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억척스러운 인천 여자

2017.03.24GQ

인천 기질이란 게 나름 있다지만 내 속에 피로 도니 피를 뽑아 보일 수는 없고 해서.

인천광역시 중구 동인천동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나 내가 사는 이곳이 인천이구나 하는 최초의 각인은 중학교를 배정 받던 초등학교 6학년 7반 교실에서 이뤄졌다. 상인천여자중학교라고 했다. 하인천여자중학교는 왜 없을까, 짝꿍과 낄낄대던 찰나 인천남중이라고 했다. 육상부 멀리뛰기 선수였던 나와 높이뛰기 선수였던 짝꿍은 그날로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몇 달 뒤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우리는 조우했다. 인천공설운동장이라 할 것 같으면 내가 지긋지긋 치를 떠는 그곳이 아니던가. 프로야구 시즌이면 점퍼 양쪽 호주머니에 소주 넣고 바지 양쪽 뒷주머니에 소주 꽂고 보러 간 야구는 안 보고, 운동장을 등지고 앉은 채 마시지 말라는 소주로 병나발을 불던 아빠가 거의 매일 들르던 그곳이 아니던가. 알코올중독자들이 미쳐 모여드는 악의 소굴만 같던 그곳에서 나는 내 심장이 이러다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싶게 빠른 보폭으로 제자리에서 발 구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운동을 그만두고 전국체전 응원석에 앉아 있던 내가 전국체전 운동장에 나와 몸을 푸는 짝꿍을 발견한 것이다. 드라마 속 비껴가는 인연을 잇고자 미친 듯이 머리 풀고 뛰는 한 여인이 나라도 되는 양 계단을 거푸 타고 또 타 내려갔을 때, 막상 마주한 짝꿍 녀석의 반응은 이랬다. “어라, 머리 뭐냐. 대가리가 식빵인데?” 그 순간 귓불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단발머리 여중 1학년생이 뭐라 했겠나. 빤하지. 욕했겠지. “이 새끼 이거 개새끼 아냐.” 나름 첫사랑이라 추억 거리를 꽤 남기기도 했다지만, 둘의 지론이 좋을 땐 로맨스고 싫을 땐 난도질이라 서로가 서로에게 할 말은 또 화살처럼 쏘대왔던 탓에 우리는 그 길로 그 흔한 “잘 가”도 없이 가뿐하게 돌아설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집에 갔겠나. 물론 어디 안 가고 응원석에 앉아 높이뛰기 바를 향해 달려드는 짝꿍에게 멀찍이서 이래라저래라 코치하기 바빴다. 바가 떨어질 때마다 저 병신 새끼, 입버릇처럼 반복하던 게 나였고 예선 탈락이 확정되자 눈물 콧물 터져버린 것도 나였다. 사랑이었겠나. 필시 의리였을 것이다.

훗날 짝꿍은 동인천역에서 미용실을 열었다. 커트 솜씨가 소문이 나서 분점 몇을 예상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운이었겠나. 필시 팔자였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헤어 디자이너로서의 눈썰미가 그때 이미 다분했던 게 아닌가, 종종 그런 뒷북도 쳐보는 나이기도 하다.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니 나는 인천 여자가 맞는데 보통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답하는 편이다. “인천년이요, 그니까 인천 짠년이요, 아니 인천 쫀년이요.” 누가 그러라고 시킨것도 아니고 누가 그렇다고 가르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스스로에게 ‘년’을 못 붙여 안달이었을까, 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내 대답이 그래서 어쩔 건데, 라는 식의 싸울 기세여서 마주한 상대를 상당히 당황하게 함과 동시에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 정도는 익히 들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건 좀 이상해. 나처럼 인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문재 시인도 장석남 시인도 인천 사람 그러지 인천놈이요, 인천 짠놈이요, 인천 쫀놈이요, 라고는 안 하잖아. 나보다 24년 앞서 인천에서 나고 자란 엄마가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인천 여자들이 먹고사는데는 엄청 지독스럽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억척들이 없어. 왜 화숙이 엄마 기억 안 나? 테이블 두 개짜리 포장마차 해서 돈 벌어 갖고 너 초등학교 때 주안역 사거리에 통닭집도 냈었잖아. 개업 때 계모임 사람들 다 갔는데 체인이라 개그맨 엄용수가 와서 우리 기념 촬영도 하고 그랬지 아마. 가발 안 쓸 때야, 키가 거기다 대면 네 아빠는 한기범이라니까. 가만 어디 그 사진 있을 텐데”, “엄마 앨범에 있어. 녹색 벨벳 블라우스 입고 회색 롱스커트 입고 검정 스타킹 신고 엄마 완전 촌스러운 나이아가라 파마했을 때야. 근데 화숙이 아줌마는 지금 어디 살아? 무슨 장사해?”, “살긴, 걔 죽었어. 내가 얘기 안 했나? 사내새끼 하나 잘못 꾀어서 가게 싹 다 날리고 한동안 티코 타고 다니면서 식당에 김치 해주러 다녔잖아. 걔 김치 죽였잖아. 걔가 담근 고들빼기김치는 네 아빠도 여즉 얘기하잖아. 암튼 암이라더니 얼마 못 살았어. 내가 곗돈 2백만원 떼먹혀가지고 다만 얼마라도 받아낼까 병원 갔다가 아침저녁 밥해 나른 거 생각하면…. 뭐 그 복이 어디 가겠냐, 다 네 복이려니 하는데 사는 거 참 허하지. 뼛골 빠지게 죽어라 일만 하다 간 년. 오라지게 실속도 없는 년. 텔레비전 보면 죄다 사모님 타령인데 나나 내 친구들은 죄다 왜 이 모양인가 몰라”, “내가 그 이유 알려줄까? 엄마 지난 선거 때 지역구 누구 찍었어?”, “윤상현”, “봐,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미친년. 찍을 사람이 없었다니까.”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다. 고향과 여행지, 이제 막 다다른 곳과 언젠가 떠나온 곳, 잘 아는 동네와 두 번 다시 찾지 않은 고장. 우리는 거기서 겪은 시간으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말들을 부려놓는다. 제주를, 송파를, 안동을, 충남을, 남원과 철원과 분당을… 여행자이자 관찰자이자 고향사람이자 외지인으로서 각각 들여다본다.

    에디터
    글 / 김민정(시인)
    포토그래퍼
    이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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