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사랑의 계단

2016.12.27이충걸

운명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업적이 아니다. 개인적 선택은 자치적인 인생의 결정적 원소. 내가 어디에서 춤을 추는지, 다른 사람들은 나와 함께 추고 싶어 하는지와 상관없이 혼자 왈츠를 계속 추는 것. 하지만 이젠 안다. 완전히 독립된 개인은 없다. 양치질 같은 작은 일상도 치약 거품처럼 바깥으로 쭉 퍼져나가는 우주와 무관할 수 없다. 결국 자존이란 스스로의 편협한 기준에 은신하도록 강요하는 것 아닌가.

사회학자뿐 아니라 열한 살 소년에게조차 환멸을 주는 때에, 홀린 듯 아젠다를 지배하는 뉴스 헤드라인을 찾는다. 노새처럼 고개를 젓고 염소처럼 곱씹으며. 홈 포르노에 도핑하는 수수께끼들을 조롱하고 분석하고 회피하고 점검할 때, 깊고 깊은 우주 속 주름지고 광이 나는 구멍으로부터 무자비한 속도로 퍼붓는 무기력. 실족한 현실 속에선 허깨비 같은 생각만 든다. 아기 사슴이 엄마를 부르지만 그 엄마는 어딘가 술집에서 만취해 곧 집에 오진 않는 현실. 미라가 자기는 여전히 피라미드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용산 국립박물관 안에 있는 현실. 공장에서 8시간 일하고 집에 와 생각하니 다른 공장에 갔음을 깨닫는 현실.

가장 가까운 미래조차 수증기처럼 흩어진다. 할 수 있는 건 빠져나갈 만 한 다른 현실을 상상하는 것뿐. 시간이 평소보다 두 배 빠르게 가면 어떤 느낌이 들까? 교황이 서사모아 사람이라면? 누가 포르쉐 타르가를 깜짝 선물해준다면? 정치가들이 반목하는 대신 합의하고, 합의하 는 것에 다시 합의한다면? 엄마가 살인자라면? 고양이가 전부 개로 변한다면? 파나마 사람들이 북극에서 얼음을 꺼낸다면? 그 북극곰이 필사적으로 도망친다면? 도대체 아무도 늙지 않는다면?

또는 뇌간을 두드리는 맥락 없는 질문들. 세상은 왜 이렇게 설명하기 힘들까? 어떤 해답은 숨을 수밖에 없는 걸까? 세계란 이데올로기 논의의 핑계로만 존재하는 걸까? 공허한 수사들은 언제쯤 형태를 갖추게 될까? 개별적인 인생 목표로부터 모두가 밀려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목적의 요점은 무엇이었을까? 대답해줄 대상이 없다면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야 할까? 이런 모순은 타당할까?

시간은 상처에서 분노로 또 분노에서 혼란으로 흘러간다. 혼란은 똬리를 틀며 지구를 돌돌만다. 한 번, 두 번. 잠시 멈추곤 다시 여기저기에 물방울을 튕긴다. 때로 중심은 너무 고요하지만, 새해 첫날을 채 보내 기도 전에 입맛 잡치는 셀 수 없이 더러운 것들이 아침 점심 저녁 밥상에 깔린다. 탐욕의 유산이라는 시커먼 고깃덩어리. 관찰되지 않는 분자와 질량 없는 에테르의 패치워크. 계급의 부정함과 쌍으로 찾아온 악마 같은 낙담. 사상, 감정, 분노, 욕망의 끝없는 감시. 예측과 추측 페티시. 책임지는 사람과 무책임한 사람이 서로에게 주장하는 도덕적 희극. 무지한 엘리트와 무치한 천격이라는 단층선.

굶는 사람이 거의 없는 나라라지만, 다들 그렇게 운이 좋은 것 같진 않다. 인생에 별 관심이 없어졌다고 해도 오래 살 가망성이 큰 세상이기 때문에. 단순하게는 역사상 가장 망쳐진, 자기 마음 말고는 호소할 데가 없는, 무시가 일상인, 겨우 그 돈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재평가받는, 의미를 찾아 헤매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눈송이같이 측은하고 취약한 세대.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눈송이를 단번에 녹였다.

속해 있는 세대가 무엇이든 인생은 처음엔 지루하고 그 다음부턴 공포스러운 법이다. 사춘기가 지나서도 멎지 않는 지금의 실존주의적 공포를 들여다보면 통과 의례중인 사회가 처소를 잃고 한데서 떨고 있다. 사실사적, 공적인 삶에 통과 의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역은 없다. 출생에서 죽음까지, 혹은 그 후에도 아주 오래 의미로 감싸여있다. 자주 잊지만, 가장 작은 제스처나 신호도 그가 속한 집단에선 큰 의미를 갖는다. 좀처럼 굴곡 없는 직선의 진행은 아니다. 각층이 이전의 것과 구별되는 계단이나 사다리의 칸에 더 가깝다. 역할이 늘어나면 올라가야 하는 사다리 칸의 밀도도 증가한다. 사실 통과 의례란 하나의 기간으로서 어느 단계를 완료하는 것과 해내야 하는 역할에 동반되는 또 다른 시작이다. 대부분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데, 사다리 각각의 칸 사이에 저질러진 이상한 행동들의 용례를 들자면, 부서 회식이 있는 날, 비틀거리며 김포공항에서 위례까지 걸어가거나, 내복만 입고 눈길을 달리거나, 소뿔을 잡고 뽑으려 한다거나, 포피를 잘라낸 기념으로 깡소주를 퍼마시는 식이다. 상징과 의미의 진정 떠들썩한 난장판이랄까.

무자비하도록 버텨온 날들.(꼭 ‘버텨온’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완전한 좌절은 새로운 무엇을 예고한다. 패러다임은 관습적인 무지에서 분별 있는 간섭으로 이동 중이다. 도덕적 존립에 관심 많은 지금 시민들은 자기 삶을 충분히 이해한 후 스스로의 윤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거라고 고대하는 부처를 닮지 않았다. 곧, 통과 의례는 특정한 과제를 수행할 준비가 됐는지 확인한다. 정교한 시험은 강한 의지로 시연되어야 한다. 통과 의례를 완수하는 데 실패한 이들에겐 만만치 않은 문제가 기다린다. ‘미완성인’, ‘그다지 어른은 아닌’, ‘뭔가 그르친’ 자라는 레테르. 한편, 우리가 겪는 공통된 공식 인정 의식 중엔 첫 돌과 비슷하나 또 하나 주문된 세트, 장례식이 동반된다. 모두가 모여 한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그의 시신이나 재를 어떤 용기容器에 담아 땅에 묻음으로써 일원 중 하나를 덜어내는. 사회적 단계마다 의식화된 질서에 대한 열망으로서 통과 의례는 공동체의 삶에 기어코 질서와 논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수렵 채집 사회를 지나오는 동안 천년의 시간이 가르쳐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형이상학적 베일을 벗겨온 과학과 기술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시간 동안 그 많은 대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거라곤 고작 또 하나의 곤경이란 내러티브라니. 역사의 끝, 기대도 흥분도 없는 퇴폐, 근대보다 낙후된 현대라니.

혹시 이런 이야기가 서로를 곤란하게 하는 현대 담론으로 비칠까? 따분하고 고리타분해서 미치게 만들까? 나는 당신의 고양이, 당신의 여자친구, 당신 여자친구의 언니, 당신 여자친구 언니의 고양이를 더 사랑하기 위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 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그럴 때 거울 속의 나하고 얘기만 나누고 싶진 않았다. 비바람 몰아쳐도 이겨내고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에디터
    이충걸
    포토그래퍼
    Gettyimages / 이매진스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