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전시보다 많은 전시장

2017.01.12GQ

새로운 전시는 없는데, 새로운 전시장은 늘어난다. 이 수상한 조난 신호를 새 공간에 대한 기대 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지금 미술은 시대와 개인으로부터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가.

연말과 연초 중 언제를 더 좋아하는가로 사람의 성격을 구별할 수 있다면, 나는 전자에 속한다. 한 해가 거의 끝났지만 새해는 아직 시작 되지 않은, 잠깐이나마 세상만사에서 손을 놓아도 괜찮을 것 같은 그 무책임한 시간이 좋다. 그런 연말 애호가의 관점에서 2016년 연말은, 누구의 어떤 관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만, 전혀 연말답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끝나지 않을 수 있을까. 심지어 이미 과거에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상상도 못했던 모습으로 다시 튀어나와 한 해의 끝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2016년의 달력은 넘어갔지만 20세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끝나버린 것들도 있다. 이를테면 달력의 숫자가 바뀌면 그때까지의 일은 모두 과거의 창고에 처박히고 세상이 전부 리셋된다는 듯이, 다사다난했던 20세기가 끝나고 무언가 더 새롭고 신기한 21세기가 시작된다는 세기 전환기의 낙관적 믿음은 끝났다. 물론 새로운 세기에 대한 냉소는 이미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미스터리로 되돌아와 포탄처럼 현재에 구멍을 내는 것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다. 세계가 낯선 얼굴을 들이밀며 여태까지의 이야기를 고쳐 쓸 것을 요구할 때, 현재는 과거의 흔적 위에 덧씌워진 깨끗한 백지가 아니라 과거의 지층들이 서로 겹쳐지면서 떠오르는 어렴풋한 무늬 같은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 불투명함 속에서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정반대의 접근, 그러니까 20세기는 멋지고 생산적인 시대였으며 21세기의 남은 할 일은 과거의 유산을 향유하고 재가공하는 것이라는 이번 세기 초의 몽상적 향수 또한 지속되기 어렵다. 아직도 레트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현재의 곤란을 벗어나 과거의 가장 달콤한 크림만을 찾아다니는 시간 속의 관광 여행이 아니라, 현재에 드러난 문제의 뿌리를 찾아 과거를 파헤치는 예측 불가의 발굴 작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기대도 과거에 대한 추억도 갈 곳을 잃은 2017년 연초에 새해를 전망하고 새로움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은 아무래도 승산이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기시감이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전시 구경을 다니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새해를 맞을 때마다 올해는 지루하게 흘러가리라고 막연히 짐작하곤 했다. 확실히 좋은 시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매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불꽃놀이처럼, 때로는 폭격처럼 쏟아졌다. 미래를 도모한다기보다 지금 이 순간을 불태우려는 움직임들이 지난 몇 년 동안 이른바 ‘신생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전시장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올해는 어떨까? 아직도 불태울 것이 남아 있을까, 아니면 불타버린 터전에 연기만 피어오르는 정말로 지루한 한 해가 될까? 혹은 어쩌면, 잔불이 남은 빈터에 마을이 들어서는 것을 보게 될까?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말로 옮기는 점쟁이 같은 재주는 없다. 그러나 해가 바뀐다고 상황이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맨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전시’가 아니라 새로운 ‘전시장’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상황이 정상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기존 제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흐르는 생산성의 징후일 수도 있지만, 거꾸로 기존 제도가 성장과 재생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고갈의 조짐일 수도 있다. 전시장은 사방을 벽으로 가리고 외부로부터 분리된 자족적 공간을 연출하지만, 그 자체로 독립된 공간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전시 공간은 오로지 보기 위한 공간, 일종의 무대이며, 따라서 다양한 유형의 무대 뒤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생산 공간(작가의 스튜디오, 각종 매체별 제작 공장 등), 매매 공간(상업 화랑의 경우 전시장 뒤 내실, 아트 페어와 경매장 등의 미술 시장) 보존 공간(작가와 컬렉터의 개인 창고, 미술관 수장고 등)과 연계 해서 성립하고, 이 모든 것이 통틀어 미술의 제도를 이룬다. 그리고 이런 공간적 분할에 따라 전시를 담당하는 큐레이터, 판매를 담당하는 딜러, 작업을 담당하는 미술가의 기본적인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다. 만약 이 생태계가 완벽하게 돌아간다면, 기존 방식의 전시장이 늘어날 뿐이지 새로운 종류의 전시장이 도입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완벽하지 않고, 그래서 비상 탈출의 시도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새로운 전시장은 그런 탈출의 결과다. 그것은 흔히 기존의 제도화된 생산-유통-보존의 회로가 미술 생산을 획일화하고 있다고 느끼는 미술가들의 불만에서 출발한다. 넓게 보자면 이미 역사의 일부가 된 지난 세기의 새로운 시도들, 그러니까 책이나 엽서, 편지 같은 미디어를 이용한 작업들이나, 도시 한가운데부터 인적이 드문 황무지에 이르기까지 특정 장소에 일시적으로 현현하는 작업들도 모두 그렇게 새로운 전시장을 찾아 움직인 결과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미술가들이 한시적으로 자체적인 활동의 장을 도모하는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들이 있다. 이런 공간들은 전 세계적으로 각자의 맥락과 지역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활동 방식을 보이지만, 지난 세기 전환기에 두드러졌던 어떤 패턴은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각 지역별 미술계가 전 지구적 네트워크로 재편되는 과도기적 시간 속에서, 극히 일부의 미술만을 밀어 올리는 양극화된 미술 시장과 거리를 두고, 산업 시대의 노후한 도시 설비들이 재개발되는 과도기적인 공간의 틈새에 정착해, 문화 예술에 투입되는 정부의 공적 기금과 사적인 후원, 그리고 제도 비평적 접근에 우호적인 미술관 및 비엔날레와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번성했다.

2010년대 중반 서울에서 생겨난, 또는 아직 생겨날 수 있는 새로운 전시장들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이 연장선은 ‘세기 전환기’ 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 최대한 길게 잡자면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아우를 수 있는 시간의 블록을 이미 비스듬하게 벗어나고 있기도 하다. 이 시간은 현재 한국의 문화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많은 사람이 스스로 성장하면서 자기 분야를 개척해나간 시간, 그래서 점점 더 특별하게 기억되는 시간이다. 그것은 청춘의 시대이자 문화의 시대이자 세계화의 시대로서, 다양한 분야가 각자의 역사적 특수성과 분과 간 경계를 넘어 하나의 총체적인 동시대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 미술의 경우, 그 시간은 정부와 대기업의 지원하에 새로운 미술관과 비엔날레가 속속 생겨나고 상업 화랑과 대안 공간이 동반 성장하며 새로운 세대의 미술가와 큐레이터와 평론가 들이 등장한 미술 제도의 형성기이자 황금기로 기억된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끝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 시간은 이미 상상도 하기 어려운 무지개 저편의 황금단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형성되는 일종의 세대적 단층이 있다.

같은 시간이라도 어떤 시점에 서있느냐에 따라 눈에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대학 졸업자들의 눈에 비친 미술 시장과 공적 기금이 동시에 위축 되고 미술이 도시 재생의 수단으로 동원되면서 형성된 2010년대의 새로운 풍경이 있다. 그리고 1997년 금융 위기 이후 미술 제도의 바깥에서 대개 미성년 신분으로, 문화 산업의 소비자이자 교육 대상자로서 각자가 경험한 2000년대의 사적이고 집단적인 기억들이 있다. 그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이른바 ‘신생 공간’의 새로움을 이끌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빈곤하거나, 저급하거나, 존중받을 수 없는 것, 애초에 소통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했다. 또 누군가는 거기서 이미 오래전에 끝나버린 세기 전환기를 비로소 장례 치를 수 있는, 아직 죽지 않은 자의 생기를 발견했다. 그러나 제대로 구색을 갖춘 공간도 없고 대개는 자본도 없는 상태로, 기존의 역할 분담이나 공간 분할도 전부 무시하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미술 작업과 파생 상품의 경계도 개의치 않고 아주 작은 기회만 보이면 무턱대고 돌진하는 신생 공간의 활동 패턴은 그 자체로 조난의 신호이기도 했다.

그것은 막연히 새로운 얼굴로서 찬미되거나 낯선 이방인으로서 거절당하기 전에, 이 분야 전체가 세기 전환기 이후를 새롭게 모색해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독해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 편지는 아직 수신인을 찾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여전히 필요한 새로움이 있다. 단순히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새로운 바람이 아니라 이 분야의 뿌리 깊은 과제들을 풀어나가는 새로운 해법을 고안해야 하고, 전시장 내부를 채울 새로운 작업의 방법 뿐만 아니라 전시장과 그것을 둘러싼 다른 공간들을 묶어주는 새로운 제도의 작동 방식을 찾아야 한다. 결국 전시장이란 무언가 전에 없던 것이 담기기를 바라는, 무언가 바깥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텅 빈 그릇일 뿐이다.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은 그 바람이 충족되고, 때로는 눈을 씻는 것 같은, 또 때로는 눈을 후벼 파는 것처럼 괴롭지만 시선을 돌릴 수 없는 것들을 만난다.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그런 기대와 경험이 전시장을 살아있게 한다. 하지만 이것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토대와 기반, 그리고 지향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해서이고, 어떻게 뒷받침될 수 있을까. 다시 한 해가, 아직 누구도 살아보지 않은 새로운 시간이 포식자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에디터
    GQ 피처팀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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