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분당 신도시 소년들

2017.03.27GQ

경기도와 서울을 굳이 동부와 서부로 나눈 서바이벌 프로그램 <고등래퍼>에서 경인 동부, 특히 분당은 묘한 지점을 차지한다.

경기도 하남시 신장동

“<고등래퍼> 참가자 분들 중에 ‘고등’은 있는데 ‘래퍼’ 분들이 좀 없는 것 같아서.” <고등래퍼>의 예선 무대에서 ‘경인 동부’지역 참가자 이수린이 회심의 일격처럼 내뱉은 말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것은? ‘고등은 있다’는 게 뭔 말이지? 뭔가 모욕을 위해서 한 말이겠지? 그래 그렇게 맥락으로만 알아듣는다 치더라도, ‘래퍼’인 것보다 ‘고등’인 게 더 좋은 것 아닌가? 혼란스러운 건 이뿐만이 아니다. 애초에 팀 이름이 ‘경인 동부’라니? ‘경기 동부’나 ‘서부 경인지역’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경인 동부’는 무엇이지? 경기도와 인천을 굳이 묶어서 그 덩어리의 동쪽 부분을 말하는 건가? 아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굳이 경기도의 동부지역을 가리키는 데 인천은 왜 포함해서 말하는 거지? ‘경인 동부, 한국 힙합의 고향!’이라는 설명과 동시에 VCR로 타이거JK와 더콰이엇의 모습이 나온다. 잠깐만. 의정부 출신의 타이거 JK와 광명 출신의 더콰이엇이 같은 지역 사람이 되는 건가? 아니 근데 광명은 서울 기준으로 치면 경기도 중에서도 서쪽 아냐? 그리고 의정부는 동서로 나누기엔 좀 애매하잖아. 굳이 나누자면 북쪽 아닌가? 그러다 참가자 대부분이 분당에 살고 있다는 것마저 밝혀지기 시작하자 나의 혼란은 경인 동부라는 알 수 없는 범위의 면적만큼 광활해졌다.

혼란은 잠시 미뤄두고, <고등래퍼>라는 시청률 1퍼센트대의 쇼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 <쇼 미 더 머니>가 <슈퍼스타 K>를 밀어내고 대국민 오디션이 되자, 리그는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리스펙 당하지 못하는 소수의 여성 래퍼들은 <언프리티 랩스타>가 됐고, 중년의 배우들은 뜬금없게도 <힙합의 민족>에서 ‘할미넴’이 되었다. 메이저가 되면 어쩐지 진정성을 잃는 것처럼 평가되는 힙합 장르의 속성과는 달리 ‘성인 남성’들만의 판은 케이팝과의 매시업을 통해 더욱 더 견고해졌고, 연습생조차 포화 상태인 케이팝 시장을 피해 너도 나도 MC가 된 미성년자들만의 리그, <고등래퍼>의 탄생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응당 ‘진짜 질린다. 토할 것 같애. 엠넷이랑 힙합 손잡고 꺼져’를 읊조려야 정치적으로 올발랐겠으나, 서바이벌에 대한 중독 증세를 끝내 치유하지 못하고 첫 에피소드를 경건한 자세로 감상했다.

마침내 방송이 시작됐다. 모든 참가자의 이름 앞에 ‘출신 지역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그렇다. 이 방송은 지역 토너먼트 형식이었던 것이다. 직감했다. ‘나는 이 쇼를 무조건 보게 될 것이다.’ 힙합은 싫었으나 지역 대항전을 놓칠 순 없었다. 지역 대항전 포맷이 좋아서 <한식대첩>의 모든 시즌을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본 적도 있지 않았나. 괴로움의 눈물이 흘렀다. ‘서울 강서’ 복길 A.K.A 라임밤(Rhyme Bomb). 급기야 아무도 불러줄 일 없는 나만의 랩 네임도 지었다.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실제로 한강 서쪽에 살기 때문에 나도 ‘강서’ 타이틀을 달았지만 이 쇼에서 서울과 수도권의 지역을 동서로 구분하는 것은 여전히 어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북 지역의 분류가 익숙한 우리나라에서 경기도와 서울을 굳이 동부와 서부로 나눈 것은 아마도 미국 힙합의 대립 구도를 가져온 것이라 짐작되는데, 그 덕분에 중랑과 강남 친구들이 같은 팀을 먹고, 의정부와 분당 친구들이 악수를 하는 등 뜻밖의 지역 대통합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회가 거듭될수록 제작진에겐 그런 미국 본토 힙합의 지역적 대결 구도 재현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고등래퍼>의 세계관은 힙합을 그저 소재로 차용한 90년대 학원 만화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로컬에 대한 애착이나 오프라인 정체성이 약한 지금의 10대들을 지역으로 거칠게 나누어 묶고 토너먼트를 진행하는 방식. 구성원 중에는 현역 고등학생이 아닌 자퇴하고 힙합에 전념해 명성을 쌓아올린 탈학교 청소년들도 있다. 멘토인 딥플로우는 자신을 채치수, 팀원을 강백호와 서태웅에 비교하고 머쓱해한다. 대놓고 <슬램덩크>인 것이다. “안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북산 정대만이 울며 외쳤던 이 오랜 진심은 ‘스윙스 선생님, 힙합이 하고 싶어요!’로 바뀌어 이 쇼의 정신을 관통한다. 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이 아무리 악을 쓰며 이센스와 비와이를 모방해도 <고등래퍼>에서 보여주는 힙합은 “난 슬플 땐 힙합을 춰”(천계영, <언플러그드 보이>), “자유가 뭔지 알아? 자기 자신이 해답을 찾는 게 자유다! 그걸 힙합이라 그러지!”(김수용, <힙합>) 속 힙합과 의미상으로 더 가까워 보인다. 힙합 대신 그 자리에 무엇을 채워도 같은 연출이 가능한 쇼. 이 묘한 90년대 정서로의 환기와 학원 만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10대만의 유치하지만 가슴 찡한 성장서사는 경인 동부지역 일부 참가자들의 면면을 통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경인 동부지역, 그중에서도 분당지역 참가자들의 가사를 두고 평소 갖고 있던 지역적 편견에 근거해 일반화 대잔치를 하고자 하니 이 글을 읽는 해당 지역 주민들께 미리 양해를 구한다. 의문 그 자체였던 ‘경인 동부’라는 지역은 카멜 무스탕과 쿠지 니트, 구제 패딩 점퍼와 프린트 박스티를 입은 이수린과 윤병호가 등장하며 본격적인 정체성을 찾는다. 학교를 자퇴해 소속 표기가 따로 없었던 이 두 사람은 현재 10대 힙합신에선 나름 유명하다는 ‘딕키즈’ 크루의 일원으로 소개되었다. 사실 소개를 듣고나니 얼마나 음악을 잘하는지, 얼마나 좋은 랩을 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90년대 힙합’을 표방한다는 분당 출신 99년생 자퇴생들이라니. 그게 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모든 참가자의 랩에 신들린 것처럼 반응하는 ‘리액션 가이’ 이수린과 어떤 질문을 받아도 에너지가 하나도 없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제가 제일 잘해요. 제가 제일 강해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윤병호는 그 자체로 미스터리였다. 아랫니에 그릴즈를 낀 이수린이 먼저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내가 생각하기엔 / 인생이란 건 복권 / 꼬라박고 꼬라박아보면 당첨 / 멋진 옷! 입어야 돼 간지 나려면 / 거지 같은 옷 버리고 나니 남은 게 없어 / 쩌리들은 짜지고!” 그렇다. 90년대 힙합이란 건 오렌지족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었구나! 나름의 납득을 하고 있는데 윤병호가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 나와 다른 참가자와 달리 별다른 멘트 없이 비트를 달라고 말했다. “왕따에서 벗어났지 You Know that homies / 이 시스템이 낳은 건 피해자밖에 없어서 손가락질하지 / 날 양아치라 불러도 내가 왜 그걸 신경 써 / 학교 그만두고 나서 나는 바로 거리로 ay!” 아니 이것은! 유영진이 90년대로 타임워프를 한대도 이보다 더 듬성듬성 쓸 순 없을 사회 비판 랩! 한 축이 90년대의 유일한 빛을 담당하더니 한 축은 그 당시 청소년의 절망과 어둠을 완벽히 꿰뚫고 있는 것이었다.

경기도 동남부의 대표 신도시. 이제는 닳아버린 슬로건. 천당 아래 분당. ‘연신내 불쏘시개’, ‘부평 라이터’ 같은 닉네임은 수긍해도 ‘정자동 피바다’ 같은 건 어쩐지 어색한 곳. 정자동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주상복합에 사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수도권 지역과의 정서적 유대에서 평균 소득과 높은 부동산 가격을 근거로 소외당하는 곳. 지방 도시, 비서울권 지역의 또래 래퍼들이 “전라도의 혼을 싣고 서울로 와부러 다불어”, “경상을 싹 뒤집고 난 상경”과 같은 라임으로 서울에 울분을 쏟고 시비를 걸 때, 과거의 흔적이 없는 신도시 출신인 그들은 시계를 돌려놓고 살아본 적도 없는 90년대의 명암을 말한다. 이후 2라운드에서 두 사람은 다시 본인들만의 시간을 말한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

빛의 이수린이 엇박으로 그루브를 타며 “오늘도 타임라인 위엔 많은 여자들의 관심 / 좋아요가 달리지 보여 네 질투와 시기” 하고 능글거리자, 어둠의 윤병호가 나타난다. “네놈은 대체 왜 반말을 해”라며 과거 자신을 무시했던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붓다가 갑자기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입에 갖다 대며 “기도해 매일 밤 / 악몽을 꾸지 않게 해달라고 / 떨어지는 꿈을 꾸지 않게 해달라고” 하며 하늘에 외친다. 90년대의 시간과 신도시의 공간을 초월해 고전 인터넷 소설 세계로 접속하고 만 분당의 멋있는 청소년이여!

이 해석이 바보 같은 건 당연하다. 네 번째 에피소드에선 경인 동부지역 참가자의 멘토인 스윙스가 굳이 홍대로 그들을 불러내 치즈돈가스를 사준다. 모두가 눈치껏 잘 썰어먹고 있는 가운데 이수린은 “이거 어떻게 먹는 거야?” 하고 묻는다. 나는 ‘저것 봐. 분당 애라서 홍대 돈가스 어떻게 먹는지 모르나 봐’ 하고는 잠시 이 대책 없는 일반화에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분당에 머문 적도, 살아본 적도 없다. 구도심만을 옮겨 다니며 살아온 나 같은 외부인에게 분당은 왜곡되기 좋은 도시다. 강남을 거쳐 그린벨트 사이 고속도로를 한참 지나야 나타나는 도시는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아무리 봐도 강남의 ‘베드타운’인 이곳이 왜 부촌으로 불리는지. 판교의 테크노밸리와 현대백화점, 백현동 카페 거리, 서현역 AK플라자 광장, 율동공원 등 나름 유명한 곳들은 모두 가봤지만 장소가 목적을 충족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거주민들과 기업을 위해 조성되고 계획된 공간에 거주민도, 직장인도 아닌 완벽한 외부의 변수인 내가 잘 적응한다면 그건 잘못된 실험일 것이다. 10년 전,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 A는 수원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그 학교의 기숙사에 살면서도 본인의 생활은 모두 분당에서 해결했다. 똑같은 햄버거를 파는 맥도날드에 가고, 똑같은 생필품을 파는 드러그스토어에 가더라도 ‘분당’이 주는 편리함과 안락함을 누리고 싶어 했다. 깔끔하게 정비된 탄천의 조깅 트랙을 걷고 싶어 5000번대 경기도 버스를 타고 30분을 이동했고, 그래서 과외 학생을 굳이 그 근처에서만 구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5년쯤 지나 나는 A를 다시 만났다. 요즘도 쇼핑하러 분당까지 가냐고 묻는 내 말에 A는 “아니 나 요즘 강남에 살아” 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도 “맞아, 분당보단 강남이지”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러곤 혼자서 신도시가 주는 허무함에 대해 떠들었다. 아무리 혼자 욕망을 키워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 곳. 못난 울분을 다 쏟아낼 때쯤 친구가 말했다. “난 그래도 돈 벌면 서울보단 분당.” 둘 사이에 휭 하고 바람이 불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히는 ‘경인 동부’의 최하민은 전주 출신이다. 그는 자퇴를 한 뒤 대구로 갔다가 성남에 자리를 잡은 뒤, 이 서바이벌에 출전했다. 이방인으로 출전한 그의 랩. “그래 내가 걸어온 길들이 / 분홍 구름으로 가득 부풀어 풍성하지 / 저 길이 열려 내 손을 벌려 한껏 달려갈 때가 되면 / 가면을 쓰지 않아도 환하게 웃을 수 있겠지!” 모두가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진짜 사나이 혹은 진짜 괴물 같아 보일지 대결하는 와중에 <언플러그드 보이>의 현겸이처럼 분홍색 풍선껌을 불었다. “기집애 같은 랩은 하지 않는다”는 기성 래퍼들로 이루어진 멘토들도 왜인지 그에게 최고점을 주었고, 그는 90년대의 빛과 어둠을 말한다는 ‘슬램덩크형’ 딕키즈 멤버 두 사람과 함께 ‘경인 동부’의 최종 멤버가 되었다. 출구 없는 도시를 사이에 두고 교차하는 시선이 만들어낸 이 혼란은 지역색이 강하면 강할수록 ‘리얼’한 것으로 여기던 기존의 힙합 서바이벌과 달리, 현재 <고등래퍼>에서 가장 강한 빛을 가지고 있다. 내겐 죽을 때까지 재밌을 ‘지역대항전’에서 “우리가 남이 아니어도 상관없지 않나요”를 말하는 팀이 우세하다는 건 확실히 재밌는 일이다. 굳이 힙합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10대들이 뭔가 할 수 있다 말하는 이 복고적인 쇼에서.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다. 고향과 여행지, 이제 막 다다른 곳과 언젠가 떠나온 곳, 잘 아는 동네와 두 번 다시 찾지 않은 고장. 우리는 거기서 겪은 시간으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말들을 부려놓는다. 제주를, 송파를, 안동을, 충남을, 남원과 철원과 분당을… 여행자이자 관찰자이자 고향사람이자 외지인으로서 각각 들여다본다.

    에디터
    글 / 복길(칼럼니스트)
    포토그래퍼
    이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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