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서울과 노포

2016년, 서울에서 내 나이로 산다는 것, 도시를 관찰하지만 발붙이지 않는 40대, 미로 속에 빠진 듯한 30대, 밥벌이를 고민하는 20대. 개인이 쌓고 제각각 흡수한 서울의 시간에 대하여.

정동현 35세, 푸드 칼럼니스트

서울의 어디에 사나? 신촌 부모님 댁. 낮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곳은? 회사가 있는 성수동. 그렇다면 밤 시간은? 종로와 을지로 사이를 배회하며 허름한 음주 생활을 즐긴다. 가장 좋아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인가? 낙원동에 있는 식당, 호반. 강굴이 나오기 시작하는 이 맘때쯤이 가장 좋다. 서울에서 가장 가치 있게 돈을 쓰는 방법은 뭘까? 호반에 가서 순대와 강굴을 먹는다. 이곳과 가장 달라 보인 세계의 도시는 어디인가? 파리. 길거리에 널린 카페와 빵집의 수준을 목도했을 때, 꿈에 그린 유토피아에 있는 듯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팀원들. 주로 식사를 한다. 하루에도 여러 끼를 함께 먹고 마신다. 여기가 견딜 수 없이 지긋지긋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맛이 없는데 불친절하기까지 한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서울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무엇’을 꼽는다면? 곧 나올 < 미슐랭 가이드 > 서울 편의 별 개수다. 그렇다면 가장 과소평가된 것은? 서울의 불친절함. 어깨를 활짝 펴도 좋다. 이곳은 어디에 내놔도 세계 최고다. 이 도시에 살며 세운 계획이 있나? 돈을 아껴 쓰며 살기로 매해 계획한다. 이건 다짐인가?

시사회에 당첨되면 으레 서대문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드림시네마’였다. 서울 유일의 단관 극장이자 시사회 전문 상영 극장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곳. 서울에서 가장 크다는 영등포 CGV Stadium 상영관의 좌석 수가 500석 남짓인 것을 생각해보면 707석의 크기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시설은 1964년 처음 개장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좌석은 좁아 무릎이 앞 좌석에 맞닿았고 경사는 완만해 앞 사람 머리 크기에 따라 그날 관람의 질이 결정됐다. 그럼에도 한 번에 대규모 시사회를 하자면 서울 시내에 드림시네마만한 곳이 없었다. 그 드림시네마는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곧 철거될 운명이었다. 극장은 마지막 상영작으로 < 더티 댄싱 >을 내걸었다.

“서대문에 있는 극장 말이지. 대로변에.” 친구는 ‘드림시네마’란 단어에 바로 반응했다. 바에 나란히 앉아 칵테일을 마신 날이었다. 그와 나는 하드보일드풍 마티니와 등줄기를 반으로 쪼갤 듯 비감(悲感)한 김렛을 나눠 마셨다. 맥락을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가는 중 ‘더티 댄싱’이란 단어가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 < 더티 댄싱 >을 마지막으로 상영한 드림시네마가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맥락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는 조금 전 이미 동대문 근처 ‘경상도집’과 을지로3가의 ‘영락골뱅이’에 들렀던 것이다. 40년 업력을 자랑하는 경상도집은 동대문 국립의료원 뒤편 담벼락에 있다. 여름에는 시원하게 천막을 치고 겨울에는 난로를 내놓는 이 집은 연탄불이 주 화력이다. 연탄불의 불완전 연소하며 나온 일산화탄소에 중독돼 일가족이 사망했다는 참혹한 기사가 나오던 것이 근 30년 전이었다. 그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이 집은 간장에 재운 돼지갈비를 연탄불에 구웠다. 을지로3가의 영락골뱅이도 업력으로는 경상도집 못지않다. 나의 아버지가 지금 나보다 어리던 시절부터 다니던 곳이다.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40년은 거뜬히 됐을 것이다. 이곳 골뱅이 무침의 모양새는 단순하다. 간장과 고춧가루, 한 국자 가까이 되는 다진 마늘, 황태포 한 주먹과 자르지 않은 통골뱅이, 매콤한 파채가 큰 국그릇에 담겨 나온다. 사람들은 손수 가위를 들고 골뱅이를 잘라 양념에 무치며 큰 소리로 이야기한다. 영락골뱅이 단골이던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온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받아둔 어음이 부도가 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산 영도 산 기슭 단칸방에 살게 된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을지로풍으로 만든 골뱅이 무침을 자주 먹었다. 나는 그 골뱅이 무침의 출처를 나중에 알았다. 아버지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나와 친구는 그런 노포들을 마치 수집하듯 종로와 을지로를 쏘다녔다. 예전에는 그야말로 을지로 기계상가 인부들과 과거를 추억할 만한 사람들이 다니던 곳이었다. 그러나 2016년 매스미디어는 서울 종로 뒷골목까지 들쑤시고 다닌다. < 수요미식회 > 발(發) 맛집 찾기 광풍은 종로 일대를 뒤덮었다. 협찬을 받아 방송을 해서는 ‘스마트’한 시청자를 사로잡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돈을 받고 쓴다는 블로그와 미디어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 < 수요미식회 >는 맛집 선정 기준을 새로 잡았다. 그 기준은 인기가 아니라 맛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기준으로 평가하니 자연스래 업력이 오래된 업장이 유리했다. 그런 곳은 임대료가 쉬이 오르지 않는 후미진 서울의 뒷골목 어딘가에 있기 일쑤였고, 주방을 맡은 이들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몰려드는 사람들의 규모는 대단했다. 순대 맛집으로 선정된 ‘전통 아바이순대’의 나이 든 주인장은 방송이 나간 후 몰려드는 사람들을 이겨내지 못해 문을 닫을 정도였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음식과 식당에 관한 글을 쓰는 나는 공부하는 마음으로 식당들을 순례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음식 칼럼을 쓰는 이는 손에 꼽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듯 이 사람 저 사람이 돌아가며 칼럼 난을 메웠다. 그 사이 종편이 출범했다. 시청률로 괴로워하던 종편은 제작비가 적게 드는 아이템에 매달렸다. 공중파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리고 스타 셰프가 탄생했다. 백종원이 시쳇말로 떴다. 우연이 아니었다. 인구 통계학적 변화에 따른 증상이었다. 지난해 한국의 1인 가구 수가 5백만을 넘었다. 전체 1천9 백56만 가구 중 27.2퍼센트에 달하는 수치다. 사람들은 요리를 하지 않을수록, 밥을 사먹을 수록 먹방과 쿡방에 열광했다. 신문은 음식 기사 지면을 늘렸고 요리책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만이 아니다. 영국과 일본, 미국이 이미 겪은 일이다. 나도 그 한 자락에 자리를 얻었다.

방송을 보고 허기져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먹으러 백화점에 간다. 요즘 백화점 식음 담당자들은 푸드 코트에 들어와달라고 가게 주인에게 읍소(泣訴)한다. 백화점 푸드 코트에 들어가면 3대가 먹고산다는 말을 주워 삼키며 뒤로 줄을 대던 시절은 지나갔다. 아무 식당이나 갖다 놓으면 장사가 되는 시대는 더더욱 아니 다. 장안 유명한 식당들의 아들딸들이 차례로 백화점에 분점을 냈다. 그 흐름을 타고 지방의 맛집들도 하나둘 서울로 올라왔다. 전주의 칼국수집 베테랑이 파미에스테이션에 문을 열었다. 삼백집과 전주현대옥은 아예 서울에 거점을 두고 프랜차이즈를 시작했다. 대구의 미즈 컨테이너와 서가앤쿡, 춘천의 샘밭막국수, 부산의 설빙과 삼진어묵이 서울로 올라왔다. 포항의 라멘집 베라보는 망원동에 분점을 냈다.

서울로 올라온 건 지방 맛집만이 아니다. 태국 음식점 ‘창수린’에서는 필리핀 출신 점원과 태국인 요리사가 일한다. 연남동을 주름잡는 툭툭누들타이의 주방도 사정은 비슷하다. 왕십리에는 시집온 베트남 부인이 요리를 하고 한국인 남편이 홀을 담당하는 팜티진이 있다. 이처럼 몇 년 새 중국과 동남아 음식이 서울의 골목 사이사이를 점령했다. 그 이유를 알려면 인구구조의 변화를 봐야 한다. 2015년 국내 다문화 가정은 29만9천 가구로 전체 가구 수의 1.6퍼센트를 차지했다. 국내 체류 외국인은 지난 6월 2백만 명을 넘어섰다. 서울의 대림, 가리봉동은 이미 조선족 동포가 전체 인구 중 차지하는 비율이 40퍼센트대에 육박한다. 양꼬치에 칭따오라는 조합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건대, 대림 뿐만 아니라 청담, 강남 일대에서도 양꼬치 식당이 성업 중이다. 베트남 여자와 한국 남자 부부가 차린 베트남 쌀국수집은 흔해 졌다. 노량진, 수유리, 왕십리 등지에 생긴 베트남 쌀국수집이 내놓는 국수의 맛은 호치민에서 먹던 것과 차이를 구별하기 힘들다. 공단에서 일하던 태국 노동자도 주방에서 웍 Wok을 잡기 시작했다. 인도 카레집의 원조 격인 동대문의 ‘에베레스트’는 이제 신세계 스타필드 하남에 100평 가까운 규모로 분점을 냈다. 10년 전만 해도 인도 노동자들이 주로 찾던 동대문 뒷골목의 작고 허름한 집이었다. 개인주의적 문화도 식문화에 녹아들었다. 사람들은 신촌 미분당의 바에서 쌀국수를 먹고 한남동 이치류 바에 앉아 양고기를 굽는다. 룸은 드물어 졌다. 대신 나와 친구처럼 홀로 혹은 둘이 작은 바에 앉아 밤을 지새운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라는 브리에 샤바렝의 말은 개인이 아닌 사회적으로도 유효하다. 사람들이 무얼 먹는가는 변덕스러운 유행의 결과물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의 신호이자 증상이다. 거대한 메갈로폴리스 서울 거주민들의 미각이 개개인의 취향을 넘어선 것이다.

이제 10년 전 마지막 단관극장이었던 드림시네마는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는 호텔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제 그런 대형 단관극장은 서울에 없다. 대신 다양한 취향만큼 그 공간을 잘게 쪼갠 멀티플레스가 있을 뿐이다. 그만큼 다양한, 그래서 자주 종잡을 수 없는 대중의 취향을 좇는 나는 점심 한 끼를 두세 번에 나눠 먹는다. 덕분에 때로 청담동의 이탤리언 레스토랑에도 가고, 끝내 짜지 않은 파스타와 달지 않은 디저트로 입맛을 망치기도 한다. 결국 내가 자리하게 되는 곳은 나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호기롭게 걷던 을지로 어디쯤이다. 특히 나는 취기가 돌면 홀린 듯 영락골뱅이를 찾는다. 취향과 유행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강한 인력 引力 앞에 늘 패자인 나는 필연처럼 동해산 골뱅이를 씹으며 소주로 입을 여러 번 헹궈낸다. 그러면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몇 십 년 전 내 나이였던 아버지의 크고 뜨거운 힘 찬 육성, 지금 서른다섯 살인 나보다 더 자신감 있게 느껴지는 기운. 서울이 나를 위해 오랫동안 품고 있던 나지막한 메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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