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ABNORMAL, 서울

2016.10.07GQ

2016년, 서울에서 내 나이로 산다는 것, 도시를 관찰하지만 발붙이지 않는 40대, 미로 속에 빠진 듯한 30대, 밥벌이를 고민하는 20대. 개인이 쌓고 제각각 흡수한 서울의 시간에 대하여.

이성휘 42세, 하이트 컬렉션 큐레이터

서울의 어디에 사나? 군자동. 전세가 때문에 산다. 교통이 편리하고 집을 손 볼 수 없는 점은 별로다. 낮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곳은? 주중엔 회사, 주말엔 경복궁 일대 그렇다면 밤 시간은? 집. 가장 좋아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인가? 한강 다리를 건너는 버스 뒷자리. 물 위를 건너는 걸 좋아한다. 리프트 타는 것도 좋아한다. 서울에서 가장 가치 있게 돈을 쓰는 방법은 뭘까? 모르겠다. 이곳과 가장 달라 보인 세계의 도시는 어디인가? 어떤 면에서 그런가? 도쿄. 질서, 청결, 타인에게 피해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만나면 뭘 하나?) 회사 동료를 빼면 작업실 친구들이다. 함께 작업실을 쓰는 작가들과 밥, 술, 수다를 공유한다. 여기가 견딜 수 없이 지긋지긋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회사 근처에서 밥 먹을 곳이 마땅치 않을 때. 최근 서울에서 10년간 벌어진 일 중 가장 인상적인 건 뭔가? 노무현 대통령 노제. 서울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무엇’을 꼽는다면? 모든 관광명소. 그렇다면 가장 과소평가된 것은? 모르겠다. 이 도시에 살며 세운 계획이 있나? 없다.

나는 올해로 스물두 해째(태어나서 만 2년 동안 산 것 포함) 서울에 살고 있다. 논산에서 열 몇 해를 살고, 대전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닌 후, 1996년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지금까지 서울에 살고 있다. 졸업 후 대전 학교 기숙사에서 실어온 짐은 0.5톤도 되지 않았다. 책, 옷, 이불 외 가구는 조그만 티 테이블이 전부였다. 그 짐이 지금은 2.5톤 트럭에 실어도 모자랄 정도로 불어났다. 여전히 대부분의 짐이 책이지만, 그 외 잡동사니가 많아졌다. 십수 년 전 주변에서 얻은 식기를 여전히 쓰고 있고, 아버지가 무려 논산에서 주워온 식탁도 아직 쓰고 있다. 서울에서는 역삼동, 삼각지, 돈암동, 방배동, 이문동, 다시 방배동, 그리고 군자동에서 살았다.

현재 살고 있는 군자동은 9년째 거주 중이고, 전세금이 오르지 않는다면 당분간 더 이곳에서 지내고 싶다. 1996년 겨울, 서울에 올라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 20년 중 최근 4년을 제외한 대부분의 세월 동안 나는 학생이자 알바생이었고, 그래서 서울의 곳곳을 누비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먹고 잘 곳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지역은 제한적이었다. 2016년 마흔둘의 나이에도 여전히 자취생 모드로 살고 있는 내게 아직 집은 잠자는 곳 정도일 뿐이다.

하루 중 도시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할 때는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갈 때다. 그 길에서 나는 그저 침묵하며 동네를 관찰한다. 불온하고 음흉한 마음이 든다. 9년 전, 3년 8개월을 산 방배동 반지하 집에서 이사 나올 즈음 나는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 2007년 10월 30일의 일기다. 제목은 ‘Abnormal’이다.

“과외 가려고 지하철을 탔는데 한산한 오후라서 대부분의 승객이 앉아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행색이 좋지 않은 여인네가 널널한 좌석에도 불구하고 혼자 반대편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그 여인은 쌀쌀한 날씨에도 아랑 곳없이 후줄근한 반팔 티에 고무줄 넉넉한 긴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 출입문 유리 창에 자신의 모습을 연신 비춰보고 있는 중이었다. (지능이?) 모자란 듯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짓으로 연신 자신의 가슴선을 유리창에 비춰보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근처에 앉아 있던 승객들은 흘끔흘끔 그 여인을 곁눈질 하다가 다시 무관심한 척 딴 방향을 보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여인이 건너 칸으로 옮겨 가면서 승객들의 관찰(관음)은 종료되었다.

일주일 후면 이사하고 말 집이지만 한달 된 새 이웃에 대해 말하자면, 3년 8개월간 살아온 이 집은 1층에 주인이 살고, 2층에 1개, 지층에 2개의 셋방이 있다. 지층의 한 집이 우리 집이고, 다른 한 집은 봄엔가 술에 절어 밤새 주정하다 경찰까지 출동시킨 형제가 살다가 한 달 전 나갔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몸이 불편한 40대 아들과 노인 아버지다. 나는 두 부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나 동생은 본 적이 있단다. 동생 추측으로 아들은 몸이 불편해서 칩거하고 아버지가 폐휴지를 내다 파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동생의 추측이 믿어지지 않는 게, 이 허름한 방이 그래도 전세 5천만원이나 하기 때문에 폐휴지를 모아 파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 돈을 주고 들어올 형편이 되었을까 싶다. 아무튼 그들의 경제활동이 어떻든 간에, 2주 전쯤 할아버지가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고 밤새 술주정을 했다. 내 옆방이기 때문에 노인네가 푸억, 우억, 크억 하면서 악을 쓰는 소리가 밤새도록 잘 들렸다. 오늘도 두어 시간 전쯤부터 술주정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욕도 들린다. 뭔가 분노를 토해내는 듯 주기적으로 악을 쓴다.

이런 사람들에게 ‘비정상’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지만, 실제 생활에서 나는 사실 정상/비정상을 구분해서 반응하고 있기 때문에, 모순이지만 그 모순을 얘기한다면, 우선 나 역시도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한다. 잠재의식 속에서 나는 그보다 더한 정도까지도 갈 수 있음을 매번 느낀다. 그래서 그들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기엔 나 또한 비정상이기 때문에 나는 갈등하곤 한다. 그 다음, 집주인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부동산 사무실에 아예 도장을 맡겨놓고, 도장 찍어오면 세입자를 그냥 받는다. 내가 이 집에 들어올 때도 주인 얼굴 한 번 본 적 없이 계약을 했으며 이사 당일에도 집주인은 없었다. 참 무심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상한’ 가족인 것은 아니다. 활달한 여덟 살짜리 아들과 애교가 넘치는 여섯 살짜리 딸을 키우는 젊은 부부다. 그들끼리는 화목한 가정이다. 그러나 세입자들에게는 철저히 무심하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안 것은, 무심한 척하면서도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들끼리 쑥덕대고 의심해왔다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도 잊지 않았고, 의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번은 둘째 동생이 우리집에 왔다 아무도 없어 집주인에게 혹시 열쇠가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자물쇠를 통째로 바꿨기 때문에 주인집에 우리 열쇠가 없다는 것을 동생은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최근에야 주인 여자에게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 말을 해주면서 덧붙이는 말이, 자기들은 도난이나 무슨 사고가 났을 때 의심받을까 봐 세입자들 집 열쇠를 따로 갖고 있지 않는다고 했다. 세입자로서는 들을 필요가 없는 어이없는 말이었다. 그들은 둘째 동생이 혹시 열쇠가 있느냐고 물어봤을 때부터 순수한 ‘문의’로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3년 8개월을 아래층에 살면서 주인 부부에 대한 이미지는 앱/노멀을 왔다 갔다 한다. 그들은 어떤 세입자가 들어오든 무심하게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있는지,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관찰(관음)하고 의심한다. 그들이나, 술주정에 동네 사람 깨우고 경찰까지 출동시킨 형제들이나, 오늘도 술 주정에 밤새우실 노인네나 다 음흉한 구석이 있다. 앗, 그런데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자판으로 두들기는 나의 음흉함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 방배동 끝자락에서 도합 5년 8개월을 살면서 여러 느낌을 갖고 있는데, 그동안 “교통이 편해요” 정도나 말해왔지만, 복개천 위의 동네, 그 하수구 냄새, 그 위의 구획, 그 안을 맴도는 사람들, 그들의 가식적인 모습에 대해서, 그 기이함에 대해서, 그들 속에 섞이지 않으면서 관찰(관음)해온 내가 일주일 후 새로운 동네에 가서는 어떻게 살까. 음흉한 내가.”

그로부터 9년이 흐른 지금, 나는 방배동에 살 때보다 아는 이웃이 더 없다. 출근 시 건물 3계단을 내려오는 몇십 초 동안에도 아무도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내가 누군가와 알고 지낼 리 만무하다. 군자동에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 모르고 1년 같은 9년을 한 동네서 보냈다. 세입자인 나는 결국 서울 어느 동네에서도 이웃을 만들지 않을 것 같다.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고 동네에 섞이지 못하는 대신 출퇴근길에 냉소적인 척 결국 음흉한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관음)할 것이다.

서울에서의 22년, 많은 곳이 익숙하지만 정 붙인 곳은 없다. 고등학생 때 이승환의 앨범 속지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구절을 본 기억이 있다. 한동안 나는 이 문장에 꽂혀 있었고, 나중엔 미니홈피 대문에 이 말을 걸어놓기도 했다. 20대 때는 당시 심취했던 소설이나 음악 때문에 더더욱 모든 게 덧없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받은 교육은 이 세상에 대해 강한 욕망과 기대를 가지라고 했고, 그 시절 대한민국은 더욱 부강해질 수 있을 것이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한번 스민 허무는 도대체 빠져나가지 않아 나이를 먹을수록 모든 것이 일시적일 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더 굳었다. 나의 부모는 장녀의 20대 시절 방황을 IMF 사태라는 대한민국 현대사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그 시기 나는 방향을 잃은 스스로에 대한 냉소 때문에 더 방황했다고 해야 맞다.

어느새 21세기, 삶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폐휴지를 주워다 팔거나, 밤마다 큰 소리로 술주정하는 이웃이 옆에 살지 않는다 하여 삶이 더 화사해지는 것은 아니다. 삶은 한 번도 비정상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간 나(우리)는 몇몇 영웅을 잃었다. 나는 “사람은 본디 악하게 태어나는 거”라며 성악설을 주장한 옛 지인의 말을 종종 떠올린다. 서울의 모습도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서울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들을 응원하지만, 내 불온한 마음은 큰 기대를 가지지 말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이상 지리멸렬한 삶으로부터 도망치지는 않는다. 순간을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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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손기은, 유지성
    포토그래퍼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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