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맛없는 밥의 한식

한식에 대한 기대치가 주야장천 드높다. ‘폭식의 시대’에서 ‘미식의 시대’로 옮겨가는 듯한 시대적 배경도 있다. 그런데 한식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밥이 아닐까? 그렇다면 쌀이야말로 중요하지 않을까?

한 가지 통계를 살펴보자. 1979년 1백35.6킬로그램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던 한국인 1인당 쌀 소비량은 그 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2015년에는 62.9킬로그램을 기록했다. 이를 환산하면 하루 소비량은 1백72그램. 단순하게 말하면 현재 한국인은 하루에 공기밥 하나 분량의 쌀을 소비하고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36년 동안 한국인의 쌀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 생산량은 1인당 1백 킬로그램 이상을 먹던 1980년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생산량은 그대로 유지되는 반면,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줄어든다. 따라서 쌀은 해마다 재고가 쌓이고 그렇게 남아도는 쌀은 국민 세금으로 창고에 보관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 쌀 재고 관리 비용은 1만 톤당 연간 36억원. 올 한 해에만 1조원에 가까운 세금을 쌀 보관 비용으로 쓴 셈이다.

이미 오래전 우리나라의 쌀 생산과 소비는 악순환의 사이클에 접어들었다.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반면, 생산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쌀은 계속 남아돌고, 끝없이 추락하는 쌀 값에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진다. 그럼에도 쌀 소비 촉진을 위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해마다 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고 있다. 아침밥을 먹어라, 밀가루 빵 대신 쌀로 만든 빵을 먹어라, ‘빼빼로데이’에 가래떡을 선물하라고 권한다.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고 트렌드를 바꾸는 문제를 이들은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심지어 촌스럽게 외치고 있다. 전형적인 관 주도형 전시 행정이다. 이런 캠페인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는 아마 그들 스스로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쌀 관련 문제는 생산자(농민)와 공급자(유통업자) 입장에서 해법을 모색해왔다. 시장 구조 역시 생산자와 공급자 중심이다. 정작 중요한 소비자의 권리와 입장은 외면돼왔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한국인은 평생을 매일같이 밥을 먹는다. 인간은 원래 익숙한 것에는 무심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쌀과 밥에 무지하다. 둘째, 한국인에게 쌀은 단순한 먹거리 이상의 상징과 의미를 가진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기꺼운 마음으로 소비해야 할 대상이다. 따라서 쌀의 품질을 따지고 비평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졌다. 정부와 공급자는 이러한 소비자의 태도를 의도적으로 방치해왔다. 쌀은 당연히 소비해야 하는 상품이기 때문에 굳이 소비자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가장 다양하고 우수한 품종의 쌀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맛없는 밥을 먹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모순이다.

현재 국립종자원 국가품종목록에 등재된 쌀 품종은 293종. 이 가운데 밥용 쌀은 1백70여 종에 이른다. 이렇게 다양한 품종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가 아는 품종은 거의 없다. 아니, 우리나라에 이처럼 다양한 품종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소비자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고급 품종으로 알고 있는 것이 일본 품종인 ‘고시히카리’. 물론 고시히카리가 좋은 품종임은 분명하다. 1956년 처음 개발된 이후 무려 60년 동안 일본 최고 품종으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로 일본도 한국도 이미 고시히카리를 능가하는 다양한 벼를 개발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가진 1백70여종의 밥용 품종 가운데는 ‘최고품질품종(최고미)’이 있다. 농촌진흥청은 2003년부터 밥맛이 우수하고 재배 안전성이 높고 수확량이 많은 벼를 개발해 최고품질품종으로 선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삼광, 운광, 고품, 호품, 칠보, 하이아미, 진수미, 영호 진미, 미품, 수광, 대보, 현품, 해품, 해담쌀, 청품 등 15종이 개발된 상태다. 이 품종들은 적어도 밥맛에 있어서는 고시히카리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정작 소비자는 품질은 고 사하고 최고미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쌀 소비를 늘리기 위한 정책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 지난 36년간 지속된 쌀 소비 감소를 당장 역전시킬 수는 없다. 결국 쌀은 계속 남는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예정된 현실이자 미래라면, 쌀에 덧씌워진 상징과 의미를 걷어내고 이제 적어도 ‘맛’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소비자가 밥맛 좋은 고품질의 쌀을 맛보고 난 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맛있는 밥을 위한 조건은 맛있는 커피와 동일하다. 커피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생두의 품질이다. 밥도 마찬가지다. 밥맛을 결정하는 첫 번째 요소는 좋은 품종의 쌀을 선택하는 것이다. 생두의 품질을 살리는 것이 로스팅이라면 쌀의 품질은 도정 방식이 결정한다. 로스팅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원두의 맛과 풍미가 사라지듯 도정한 지 오래된 쌀도 마찬 가지다. 로스팅 일자를 확인하는 것 이상으로 쌀의 도정일자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같은 조건의 원두라면 추출 도구와 추출 방식은 취향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밥을 짓는 도구는 생각만큼이나 결정적이지 않다. 값비싼 밥솥보다는 차라리 좋은 품종의 쌀에 투자하는 것이 맛있는 밥을 보장한다. 따라서 기호식품인 커피에 쏟는 만큼만 쌀에 관심을 쏟으면 지금보다 훨씬 맛있는 밥을 기대할 수 있다. 심지어 커피는 순간이지만 밥은 매일이고 평생이다.

다행스럽게도 미약하나마 의미 있는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다. 어쩌면 2017년을 기점으로 전혀 새로운 쌀 시장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전망을 가능케 하는 몇 가지 단서를 살펴보기로 한다.

좋은 식재료에 대한 욕구의 증가 TV만 틀면 온통 ‘먹방’과 ‘쿡방’이 난무한다. 이에 대해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도 늘어나지만 여전히 음식 관련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보장된다. 인기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음식점에는 오늘도 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너무 싫증내지 마시라. 이는 식문화의 선진국들이 이미 거쳐온 과정이다. 음식이 유행이 되고 대중문화로 자리 잡는 것은 ‘폭식의 시대’에서 ‘미식의 시대’로 전환하는 과도기적 현상이다. 미식의 시대가 되면 음식 자체보다는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즉 식재료에 관심을 갖게 된다. 안전하고 품질 좋은 식재료에 대한 관심은 미식의 기본 조건이다. 한국 음식에서 가장 중요하고 많이 소비되는 식재료는 쌀이다. 좋은 쌀에 대한 욕구와 수요는 시기의 문제일 뿐 필연적으로 도래할 과정이다.

양곡관리법 시행규칙의 개정 먹는 문제의 이면에는 정치가 있다. 정치의 결과는 법률로서 확정되고 공표된다. 소비자가 품질 좋은 쌀을 선택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사실은 법이다. 현재의 ‘양곡관리법 시행규칙’ 에서는 여러 품종의 쌀을 섞어서 판매하는 ‘혼합’이 가능하도록, 그리고 완전미의 비율을 따지는 등급검사를 생략해도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소비자의 권리보다는 공급자의 이익과 편의를 대변한 결과다. 다행스럽게도 두 가지 문제 가운데 한 가지가 해결됐다. 정부는 2016년 10월 양곡관리법 시행규칙 개정을 통해 쌀 등급 표시의 전면 시행을 발표했다. 앞으로는 완전미의 비율에 따라 ‘특, 상, 보통’으로 표시하고 그 외의 품질에 대해서는 ‘등외’라고 표시하도록 의무화했다. 시장은 법보다 빨리 반응한다. 개정된 법률은 1년 동안의 유예기간을 거쳐 2017년 10월부터 적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마트들은 이미 지난해 말부터 등급 표시가 된 쌀만 판매하고 있다. 올해부터 쌀 유통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개선된 셈이다.

쌀 전문 편집매장의 등장 일본 도쿄에 있는 작은 쌀가게 ‘츠바리야’와 ‘오코메야’. 이곳은 최근 들어 쌀 유통에 관심이 많은 업계 관계자들이 앞다투어 찾는 곳이다. 일본 니가타현 우오누마시는 일본에서 가장 비싸고 품질 좋은 쌀을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도쿄 중심가인 니혼바시에 위치한 ‘츠바리야’는 우오누마에서 생산된 쌀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매장이다. 이에 반해 쇄락한 상점가에 위치한 ‘오코메야’는 디자인 회사가 지역 상권을 살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리모델링한 곳이다. 츠바리야와 오코메야 모두 쌀뿐만 아니라 쌀과 관련된 제품과 간단한 음식을 판매하는 일종의 편집매장이다. 공간과 패키지 디자인 역시 기존의 쌀가게와는 전혀 다른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두 곳이 그 규모에 비해 남다른 관심을 받는 것은 일본과 한국 모두 쌀 소비가 준다는 공통의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매장들이 하나의 간결한 대안이라는 게 확인된다면, 조만간 한국에서도 비슷한 매장을 만나게 될 것이다.

쌀 소비 패턴의 변화 지금까지 우리나라 가정에서 쌀은 절대로 떨어지면 안 되는 필수 식재료였다. 따라서 가마니로 구입하는 대량 구매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신선식품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즉석밥의 품질이 높아지면서 포장 단위의 소량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중이다. 10킬로그램~20킬로그램 중심이던 포장단위는 2킬로그램~5킬로그램 단위로 변하고 있다. 심지어 3백 그램 단위로 아주 조금 포장된 쌀도 등장했다. 적은 양을 구매하는 소비패턴은 자연스레 고급화와 다양화로 이어지는 법이다. 아울러 식품유통업체와 소셜 커머스가 경쟁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신선 배송 시스템’이 쌀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전국 각지의 유명 산지에서 생산된 쌀을 도정한 지 2~3일 내로 배송할 수 있다. 심지어 소비 패턴을 자세히 분석한다면 일주일 분량씩 정기 배송도 가능하다. 소비자는 단지 산지와 품종만 선택하면 언제든 신선하고 품질 좋은 쌀을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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