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道와 경상道 – 사람으로부터의 풍경

전라도 진안

보리와 인경쑥이 푸르던 계절이었다. 경북 영천의 한 비탈로 산새소리와 워낭 소리가 번갈아 울렸다. 풀밭에 들어선 소가 부리망을 풀어 주자마자 허겁지겁 풀을 뜯었다. 들이미는 카메라에 놀라 밭고랑을 별스럽게 이탈하던, 그래서 밭 갈던 오전 내도록 주인의 호통을 면치 못했던 다섯 살 소. 녀석의 허기를 보는 뒤늦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르신, 소가 많이 힘들겠어요.” “뭐가 힘드노! 여물 묵구 풀 뜯고 천날 만날 노는데. 인자 가을에 무, 배추 할 때까지 내 묵고 놀낀데.” “그래도…. 그런데 소 이름은 뭐예요?” “소가 이름이 어딨노! 소가 소지.”

농부는 대화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소가 지나간 자리로 포르르 부서지던 5월의 흙을 지켜본 한 시간 따위는, 이야기 몇 마디 듣겠다고 소 꽁무니를 애면글면 쫓던 걸음 따위는 그의 가슴에 담기지 않는 것 같았다. 무엇도 쉽게 배기지 않을 듯한 눈빛을 그제야 알아채고 돌아서는데, 그가 전화를 걸더니 대뜸 (아내에게) 지금 밥을 먹겠다고 했다. 그러곤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내 집은 요 길 너메 파란 집이요.” 길은 하나, 들은 사람도 하나건만 또렷한 건 하나도 없었다. 낮은 밥상에 그와 마주 앉기 전까진, 예정에 없이 이웃 마을 경로당의 재미를 자르고 올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의 울분이 터지기 전까진. 그는 봄 산에서 맛이 네 번 변한다는 나물을 젓가락에 올리며 당신이 부려온 네 마리의 소에 대해 말했다.

전라도 구례

그 기억은 내게 전남 장흥의 매생이와 함께 엮인다. 온 마을 사람이 몸을 낮추어 매생이를 뜯어내는 겨울. 매생이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이야기도 통하지 않을 듯한 마을에서 두 할아버지를 만났다. 앉자마자 냉기가 척추를 타고 오르는 방, 동네에서 노는 사람은 당신들 둘뿐이라는 할아버지에게 오래전의 매생이와 바다를 물었다. 그런데 두 분은 답을 영 딴 물음으로 받았다. “먼 곳에서 왔는디 식사는 하고 내려오셨소? 고생하요.” “당신들은 요렇게 기묘한 거 촬영해다가 우찌요? 내노면 팔리요? 다행이오.” “객비가 나와야 쓸 것인디…. 차에 기름은 넣어주요? 양심은 있는 고용주요.” “본 고향이 서울이요? 존데서 태어났소.”

30분 남짓한 만남으로는 좀체 일굴 수 없을 것 같은 온기. 보는지도 모르고 보게 된 것 같은 뭔가가 선연했다. 하지만 그들은 동행한 사진가의 카메라 앞에서 “아침부터 재수가 있을 모양”이라며 흘흘 웃었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는, 다신 못 볼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를 주고 와. 이 마을엔 점방이 없응께 옆 마을 가서 음료수라도 사다 놓게.”

경상도 봉화

삶의 자리를 두루 오간 내 눈은 종종 사람을 지역으로 나누기도 한다. 주관에 갇힌 어쭙잖은 결론일 수 있지만, 내가 경험한 경상도 사람은 대개 낯선 이를 겪는 마음의 문이 멀고 두꺼웠다. 예열의 시간이 필요한 경우다. 감나무 곁에서 감 따는 농부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바닥에 감을 수십 개는 떨어뜨리는 시간을 묵어서야 비로소 “멀리 나가소, (떨어지는 감) 맞으면 마 정신 못 차리요!” 외치는 게 그들이다.

전라도 사람은 사람 사이의 문턱을 좀 더 수월하게 넘는다. 넘자마자 내어 보일 보따리를 아예 따로 쥐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전남 광양에서 섬진강가 마을을 지나다 대문이 열린 흙집 마당으로 들어갔을 때, 세 남자는 막 포 뜬 민물회 앞에서 소주잔을 부딪치던 참이었다. 그들은 이야깃감을 찾는다는 나를 불러 앉혀 몇 마디 이르더니 난데없이 1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줬다. 젊은 사람이 고생한다며. 그러곤 손사래치는 내 반응까지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부산 해운대

두 지역 사람은 특정한 목표 앞에 또 다른 좌표를 잡기도 한다. 경북에서 한 오일장을 찾았을 때, 박 소쿠리를 끼고 앉은 아주머니가 니캉내캉 마수 한번 놓아보자며 말을 붙인 적이 있다. 깎아서 볶아 먹어도, 쇠고기 찌개에 넣어 먹어도 맛나다며 아주머니는 야리야리한 눈매 끝에 웃음을 달았다. 내가 쉽게 답을 못 주고 있는데 마늘 몇 접 놓고 앉았던 아저씨가 비집고 들어왔다. “아지매, 말이나 똑바로 하소. 이 박은 나물 안 되는 기라요. 생긴 꼴을 보믄 와 모르겠소. 삶아 갖고 바가지나 하믄 쓰것나.” 쌈불이 찰칵 켜진 아지매가 입을 떼려는 순간, 저 멀리 분기탱천한 아지매가 불붙은 속을 먼저 터트리고 말았다. “뭐시 이런 기 다 있노. 시상에 호박 상자를 디비니 마 홍시맨키로 이래 쪼매난 게 들었다. 우에만 지대로 넣고 밑에는 이런 걸 처박아논 기라. 때려 죽일 여편네가. 내 얼굴 보믄 안다. 다음 장에 오기만 해봐라. 내 이 호박 들어가 대가리를 뿌솨뿌릴 기라.”

표현의 우회를 모르는 듯한 경상도 사람에게 전남 곡성에서 만난 ‘점방’ 할머니의 의뭉스러운 화법은 속 시끄러워지는 난제일지도 모른다. 75년째 가게를 꾸리는 할머니와 두어 시간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할머니가 넌지시 동행한 사진가의 면면을 물었다. 머쓱한 사진가가 몸을 돌리려는 찰라, 할머니는 숨은 마음을 재빨리 꽂아 넣었다. “시방 우리 막내 손녀가 서울로 시집가고 싶어 하는디….”

경상도 산청

그렇게 다른 것 같던 이들도 사무친 속을 털어내는 순간만큼은 꼭 같은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일면식은커녕 어디서도 다시는 못 만날 내게, 어쩌면 내가 그런 객이기에 내밀한 이야기를 굽이굽이 꺼내어 보였던 걸까. 어쩌다 속을 쓸어내는 바람을 만난 것처럼.

하지만 바람에 흘리는 말에도 삶의 자리에서 긴 시간 동안 쌓아 올린 뭔가가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사람들이 가난을 말하는 방식에서 그것을 보았다. 배고픔으로 늘 애달프던 산중山中의 가난. 그런데 말이 펼쳐지는 모양새는 영남과 호남이 제법 다른 구석이 있었다.

담배밭으로 빽빽한 경북 영양의 산마을에서는 누구에게 묻건 말머리에 “엉성시럽다”는 말이 박혀 나왔다. 징글맞다, 지긋지긋하다쯤으로 해석되는 경상도 사투리. 하지만 특정한 상황에 대응하는 유의미한 언어라기보다는 고단하고 힘겨운 현실이 반복될 때 일단 터뜨리고 보는 ‘감정받이 언어’에 가깝다. 말보다는 외침을 닮은, 삶의 굴곡을 입 속에서 씹는 것 같은 그 발음은 주문처럼 들리기도 했다. 때때로 그것은 뒤이은 이야기의 감정을 미리 터뜨리는 역할도 했는데, ‘엉성시럽다’ 한 마디에 한을 반쯤 실어 보내고 시작한 이야기는 그 덕인지 낮게 읊조리듯 끝나기도 했다. 방패가 되어버린 그 멍투성이 단어를 듣는 게 나는 슬펐다.

전라도 장흥

특이한 건 ‘엉성시럽다’로 시작하는 숱한 사연의 말미에 곧잘 출몰하는 ‘통일벼’라는 단어였다. 그것은 경상도 어르신들이 옛이야기를 끝맺는 독특한 말법이기도 했다. “산나물을 태산겉이 해와가 잽쌀 선나꼽재이(아주 조금) 넣고 죽 끼려 먹으매 살았지. 박정희 대통령이 맨든 통일벼 나오구 밥 굶는 거 면했다 카이.”

지리산 아래 구례에서 만난 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어려웠던 산촌의 삶을 물으니 누군가는 “도시에서 지게 지는 사람은 자식들 대학 갈키도 농촌 부자는 대학 못 갈킨다는 말이 있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토종벌을 키우는 누군가는 이런 말도 했다. “토종벌한텐 꽃이 전부가 아녀. 가물 때 개울에 쩔은 염기부터 죽은 새 썩는 진이며 뱀 새끼 썩는 진까지 다 빼오는 게 토종벌이여. 여그 지리산서 사는 건 그런 거제.” 그 사람들에게 가난의 기억은 ‘감정으로 산화하는 것’이기보다 익숙한 객관화의 대상처럼 보였다.

경상도 경주

삶이라는 진창에서 한발 물러선 듯한 그들에게선 잊히지 않는 비유의 말도 더러 들었다. 한 농부는 4월과 5월의 가뭄을 말하면서 올챙이 눈을 빌렸다. “올챙이가 뭐라고 했느냐면 4월이 없는 데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 혔지. 한창 가문께 올챙이가 물이 있는 데로 모이고 모이고 하다 나중에는 말라 죽잖여.” 고로쇠 수액을 파는 산사람은 이런 얘기를 했다. “밤낮의 온도차가 커야 하제. 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나무가 웅크려 앉아서는 ‘나는 아직 클라믄 멀었어’ 혀. 근디 대낮에 날이 확 풀려 온도가 올라가믄 어때. ‘날이 뜨승께 커야겠다’ 허구 물을 빨아올리는 거여. 그때 물이 나는 겨. 근데 서울 사람들은 온종일 따땃한 보일러 방에 앉았응께 물이 날마다 나는 줄 알어.”

가보지 않은 땅에도 전라도와 경상도가 있고,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도 경상도와 전라도가 흘러간다. 그래서 나는 무엇도 또렷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그저 나를 움직이는 순간을 믿을 뿐이고, 그것으로 또 다른 순간을 만날 뿐. ‘여정’이 아닌 ‘순간’을 따라가는 여행은 모르는 것으로 들어가는 걸음이다. 길 위에는 내가 분명 보았건만 온전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겨울날 흙집 아랫목에서 초면의 할머니와 눅눅한 이불을 나눠 덮고 앉아 보는 가족사진이라든가, 불시에 방문한 이장님 집에서 새 나오는 급하게 끓인 고깃국의 단내라든가, 이른 아침 어부의 집 마당 빨랫줄에 널린 말장화가 떨구는 물기라든가, 문어잡이 배를 타고 3개월 만에 지문이 사라졌다던 섬마을 어부의 손바닥이라든가, ‘고우세요’ 한 마디에 거짓말처럼 또르르 떨어지던 할머니의 눈물 같은 것들. 그 모르겠는 것을 모르는 채로 다시 떠올린다. 전부이기에 가닥을 낱낱이 밝힐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세상의 뒤에서만 모이고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 또 한 번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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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피처 디렉터] 곧 두 번째 책을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