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MEN OF THE YEAR #정지돈

정지돈의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는 형식 파괴 같은 선정적인 수식어가 아닌 올해 가장 현대적인 질문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서사가 분명한 작품을 시도해보신 적이 있나요? 영화를 전공하면서 알게 된 제 취향은 프랑스 영화, 그중에서도 알랭 레네나 고다르였어요. 그래서 처음 문학을 할 때도 누보로망을 좋아했지만 단편을 써보려니까 잘 안 되더라고요. 진짜 열심히 쓰기 시작하면서, 다른 작가들처럼 레이먼드 카버, 안톤 체홉 등을 필사해봤어요. 문학에서도 나름 기술을 익히고 나니, 전통적인 서사가 나랑 잘 안 맞고, 내가 잘할 수 있는 방식도 아니란 걸 알았죠.

실존 인물을 다루는 경우가 많죠. 한 인물의 문제의식에 주목하는 걸까요? 실존 인물이 주인공인 기존 작품은, 그의 한 시기에 집중해서 이걸 어떻게 극화할지 고민하죠. 제 접근 방식은 어떤 인물이 오면 ‘내가 이 인물을 얘기하겠어’예요. 그 인물이 했던 말, 사건은 당연하고, 그 시대에 있었던 다른 일들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매력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면 충분한 것 같아요. 소설이라는 관념 때문에 관심도 없는 부분을 서사화하는 게 가식적으로 느껴졌어요.

이른바 ‘순문학’에서는 묘사가 두드러지죠. 문장이라는 건 사실 개인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인데, 그걸 쓰지 않고 보여주려고 해요. 묘사를 객관화된 시점이라고 얘기하잖아요. 저 역시 전통적인 소설을 즐겨왔지만, 묘사가 너무 왜곡되고 남용된 측면이 없지 않아요. 사실 개인의 의사나 생각이 안 들어갔다기보다 안 들어간 척하는 것뿐이죠. 객관적인 척 하지만, 어차피 자기가 다 편집한 장면이면서 객관이라고 슬쩍 빠지는 건 말도 안 되는 미학적 태도라고 생각해요.

<내가 싸우듯이> 후기의 “패러디, 차용, 인용과는 결이 다른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해요. 패러디라기엔 조롱의 의도가 아니고, 인용이라기엔 그 부분들이 소설의 몸을 이루죠. 1960년대 이후 작곡가가 아닌 연주자의 시대가 열렸다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을 인용하면서, “악보 없는 연주”에 대해 언급하는데요, 이것이 곧 당신의 작업일까요. 저도 그 표현이 좋고, 제 소설에 대해 말해주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저는 작곡가가 아니에요. 악보 없는 연주지만 프리 재즈도 아니죠. 디제이랄까요. 원래 있는 곡과 소리를 배합해서 만들어요. 원문이 가지고 있던 배치를 어기면 인용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고다르에게 누군가가 당신 영화의 어떤 대사가 표절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고다르는 잘 기억나지 않고, 내가 내 영혼 속에서 했으면 그건 내 말이라고 답하죠.

독자가 소설이라고 여기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상관없어요. 다만 어떤 식으로 발화하는가가 중요해요. 나 정지돈 소설 봤는데, 뭐 재밌었지만 소설인지는 모르겠어, 라면 괜찮죠. 하지만 대개 “소설이 아니다”라고 굳이 말할 때는 문학이라는 범주에서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어요. 그땐 주장해야죠. 이것도 소설이라고.

처음엔 픽션인 것처럼 읽혀요. 하지만 실제 인물과 배경이 등장하면서, 혹시 이게 전부 진짜인가, 라고 의심하죠. 재미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만일 이게 소설이 아니라면 검증하고 썼는가, 라는 문제 제기가 가능해요. 그렇죠, 이게 소설이 아니라고 하면 제가 거짓말을 한 걸지도 몰라요. 근데 검색해보셨으면 알겠지만, 실제 인물이 대부분이에요. 활동 연대나 디테일은 얼마든지 바꾸죠. 전기나 역사라기엔 사실과 안 맞지만, 요즘 누가 역사를 사실에 기반해서 쓴다고 생각하나요? 그 둘 사이에 제 소설이 있어요.

정지돈의 소설은 다른 독서로 이어지는 길 같기도 해요. 하지만 지금처럼 책의 위상이 미미한 시대에, 하나의 독서가 다른 독서로 이어지는 경험은 흔치 않죠. 작품에 20세기 혁명기의 인물과 사건이 많이 등장하는 건 책이 단순히 책이 아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인가요? 책으로 상징되는 사상과 이념에 취해있었고, 믿음이 있었던 시대랄까요.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히 몸을 던지면서 살았어요. 당연히 지금은 그렇게 안 되죠. 지금과 굉장히 다른 회의, 절망의 방식, 그때의 에너지, 그것이 사회를 추동하고 바꾼 지점에 대한 매혹이 있어요. 그 시대의 이야기를 보면 사람들이 정말로 세계가 변하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소위 말하는 진정성이 너무 폭력적으로 사용돼서 문제인데, 그렇다고 냉소는 아무 구동력도 없고 사실 힘도 없는 것 같아요. 잘 먹고 잘 살면 돼, 이건 더 별로고요.

<눈먼 부엉이>의 “문학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나요?”라는 장의 질문, “질문이 아닌 의지”가 되는 질문이 곧 <내가 싸우듯이>처럼 보여요. 당신이 곧잘 예술가의 덕목처럼 말하는 ‘비전’과 연결되는 걸까요? 20세기 초반에는 비전이 있었죠. 포스트모던으로 오면서 미시적인 것이 중요해져서, 거대 담론은 다 버려지고 일상, 순간을 중시하는 시대가 열렸어요. 비전이 없는 시대를 살았던 제가, 지금 시작한 싸움이랄까요? 다시 이 세계를 거시적으로 보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생각하는 것,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냉소하지 않는 것이 필요한 때가 왔지만 옛날과 똑같을 수는 없어요. 지금 그걸 어떤 방식으로 할 수 있을까, 과거의 유산을 복기하면서 고민해나가는 과정 같아요.

공교롭게도 세상에 대해 냉소적일 수밖에 없는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죠. 문학평론가 김현이 70년대에 쓴 글이 있어요. 한국이 싸워야하는 악습의 첫 번째가 샤머니즘이라고요. 그래서 싸웠고, 샤머니즘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웬걸요, 대한민국은 아직도 샤머니즘 국가였어요.

혁명이 그렇지만, 새로운 것은 지속되기 어렵다는 운명이 있잖아요. 새로운 것, 특이한 걸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작업하진 않아요. 원래 하던 게 지루하다면 그 부분을 대치해봐요. 책 뒤에 에세이 겸 해설을 제가 썼잖아요. 미술에서는 흔히들 작가가 직접 스테이트먼트를 쓰는데, 문학에서는 이상하게 보죠. 이런 작은 대치로도 주례사 비평을 깨는 하나의 형식이 될 수 있어요. 그런 식의 새로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