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젊은 작가들이 사랑하는 ‘연애 시’

2016.10.17GQ

12명의 젊은 작가가 12편의 ‘사랑에 관한 시’를 추천했다. 가장 새로운 언어를 다루는 사람은 가장 뜨거운 노래를 알았다.


머리카락에 걸린 밤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시끄럽다
머리카락을 주시하는 여자의 눈동자가 시끄럽다
머리카락보다 눈동자가 길어지는 밤
밤은 여자의 눈동자를 잴 수 없다고 시끄럽다
시, 끄, 럽, 다, 에 여자가 걸려 있다

내 머리카락을 잘라줘요 라고 말하면
당신은 뒷걸음쳤고
사랑해요 라고 말하면
당신의 그림자는 한 뼘씩 커졌지요
거대해진 그림자가 당신을 삼키기 전에
내 말이 나를 지울 수 있기를
빛이 전멸하는 순간에도
반짝임은 지속될 수 있다고 믿는 당신

거미가 거미줄에서 죽지 않듯이
나는 결코 당신 품에서 죽지 않아

여자가 자기 머리카락을 자른다
밤이 하얗게 질린다

비로소 깨어난 여자가
꿈에서 자른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엉엉 운다
눈물에 머리털 끝 하나 젖지 않는 아침이
여자를 비껴 천천히 굴러간다

장승리 < 습관성 겨울 >, 민음사

장승리의 ‘머리카락에 걸린 밤’보다 더 애절하고 관능적인 연애시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고른 건, 처음 읽은 이후로 수도 없이 입술에 다시 떠오른 주문 같은 시이기 때문이다. 매 계절 길을 걷다, 버스를 기다리다, 전철역의 계단을 오르다 중얼거렸다. 특히 “빛이 전멸하는 순간에도/ 반짝임은 지속될 수 있다고 믿는 당신/ 거미가 거미줄에서 죽지 않듯이/ 나는 결코 당신 품에서 죽지 않아” 부분이 사그라들지 않는 소용돌이처럼 마음 안쪽에서 반복되었다. 불안과 악몽에 대한 시로 읽을 수도 있지만, 어렵게 지속되는 사랑에 대한 시로 읽는다. 사랑을 위한 주문이라고 믿는다. 장승리는 2008년에 첫 시집을, 2012년에 두 번째 시집을 냈다. 2016년이니 이제 세 번째 시집을 내주면 좋겠다. 균열에 대해 가장 잘 쓰는 시인이지만 그 깨어진 틈으로 언제나 사랑이 보인다. 이제 당신의 입술에도 장승리의 시가 떠오르기를. 정세랑(소설가)


봄눈

깨진 사기 그릇 봄바람 봄바람
어제도 눈 오고 오늘도 바람
불고 그대 지나가지만 보이지
않네 정든 거리 갑자기 낯설어
눈 내리고 이 마른 시도 종이
도 글자도 눈에 젖어라 오늘
저녁 그대 혼자 가기 때문에
눈이 오네

이승훈 < 인생 >, 민음사

내가 싫어하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연애 상담이고 다른 하나는 연애다. 얼마 전에 연애 소설을 추천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마르키 드 사드의 < 규방철학 >을 추천했다. 연애 따위 다 망해버려라, 라는 심정은 아니었고 사드를 읽고 연애를 하면 성 해방과 남녀 평등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추천했는데 실제로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그 글을 읽은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알 도리가 없다. 이 글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이승훈은 늙은 시인이다. 사드처럼 막 나가진 않지만, 나름 막 나간다. 그의 시는 난해하지도 않고 유려하지도 않고 오롯하지도 않고 가만하지도 않다. 때론 트윗보다 못하다. 다행히 그는 책 제목을 잘 짓는다. 그의 시론집 제목은 <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 >이며 시집 제목은 < 이것은 시가 아니다 >, < 너라는 환상 >, < 사물 A >, < 인생 > 등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제목은 <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 >이다. 만나는 사람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다.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 정지돈(소설가)


옆에 대하여 1

어느 날 아침 내가 침대에서 본 남자는 죽어 있었다. 더 이상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실컷 자고 오후엔 우리 소풍을 가요. 나는 남자 옆에서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잤다.
해변은 휘어져 있었다. 그런 옆에 대하여, 노을에 대하여, 화염에 대하여,
그녀에 대하여,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김행숙 < 이별의 능력 >, 문학과 지성사

모든 시가 연애시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만 고르라면 까다롭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읽는 시는 거의 다 내가 쓴 시이기 때문이다. 나랑 내 아내는 매일 회사에 가야 한다. 주말에는 죽은 듯이 자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 몰랐던 시절부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죽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많이 하면서 살아왔다. 내 경우는 사춘기 때부터였다. 어쨌든 김행숙은 ‘옆에 대하여 1’에서 죽으면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정오까지, 저녁까지 잠을 자자고 한다. 이 시를 한 줄로 줄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 회사 가지 말고 계속 잠이나 자자, 자다 깨다 옆을 보자, 서로를 보자. 더 줄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 회사 가지 말자. 더, 더 줄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사랑해. 이 말에 숨겨진 말은 다음과 같다. 우린 헤어질 거야. 너는 죽을 거야. 손을 흔들자. 우린 다시 만날지도 몰라. 소풍에서 말이야. 손을 흔들자. 서로를 향해 뛰어가면서. 김승일(시인)


관광지

우리
나는 너무 슬픈 것 같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힌 낯선 얼굴로 네가 말했다. 어제의 문장에 머무르지 않아. 내가 말했지. 일찍 밤이 찾아오거나 혹은 영원히 밤 같은, 밤의 의미가 상실된 도시에서. 늘 서둘러 겁을 집어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서툰 풍경의 사람들. 폭우가 몰아치는 거리를 피해 너는 집으로 달아나려 입을 벌렸고, 나는, 나를 기다렸다. 정말 무서운 건 폭우를 피해 달아날 수 있는 새로운 다리가 놓이는 일이지. 너와 내가 공통의 분모를 가진 우리가 되길. 관광지처럼 빠르게 달아오르고 재빨리 잊힌 뒤 영영 그리워지길 바라진 않아. 정말 슬픈 건 관광지를 떠나 마지막을 맞는 나의 마음이었다. 우리는 끝이 나야 해. 너는 끝없는 여행을, 나는. 또 다른 나를. 너에게 나는 그리운 말이었다. 나는 매일 밤 나를 흉내 냈다. 관광지에서. 우리가 서로 멀어지다가 우연히 만나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길. 겹쳐진 많은 날들이 날 선 문장을 선물하고 우리는 걷고 있었다. 관광지가 되는 건 너무 슬픈 것 같아. 사랑은 질병 같았다.

조혜은 < 신부 수첩 >, 열화당

우리는 관광지를 걷고 있다. 많은 이가 순식간에 모여들고 많은 이가 순식간에 흩어지는 곳. 예상한 대로 길이 있고 예상한 대로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는 모든 게 정해진 곳이지. 누구나 알 것 같은 마음들이 사는 곳이지. 관광지에는 비슷한 움직임과 비슷한 눈빛이 넘친다. 폭우가 몰아치면 “서둘러 겁을 집어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서툰 풍경의 사람들” 속에 우리도 예외 없이 섞이고 만다. 각자의 존재를 위해 만났는데 우리는 왜 남들과 닮아가길 바라는 것일까? 남들과 닮은 관계를 만들고 싶은 것일까? 너는 나에게 유일한 장소였으면 좋겠다. 나는 너에게 유일한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우리끼리 만든 풍경 속을 걸었으면 좋겠다. 사랑에는 정확한 안내가 없으니까. 너에게 나는 단순한 답이 아니다. “너에게 나는 그리운 말”이었으면 좋겠다. 관광지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많아서 “관광지가 되는 건 너무 슬픈 것” 같다. 우리는 서로 쉽게 알지 못한다. 천천히 바라보는 거리 사이에 두 사람은 존재한다. 정영효(시인)


새의 위치

날아오르는 새는 얼마나 무거운지, 어떤 무게가 중력을 거스르는지,
우리는 가볍게 사랑하자. 기분이 좋아서 나는 너한테 오늘도 지고, 내일도 져야지.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겨울 코트엔 온통 깃털이 묻고,
공중에서 죽어가는 새는 중력을 거절하지 않네.
우리는 죽은 새처럼 말이 없네.
나는 너를 공기처럼 껴안아야지. 헐거워져서 팔이 빠지고, 헐거워져서 다리가 빠져야지.
나는 나를 줄줄 흘리고 다녀야지. 나는 조심 같은 건 할 수 없고, 나는 노력 같은 건 할 수 없네. 오늘은 내내 어제 오전 같고, 어제 오후 같고,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오늘은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오늘은 발자국이 생기기에 얼마나 좋은 날인지.
사람들은 전부 발자국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네. 춥다, 춥다. 그러면서 땅만 보며 걸어다니네.
눈 내리는 소리는 안 들리는데 눈을 밟으면 소리가 났다.
우리는 눈 내리는 소리처럼 말하자. 나는 너한테 안 들리는 소리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를 두 손에 보듬고 걸어가야지.

김행숙 < 에코의 초상 >, 문학과 지성사

가볍고 소리는 없지만 발자국을 남기기에 좋은 시간이 그랬다. 옆 사람에게 나를 들키는 그런 시간. 카톡 상태 메시지나 #럽스타그램으로 떠드는 그런 연애는 조금 우습다. 그러나 예쁘다. 예쁜 것들은 언제나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다. 소리 없이 와서 지켜보다가 소리 없이 떠난 흔적을 알아차렸을 때가 더 와 닿는 안부라서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았나.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할 줄 알아야지. 밥 먹었다는 말 말고, 어디서 무엇을 먹었는지 정도는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지. 쪼개지는 관심과 흩어지는 목소리 사이에서 맞는 눈은 차갑기보다 시원할 것이다. 내게 연애는 늘 그랬다. 죽은 새를 두 손에 포개고 있는 그 예민함, 조심스러움으로 걷는다. 내가 머물렀다가 지나간 사람들이 손 안에 있다. 죽은 줄도 모르고 새를 따뜻하게 해주어야지, 새를 쓰다듬고 있는 거야, 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 연애라면 사랑은 죽은 새를 묻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게 참 아름답지 않지. 중얼거리는 동안에 눈이 그치는 건 심장이 멎는 일보다 조용했다는 것만 안다. 연애가 내게 알려준 것이다. 서윤후(시인)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진은영 < 우리는 매일매일 >, 문학과 지성사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넌 아주 특별해. 특별해진 기분에 취해 대답했다. 너는 나를 알아보는구나. 세상에 딱 한 명뿐인 사람이 딱 한 명씩, 골목마다 가득 들어차 있는 줄도 모르고. 모래사막에서 단 한 톨의 색깔모래를 발견한 듯이 기뻐했다. 어느 날 그가 내 손을 놓으며 말했다. 넌 너무 이상해. 이상해진 기분으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끝이다. 계속 만나고 싶은 이유와 더는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눈꺼풀에 점이 있고 없는 정도로만 구별되는 쌍둥이 같다. 나를 그린 손과 지운 손이 같은 손이라니. 우울하다. 연애를 좋아하지 않는다.(좋아하지 않으면서 자꾸 하게 되는 것은 별개 문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애의 시작과 종언에 동원되는 모든 감정이 슬프다. 외로움의 발목으로 상대방의 깊은 곳에 뛰어들지만 나는 더 외로울 것이다. 연애는 단단한 유리도 아닌, 달콤한 설탕도 아닌, 다만 극적으로 박살나기 위해 만들어진 설탕유리처럼. 유계영(시인)


아침에

아침에 그가 떠나겠다고 했다. 나는 죽을 정도로 슬펐다. 가지 말아요. 가면 죽을 거예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입을 막고 울었다. 그가 부엌으로 따라 들어왔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어차피 겪을 일인데. 그는 등 뒤에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는 속옷과 바지를 갈아입었고, 나는 비누와 수건을 챙겨주었다. 그는 문을 나서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똑바로 걸아 나가 길모퉁이를 돌기 전에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았다. 팽팽히 감긴 악기 줄 같은 것이 툭, 끊어졌다.

이성복 < 어둠 속의 시 >, 열화당

이것은 벗어놓은 속옷과 바지가 빈 방에 놓여 있는 시다. / 이것은 아침에 떠나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입을 막고 우는 사람이 있는 시다. / 이것은 가야만 하는 사람과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어차피 겪을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시다. /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집에 머물렀던 두 사람에 관한 시다. / 이것은 그리하여 남겨진 사람이 속옷과 바지를 깨끗이 빨아서 반듯하게 접어놓는 시다. / 빈 집에 사랑이 드리운다. / 많은 날을 혼자서 잠이 들었다. 유진목(시인)


 

점심때
우리는
나무젓가락을 쪼갠다.

전복
민어
삼치
홍합
문어
회를 먹는다.
생오이
토마토
참외가
곁들인다.
점심때
나무젓가락을 움직이는
네 손에는
네 살빛하고
같은 빛깔의
보석.
그건
먹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먹고 있었다)

보석하고
같은 빛깔
네 입술은 살아서
움직이는 빛깔을
먹고 있었다.
여름 낮
점심때에.

전봉건 < 전봉건 시전집 >, 문학동네

전봉건은 1950년대에 데뷔한 시인이고, 그의 대표작은 주로 거대한 기획을 통해 쓴 장시와 연작시들로 꼽히지만, 내가 정말 사랑하는 그의 시편들의 거개는 장시나 연작시가 아니라 단시 쪽이다. ‘빛’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전봉건의 시 가운데 하나이며, 그 시기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도 단연 독보적으로 빛나는, 가벼움의 감각으로 이뤄진 뛰어난 시편이다. 여름 낮에 함께 횟집에서 식사를 하는 두 사람. 아마 70년대쯤일 것이고, 어딘가의 바닷가일 것이다. 창밖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을 것이다. 해수욕장보다는 작은 항구를 끼고 있는 곳이겠지. 두 사람은 그런 곳에서 여름을 보냈을 것이다. 바다에서 난 것도 먹고 땅에서 난 것도 먹었을 것이다. 그때는 창밖에서 뜨거운 여름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음식을 먹느라 움직이는 입술을 보았을 것이다. 그때 무슨 생각인가 들었을 것이다. 그때는 모든 것이 여름의 빛과 바다의 빛으로 감싸여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시의 전부이고, 이 시가 그리는 사랑이다. 황인찬(시인)


 

오이지

헤어진 애인이 꿈에 나왔다

물기 좀 짜줘요
오이지를 베로 싸서 줬더니
꼭 눈덩이를 뭉치듯
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었다

꿈속에서도
그런 게 미안했다

신미나 < 싱고, 라고 불렀다 >, 창작과비평사

사랑이 떠난 우리의 마음자리에는 온갖 감정이 깃든다. 슬픔은 가장 먼저 도착하는 감정이다. 이 슬픔의 한편은 사랑했던 대상이 사라진 상실감이고 다른 한편은 가야 할 길을 잃은 내 사랑에 대한 막막함이다. 슬픔이 조금 말라간다 싶으면 그리움이 온다. 이쯤 되면 우리의 머릿속에는 불행하고 나빴던 기억들보다는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들이 더 많이 남아 있기 마련인데, 이 장면들은 무슨 덩굴식물처럼 우르르 딸려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리움도 빛이 바래면 그 자리에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들어앉는다. 한번 들어앉아서는 절대 나가지 않는 감정이다. 물론 바래지도 않으며 마르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랑의 끝은 늘 미안함이다. 시를 읽으면서 나의 여름 밥상에는 오이지가 자주 올랐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혼자 살림을 해나가던 때에도 오이지는 입맛이 돌게 하는 여름 찬이 되어주었다. 냉국으로 먹어도 좋지만 무침으로 먹을 때가 더 많았는데 딱히 조리법이라 할 것도 없을 만큼 간단하다. 다만 소금물에서 꺼낸 오이지를 있는 힘껏 짜는 것이 관건인데 이렇게 해야 물도 생기지 않고 맛도 잘 변하지 않는다. 오이지에 대해 쓰다 보니 오이지 생각이 간절하다. 오이지를 힘주어 짜듯 한 시절 안간힘을 써가며 마음을 다한 연애도 생각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박준(시인)


 

사랑의 발명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이영광 < 나무는 간다 >, 창작과비평

어쩌면 사랑은 별게 아니다. 당신이 술에 취해서 문득, 어디 산에 올라가 굶어 죽어버리겠다고 투정을 부리기 시작할 때, 그런데 그 투정이 그냥 술 투정이 아니라 어쩐지 진심 같을 때, 그렇게 당신이 지금 당신의 슬픔을 감당하지 못할 때, 가장 친한 친구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산으로, 아니면 바다로, 당장 죽으러 떠날 것 같은 당신을 어떻게 말려야 하나. 어쩌면 사랑이 당신을 말릴 수 있지 않을까? 별것 아닌 것처럼, 내가 번개같이 발명한 이 사랑으로 당신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심정을 꺼내 쥔 것처럼, 그렇게 술잔을 쥔 채로 어쩔 줄 모르는 당신에게 나의 사랑이 필요하다면.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신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칠 년 연애 끝에 우리는 다시 친구로 돌아갔다. 하지만 별거 아닌 나의 사랑이 그때 당신 목숨을 살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당신을 살려서 나도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있다. 김상혁(시인)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 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년이 네 샛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깨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우리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 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쓰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 때 < 크리스마스 선물 >은 왜 물려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 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여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 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가락을 찔렀지

엄밀한 공(空)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논문까지 써놓고
이제 와 기억하는 건
용수 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 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은 무슨…… 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 모양의 얼룩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십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 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이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놓을수록 자꾸만 살에 눌어붙은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단편집과 중론(中論),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 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을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을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흰 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
진은영 < 훔쳐가는 노래 >, 창비

순간이 모여 시간이 되고, 부푼 시간들은 다시 한 시절로 봉인된다. 나에게 연애란, 순간의 허약함이 불러오는 아버지, 할머니, 엄마, 하느님의 다른 이름. 감정의 자립을 위해 무던히 애쓰면서도 다시 반복하고야 마는. 영원이라는 말을 영원히 쓰지 않기로 하는 맹세. 이 시를 고른 이유는 “내 생애의 한여름”이라는 구절 때문이다. 김은주(시인)


 

사랑과 교육

좋은 날이야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정말

어느 날의 잠에서 깨어나 떠올린 기억이
어느 날의 산책이 아니라
산책 없이 헤어진 날 들었던 너의 목소리라면 그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거리
모두 사라진 이 거리를 산책하며 쏟아지는
이상한 빛을 바라본다는 것
빛의 좋음 때문에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착각에 휘감기고 있다면
그것은 신의 사랑일 것이다
불타는 이 도시의 꼴이 신의 교육이듯이

산책하며 익히는 건 걸음걸이
세계 불타는 것 중요하지 않고
내가 어떤 궤적을 그리며 걷고 있구나 하는 정도
그리고

좋은 날에 걸으면 반드시 죽고 싶다는 것
죽지 말라고 할 사람 죽어야 할 이유

더는 없는데도 몇 번씩이나
살면서 그러라고 누가 가르쳐준 것처럼

송승언 < 현대시학 > 2016년 7월호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 산책도 잘 하지 않는다. 산책을 좋아하고 자주 생각하긴 한다. 산책하기 좋은 날이야. 산책할 때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정말. 햇빛과 새 지저귐이 생각난다, 야구 점퍼, 오리, 소나기가 떠오른다.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리워하고 상상한다. 산책을 할 땐 현재와 연애하지 않는다. 과거나 미래와 연애한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과거는 슬프고 미래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산책은 되돌아오는 것이다. 좋은 날에 걸으면 반드시 죽고 싶다는 것. 되돌아올 걸 알기 때문에 누군가는 죽고 싶다. 오한기(소설가)

    에디터
    손기은, 정우영, 유지성
    정세랑(소설가), 정지돈(소설가), 김승일(시인), 정영효(시인), 서윤후(시인), 유계영(시인), 유진목(시인), 황인찬(시인), 박준(시인), 김상혁(시인), 오한기(소설가), 김은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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