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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보다 남자

2016.11.17GQ

간절기 남자의 옷차림은 몸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술 한잔 안 마시고도.

남자를 고를 때 간절기 때 옷 입은 모습을 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대충 ‘퉁치는’ 사람 말고, 진짜 옷을 잘 입는 사람이 여러모로 괜찮다고. 트위터의 글을 읽다가 별표를 찍었다. 아무래도 맞는 말이었다. 옷차림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데 무조건 수긍할 순 없지만, 그런 사람과 꽤 잠자리를 가졌다.

여름에 누군가와 잘 때 옷차림이 끼어들 새는 없었다. 단지 온도에 육체가 격앙되고 밤이면 밖을 더 많이 헤맨 것은 맞다. 가을이 되자 계절의 특혜는 지워졌다. 봄의 부질없는 기운도 여름의 야성도 겨울의 세찬 갈구도 없이. 선명하고 차가운 공기의 고양이 이성이라는 단어로 대체된 듯 맑고 깨끗한 기분으로 상대를 만났다. 대체로 술 말고 커피를 더 마셨다.

달리 유혹을 안 했다.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눈은 자꾸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남자의) 한 올도 망가지지 않은 스웨터로 갔다. 둥그런 모양으로 목과 어깨의 경계를 긋는 스웨터의 입구(아직 늘어나지 않았다), 느슨한 소매 매무새. 시계는 없었다. 누가 요새 시계를 차지? 대신 단단한 금색 팔찌가 있었다. 여름이라면 질색했을 테지만, 맨살 위에서 뽐내지 않고 옷에 덮여 가끔씩 드러나는 금속에 닿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것은 과연 차가울 것인가. 뜨거울 리 만무하겠지….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머릿속으로 손사래를 치면서도 몸은 이미 온도를 측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지 않았다.

선글라스도 더 이상 여름에만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었다. 손가락 사이에 다리를 끼워 들고 다니다 가끔 쓰는 게 (한여름의 그 수많은 검은 안경들과 달리) 공해 같지 않았다. 머플러도 그랬다. 긴 머플러를 한 번 묶어 축 늘어뜨렸다면 그 끝을 잡고 그의 집 방향으로 던져버리고 싶었을 텐데. 짧은 머플러를 월계관 엮듯 둘러맨 남자의 목을 봤을 때는 재질을 확인하는 척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고독한 남자의 우수에 젖은 옆모습… 같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

그저 다른 계절에는 유난스럽게만 보이던 장신구가 성욕을 북돋울 뿐, 그렇게 간절기의 옷차림이라는 풍경을 맘 놓고 관전했다.

사실 남자는 자신의 벗은 몸을 감상할 기회를 준 적이 드물다. 누울 곳이 확보되자마자 옷을 벗어 던지고 내 몸을 누르거나, 아예 볼 수 없도록 엎드려 세우곤 했다. 흔들리는 가슴, 들어 올린 다리, 뒤틀리는 허리를 내준 것에 비해 내가 시각적으로 건질 수 있는 건 한참 적었다. 함께 샤워하는 걸 허락하는 남자도 드물었다. 옷에 싸인 남자의 나체가 어떤지 유추하는 방법을 몰라, 상상력을 발휘하며 즐거움을 얻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여름의 남자가 드러낸 가슴팍과 다리, 얇은 셔츠 밖으로 바치는 유두, 아니면 그걸 가리기 위해 입은 속옷 자국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장면이었다. 곧바로 섹스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간절기 옷차림의 마법에 몇 번을 홀린 후, 허물에 머물던 관심은 기어코 육체로 쏠렸다.

어떤 남자와 커피를 마시며 별것도 아닌 대화를 건성으로 나누던 도중 그 사람의 카디건에 대해 생각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냉방이나 난방처럼 강제적인 온도 조절 없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공기 속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외투. 재킷이나 코트가 아니니 벗어 던질 일도 없는 저 옷을, 우리가 자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탁자 밑을 봤을 때, 바짓단과 신발 사이를 꽉 메우고 있던 흰색 면양말에까지 신경이 미쳤을 때 나는 결심했다. 그를 밖으로 끄집어내 몸을 가까이하고 걸었다. 겉옷에 손등을 대고 부볐다. 실낱이 피부 위를 오가는 감각이 들었다. 방 안에 둘만이 되자 고개를 살짝 숙여 가슴 아래로 정렬된 단추를 열었다. 남자가 셔츠를 벗을 때는 보통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가을의 기쁨.

섹스를 마치자 그토록 특별하게 느낀 옷이 생기를 잃고 바닥에 흩어진 모습이 보였다. 허무했냐고? 계절 그 자체의 육중한 힘에 휘말리지 않은 점이 맘에 들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기억이 잘 안 나는(백현진의 노래처럼) 일도 없이 찬찬히 상대의 모습을 훑고, 거기에 애가 탔던 것은 오랜만이었으니까. 온 헛간을 다 불 지른 것 같은 여름을 지나 또 한바탕 할 겨울 이전의 괜찮은 나날. 가을의 잠자리는 그렇게 붙잡지도 잡히지도 않아 좋았다.

    에디터
    글 / 박공기(프리랜서 에디터)
    일러스트레이터
    HEN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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