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그래퍼의 필름 사진

이제 누구도 선뜻 필름으로 사진을 찍지 않는 시절이지만, 필름 사진에는 고유한 정서가 있다. 우연이 끼어들어 극적인 효과가 생기기도 하고 복잡한 플롯의 결합이 아주 직설적인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여러 가지가 섞인 마술적인 균형. 어쩌면 필름 사진의 본질은 부드러운 낭만이라기보다는 돌이킬 수 없는 냉담함에 가깝다. 그래서 더 한참 보고 싶고. 젊은 사진가들이 각자 제일 좋아하는 카메라와 필름으로 찍은 흑백 사진 10컷. 할 말은 많지만 남자 옷, 심플, 두 가지 단어에만 집중했다.

CONNOR SITTING ON TREE RICOH GR1S, KENTMERE 400

늦은 밤, 코너가 느닷없이 나를 찾아왔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스튜디오도 없고, 집엔 손님도 있어 무작정 집 밖으로 나갔다. 즉흥적인 밤, 단순했던 날. 그래서 더 아름다운 사진이 쏟아졌다. 이후 데님 블루종과 검은색 팬츠가 심플함의 기준이 되었다. 정재환

 

MAN NIKON F3, KODAK TRI-X 400

왕가위 영화를 좋아한다. 그의 영화엔 흰색 브리프를 입은 남자가 있다. 그런 남자가 나오지 않아도, 그래 보였다. 그런 식으로 섹시한 남자를 촬영하고 싶었다. 곽기곤

 

무제 NIKON F4, KODAK TRI-X 400

2000년 초반, 쿠바 하바나 어느 공원 풀밭에서 거리 미용사에게 레게 머리를 부탁했다. 동양 여자가 신기했는지, 야구하는 동네 꼬마들이 몰려들었다. 그중 한 아이를 찍었다. 아직 남자가 되기 전의 모습, 가장 순진하고 단순한 어린 남자일 때를. 안하진

 

FRAGILE CONTAX G2, KODAK TRI-X 400

남자 옷을 입은 여자에 대한 어떤 상상들이 있었다. 늦은 밤, 생 로랑의 블랙 스모킹 재킷을 입은 젊은 여자를 찍었다.김참

 

COAT & CIGARETTE HASSELBLAD 503CW, KODAK T-MAX 100

<지큐>가 던진 주제를 두고, 권철화를 떠올렸다. 잔뜩 멋 부린 남자가 아니라 말끔한 스웨트 셔츠와 잘 만든 코트를 입은 남자. 담배를 문 권철화는 좀 흐트러졌지만 허리는 꼿꼿했다. 김재훈

 

UNTITLED CANON 1V, KODAK T-MAX 400

회색 코트가 어울리는 남자, 겨자색 면 티셔츠를 잘 입은 남자, 또 어떤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엔 낡은 컨버스 운동화를 신은 남자가 유독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날들에는 청량한 하늘색 청바지를 길들여 입은 단순한 옷차림에 유독 눈길이 갔다. 그런 남자의 뒷모습은 다른 사람이 눈치챌 정도로 한참 쳐다보게 된다. 신선혜

 

WHITE T CONTAX T3, KODAK T-MAX 400

남자 패션을 생각했을 때, 깨끗한 화이트 티셔츠가 떠올랐다. 아직 미성숙한, 그래서 순수한 소년의 모습도. 박자욱

 

이현신, 2017년 1월 HASSELBLAD 503CW, KODAK T-MAX 400

흰 면 티셔츠와 청바지는 가장 단순하지만 제일 어려운 룩이다. 소재와 핏이 무척 중요한 데다 어떻게 꾸미고 가리고 할 여지 없이 그대로 드러나니까 모든 게 다 잘 맞아야 한다. 옷 얘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매사가 다 그런 것 같다. 쉬워 보이는 게 더 어렵고, 운명처럼 맞는 뭔가가 있다. 오래된 필름을 꺼내 썼더니 사진에 이상한 얼룩이 생겼다. 그게 제일 마음에 든다면 이상한 걸까. 김형식

 

APPLICATION CONTAX G2, ILFORD FP4 PLUS

샤워와 향수. 부재의 자취가 선명한 남자가 좋다. 지난밤, 그가 남긴 흔적은 결국 좋은 향수 냄새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깨끗하게 샤워한 후 뒤집어쓴, 향기가 또렷했다. 그의 냄새가 날 때마다 그가 스스로를 정돈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향수병을 들고 제주도에 갔다. 박기숙

 

SIMPLICITY CONTAX G2, KODAK T-MAX 400

흑백 사진은 화려하지 않고 투박하지만, 깊이가 있다. 그런 면에서 남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도구 중 하나다. 장소는 강원도 어느 해변, 때는 2013년 한겨울, 나와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공유하는 친구와의 촬영. 목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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