는 요구의 정반대에 있는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전혀 본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 부차적으로 느껴지는 것, 본질적인 목표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이 오히려 삶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런 능력을 기르고 있을까?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해라”라는 요구를 한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양육 거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 자질구레한 것들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걸 끝끝내 거부한다. 아내가 아침밥을 차려주기를 바라는 남성이라는, 보편적이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남성상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는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면 자신은 더 중요한 것을, 그러니까 돈을 벌어오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앞서 생각해 본 ‘어른’이란 개념에 따른다면, 그는 나이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어른이 아니다. 그는 성장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이라는 공간은, 특히 나와 같은 대학생에게, 어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할 훈련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은 채 무작정 어른으로서의 삶을 시작해야 하는 공간이다. 나 역시 아직까지도 어른이 되기 위한 훈련이 너무나도 귀찮고 그저 나를 힘들게 하려는 일처럼 느껴진다. 공부는 힘들지만, 힘든 것은 그나마 견딜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은 근본적으로 나에게 아직 익숙지 않다. 그 일들을 처리하는 나의 절차 자체가 미숙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일들을 할 때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수시로 드는 것이 가장 힘들다. 어떨 때는 너무나 명백한데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음식을 먹으면 설거지 거리가 쌓인다는 건 초등학생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설거지는 단 한순간도 줄어들지 않으며 아무리 설거지를 많이 해도 또 설거지 거리가 생긴다는 사실은 체험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엄마가 매일 쉬지 않고 청소하는 이유를 어렸을 때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유아적인 공간에 살고 있다. 퇴행적인 공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 아이들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 하며, 어른들은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형편이 넉넉해 집안에서 아낌없는 금전적 지원을 해줄 수 있다면, 혹은 결혼해서 집안일을 전담해줄 ‘배우자’를 찾는다면, 그러한 훈련은 또다시 유예될지 모른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그러한 훈련이 말이다. 하지만 아이의 성장을 거부하는 사회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도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사람들을 이미 알고 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주변 사람들 삶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을 떠맡는 사람들을 말이다.

‘엄마’라는 업무는 그 자체로 차별적인 일이고 끔찍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타인들의 삶을 격하한다는 점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성장을 거부하면서, 우리 삶에 필수적인 일들을 스스로 해결하기를 거부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요리’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자주 본다. 많은 사람이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어처구니없다는 느낌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왜냐면 아주 저렴하게 어떤 요리를 한다고 말해놓고, 텔레비전 속의 요리사들은 냉장고에서 온갖 재료를 다 꺼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자질구레한 것, 바깥에 있다고 여겨지는 무엇이 어떤 대상에서는 훨씬 더 본질적이라는 앞서의 논의를 따라서 말이다. 인간이란 무엇보다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요리란 그 먹고사는 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인류가 축적한 기술이다. 그것을 익히는 일은 결코 부차적이거나 귀찮은 일이 아니며 오히려 모종의 충만함을 느끼게 해준다. 나의 삶을 위해 필요한 그 일을 내가 잘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그 기술을 아웃소싱한다. 돈을 주고 사먹거나, (페미니즘이 아닌 성평등주의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을 ‘배우자’에게 맡긴다.

이런 상황의 책임을 특정한 계층에게 돌리고 그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리를 존재의 기술이란 말로 포장하면서 억지로 숭고함을 부여하려는 것도 아니다. 요리를 못하는 자취생을 비난하거나, 그들이 반드시 바쁜 와중에도 요리를 해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나에게 서울이란 공간은 ‘어른이 되는 것’, 그러니까 ‘자립’에 생각보다 많은 기술이 필요하다고 처음으로 알려준 곳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그 기술을 가르칠 생각이 없으며, 아이들 역시 그 기술을 배울 생각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지금 늦게나마 그러한 기술에 익숙해 지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이 사회가 아이들에게 자립 훈련을 조금 더 많이 제공해주는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책임지지 않은 것은, 내가 살아 있는 한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책임지게 된다. 그러면서 나의 삶은 점점 추상적으로 변해간다. 설거지를 할 때 나는 힘들다. 하지만 나는 그때 구체적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앞으로도 그러한 느낌을 받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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