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 16 Short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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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 편지의 처음은 백지. 희거나 위압적이다.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일단 내가 일하는 책상에 대해 쓸까? 아니면 지금 내가 듣는 음악, 아침에 꺼내 입은 옷, 미래에 대해? 그것이 우리가 16년을 지속해온 대화의 첫머리로 적합할까? 편지도 일기처럼 두 종류가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과 자기를 위한 것. 우선 내가 어떤 그룹에 속해야 할지 정해야겠다.

02 – 인생 편집의 기술은 시간의 한 묶음을 구출하는 일이다. 기억은 연대기 순으로 놓이지 않는다. 생략되거나 축약되거나 건너뛴다. 압축의 예술은 너무 순식간이라 어느 때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분간이 잘 안된다. 그냥 나는 쌓으면 쓰러질 만큼의 높이로 한 달 한 달을 기록했다.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것을 그렇게 작은 미디어 상자에 담았을까? 시간의 밖, 움직임 없는 공간으로 이동하는 동안 어떤 풍경을 놓쳤을까? 지금, 15세기 항해사가 대륙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일 없이 떠다니는 해초를 보는 이런 기분. 계속 전진. 고도 변화 없음.

03 – 잡지는 예술처럼 모순될 수도 어려울 수도 무가치할 수도 있다. 참혹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있다. 다만 지루해서는 안 된다. 잡지는 동의와 거부, 동정과 반발이라는, 색깔 또렷한 팔레트.

04 – 기억은 행위라서 스스로를 초대하지만 되돌리기 어렵다. <지큐>와 함께 출발했던 순수한 행운과 대의 사이에서 주춤거렸던 선택들. 확실히 행복한 시간과 웃는 얼굴만 가득한 사진첩은 아니다. 그사이 스타일, 지식, 태도, 문명화에 굉장한 진보가 있었나? 축하할 만한 변화는?

05 – 그땐 외모로 누군가를 평할 줄 모르는 사람은 생각이 얄팍한 거라던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맞는 줄 알았다. 사람은 언어 이외의 것들, 외형과 행실로 얻는 힌트로 서로 통하며, 옷은 계급이 아니라 예의의 문제이고, 너무 꾸며도 웃기지만 아예 무심한 건 더 한심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격식은 아쉬운 사람한테나 필요한 것. 런던에 갈 땐 타이를 매는 게 그 위대한 도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란 말, 너무 웃겨졌다. 옷 잘 입는 사람들은 취향과 유산을 존중한다고? 패턴과 질감, 색상의 조합을 공부해 개성과 전통을 유지한다고?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데? 한꺼풀 벗기면 몽땅 전깃줄 위에서 비 맞은 중딩 닭들. 대한민국에서 괜찮은 남자를 찾느니 대수학 논문을 쓰는 염소를 찾는 게 더 빠를 것이다.

06 – 종이는 더 이상 저널리즘을 생산하는 정확한 매체가 아니며, 돈도 더이상 종이에 머무르지 않는 현실. 더는 양보할 수 없을 만큼 피처 기사가 축소되었다. 저널리스트(라고 스스로 정의해온 사람)들은 글과 자신과의 관계를 재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유행이 내 모든 관심사는 아니었다. 나에겐 언어가 중요했다. 조마조마한 구두법, 변덕스러운 문장의 리듬, 미묘하게 충혈된 어간, 다층적인 우화. 형용사는 더 강조해야 할 부분이었다. 하지만, 예전엔 추출했지만 이젠 희석한다. 글이 너무 많아서. 예민한 지각, 세밀한 묘사의 문학적 글쓰기보다 일본 단가처럼 짧은 글이 추앙받아서. 오리아나 팔라치의 끈질김과 존 필저의 용기를 경배하고 프랑스 해체주의 작가들을 연구한다 한들 그래서 뭐?

07 – <지큐>의 페이지들은 늘 통념을 뒤집는 데 할애되었다. 발은 공중에서 흔들리고 피는 머리로 쏠려 지금까지 고여 있다. 오직 신식과 구식을 만드는 일그러진 아름다움만이 무서웠다.

08 – 잡지 저널리즘이라는 허황한 목소리. 스타일의 환상에 대한 초보 공식. 시가처럼, 내 것이 아닌 제스처의 이론화. 속물적 가치의 조악한 측정. 늘 섭섭한 지식. 마음에 들거나 안 드는 것에 대한 신경질적인 직관. 강요된 자성. 팩트와 견해의 뒤틀린 막간. 돈도 없으면서 막 긁는 그늘진 습관. 허술한 탈출 판타지. 그 여파로 이젠 스타일이라는 말도 지겹다.

09 – 모처럼 수트를 멋있게 차려입은 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주기를 바란다. “어쩜 그렇게 잘생겼어?” 세계 어느 식당에서도 자리가 나고, 공항에서 검색도 안 당하고, 자전거를 탄 소년들이 끽 소리를 내며 멈춰서서 “와, 진짜 멋져요!” 하고 연호하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안 일어난다. 백날 다음 생을 기약해보지만 다음생은 없다.

10 – 언제 행복했는지 생각도 안 나는 건 지금 내 기분이 나빠서겠지? 문화의 폭격적 해체는 새로운 의제를 요구하지만, 다가올 겨울을 예측하는 안테나가 없다. 불안의 현실적 해독제는 행동이지만, 하지만 어떻게?

11 – 지금까지 <지큐> 버전 속에서 발견한 것은 다양성을 통해 사람을 더 알게 된다는 확신이다. Y 염색체도, 존재를 통치하던 젠더의 압박도 지난 세기의 것. 누군가의 자아 – 성별, 국적, 인종, 직책, 종교 – 로 그를 소외시키는 위협적인 사회에서 제대로 된 남자라면 (문학적 암시가 아닌) 말 그대로 차이에 대한 존중을 보여줘야 한다. 여자가 사회적 지능, 유연한 대화, 도덕적 권위, 앉아서 집중하는 능력이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그 공은 이미 높을 것이다. 아니면 조용히 딴 데 가서 죽거나.

12 – <지큐>는 나의 자서전이 아니다. 다른 이의 생각을 듣는 침착한 라디오였다. 존재를 건축하는 행동과 감정의 줄거리.

13 – 당신도 나처럼 특징을 만드는 형제의 유사성을 느끼나? 나의 성격은 유머스러운 듯 따분해. 근데 종잡을 수 없긴 당신도 마찬가지다. 처음 나는 우리 관계에 확신이 없었고, 어떤 대화가 당신을 즐겁게 할지 몰랐다. 혹시 한 번은 웃게 했을까? 그리고 매달의 긴박함과 친밀감 속에서 193권째 <지큐>를 만들었다. 어떻게, 안개 낀 만에 닻을 내린 요트 갑판 위에 윤곽 잃은 어깨로 서 있는 나를 혹시 알아보려나? 재킷이 찢어지고, 라펠이 떨어지고, 주머니에 문신처럼 청회색 볼펜 자국이 나 있는 나를?

14 – 왜 하필 이런 세계에 태어나 대립과 혐오를 물려받게 되었을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단락은 도대체 무엇일까? 시대정신의 모든 부분이 도덕을 거스르는 세태라면 <지큐>가 한 남자의 존재론적 레벨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지큐>가 정립한 정체성은 과연 피상적인 것 그 이상일까? 그러니 <지큐>가 든 가방을 메고 불투명한 미래 속으로 걸어가면 되나? 그때도 <지큐>는 불 켜진 성채에 그대로 남아 있을까?

15 – 인생엔 원래 혼돈이 필요한 걸까? 하지만 자기의 행동 양식은 각자에게 달린 것. 단지 당신의 재능을 따르는 자유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16 – 끝으로, 당신의 포용력 있으면서 복잡한 성격이야말로 쉽지 않은 세월 속에서 내가 정말 독자에게 구했던 거라고 이제야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